소설리스트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25화 (25/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25화.

말없이 앤시아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주는 체온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나 단이 앤시아의 손을 붙잡고 다독여 주었다.

“우리 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다니. 영지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공작에게 책임을 물을 일이야. 그러니 너무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해.”

“속상하다뇨. 전혀요. 제가 괜히 만약에 있을 만한 일을 물어봤어요.”

이미 다 들켰다는 걸 알면서도 앤시아가 말을 돌리자 나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장 거슬리는 걸 말해줄래? 하나 정도는 해결해 주고 돌아가야 이 오라버니 마음이 편할 것 같구나.”

무슨 답을 내어놓는 앤시아가 상상하지 못할 수준의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것처럼 나 단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앤시아만 바라보았다.

악행을 쌓는 건 앤시아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원작에서 앤시아가 틀어박힌 이후에도 공작은 내버려 둘 뿐 버리거나 내쫓지 않았다. 원작 여주인 비앙카의 등장 이후 그녀와 가까워진 후에도 공작은 앤시아에게 이혼을 요구하지 않았다.

앤시아가 비앙카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서야 사용인들을 통해 듣게 된 공작 부인에 대한 부풀려진 악행을 언급했다. 쓸모없는 건 용서해도 무슨 해악을 끼칠지 모를 악녀와 한집에서 살 생각은 없다며 빠르게 이혼으로 이어졌다. 의외였던 건 황제의 참견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악녀라고 해 봤자 대부분 부풀려진 소문이었지만, 지금은 그 소문조차 안 퍼질 거 같단 말이지.

쓸모없는 연약한 앤시아의 몸뚱이만으로는 예정대로 이혼당하기 힘들었다. 악행이든 험담이든 쌓이고 쌓여 나중에 공작의 귀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당장 앤시아가 벌이는 일들은 너무도 하찮았다.

문득 앤시아는 자신을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나단과 그 뒤로 어떻게든 안쪽을 보려 서성이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호기심 가득한 저들의 지레짐작이 오늘의 일을 부풀려 퍼트릴 것이다.

자신의 어설픈 악행 따위보다 나단과 함께 있는 쪽이 훨씬 더 쉽게 악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단만 함께해 준다면 어려운 일도 쉽게만 느껴졌다.

나단에게는 미안하지만, 추문은 여자에게만 불리한 거니까. 나중에 제대로 사과할게.”

속으로 용서를 빌며 배시시 웃어 보이자 나단 역시 마주 웃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나단을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온실 주변을 서성이는 인기척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슬슬 신경이 쓰였다. 악녀로 추문을 쌓는 건 좋지만, 나단이 머무는 동안 지나치게 와전되는 건 곤란했다.

너무 파장이 커지면 간신히 자라나는 악의 씨앗이 나단의 손에 뿌리째 뽑힐 것 같았다. 게다가 나단이 나쁜 말을 듣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런 거 없어요.”

“앤시아.”

“정말이에요. 뭐가 있으려고 해도 도착한 지 삼 일밖에 되지 않은걸요.”

“그러니? 그럼 시녀장이라도….”

“아뇨! 시녀장은 좀 깐깐한 것 뿐이에요. 한동안 공작가의 대소사는 전부 로사에게 맡기고 전 편하게 놀러 다니려고요.”

“그러니? 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단이 있는 동안엔 어설픈 악녀 짓도 못 하겠다. 뭐라도 할라치면 몇 배는 더 센 조언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로사를 중얼거리는 나단의 신경을 돌리기 위해 앤시아는 적당한 핑계를 꺼냈다.

“오라버니, 그럼 우리 쇼핑이라도 하러 갈까요?”

“그것도 좋지만, 그보다 혼수품을 확인해 보는 건 어떨까?”

“아!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요.”

다행히 화제 전환에 성공한 앤시아는 냉큼 나단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나단과 손을 잡고 나오자 주변을 배회하던 하녀들의 시선이 일시에 몰렸다가 흩어졌다.

습관처럼 붙잡은 손이었는데 사용인들 눈에는 다르게 보인 듯했다. 앤시아가 슬쩍 손을 놓으려 하자 나단이 앤시아의 손을 부드럽게 쥐며 끌어당겼다. 그런 나 단의 다정함을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그래. 잘 봐 뒀다. 나단이 돌아가고 나면 소문을 퍼트려 다 오.’

어쩌면 원작에 없던 나단의 방문으로 일찍 쫓겨날 수도 있지 않을까.

앤시아는 은근한 기대감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혼수품을 이렇게 빨리 보내 주실 줄 몰랐어요. 어머니께서 고생 많이 하셨죠?”

“앤, 네가 쓸 거라는 생각에 어머니는 무척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셨단다.”

“기뻐요. 어떤 걸 보내 주셨을지 정말 기대돼요.”

자신을 보자마자 펑펑 눈물을 쏟으며 매달리던 앤시아가 밝게 웃으며 행복해하자 나단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다행이야, 앤.”

“네? 뭐가요?”

“널 납치할 계획을 일단 보류해도 될 것 같아서.”

“그거…… 농담이죠?”

“물론이지. 아무리 레슬리 가문이 돈이 많아도 공작가의 무력을 상쇄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단다.”

“오라버니?”

“놀랄 것 없단다. 오라비의 철없는 바람일 뿐이니.”

농담 같지 않은데 농담이겠지.

반갑기만 하던 마음에 살짝 걱정이 뒤섞였다. 그런 앤시아의 걱정은 줄리의 안내로 낯선 방에 도착한 순간 사그라들었다.

공작가에서는 보기 드문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밝은 색상의 가구와 천으로 꾸며진 커다란 방에 발을 들이자 안쪽에서 드레스를 들고나오던 엘리가 앤시아를 반겼다.

“마님, 드레스가 정말 예뻐요!

전 이렇게 화사하고 고운 색은 처음 본 것 같아요.”

“왜 내 방이 아니고 여기에”

“보내 주신 가구와 드레스를 들이기엔 무리라고 판단해서 집사장님께 빈방 사용을 허락받았습니다.”

하긴 이 넓디넓은 공작가에 빈 방 정도야 남아돌 것이다. 그런데도 시녀장에게 갔다면 온갖 핑계를 대며 미룰 수도 있었다.

다행히 줄리는 원래 시녀장의 허락이 필요한 일을 집사장에게 받아 왔다. 줄리의 현명한 선택에 앤시아는 가벼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아……. 이건 정말이지 너무…… 너무 좋아.”

앤시아의 방에서 가까우면서도 훨씬 넓은 공간에 들어서자 마치 백작가로 돌아온 것 같았다.

밝은 색상의 가구에서 햇살을 머금은 듯한 익숙한 나무 냄새가 은은하게 맡아졌다. 백작가의 안주인인 힐다의 꼼꼼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가구들을 보며 앤시아는 감격에 벅차올랐다.

반년 후면 두고 가야 하는 게 벌써 아까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돌아가면 꼭 갚아 줘야지. 돈으로 못 갚으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려서라도 그분들께 꼭 은혜를 갚을 거야.’

가구며 천 하나까지 전부 백작가에서 앤시아가 주로 사용했던 색감과 재질이었다. 백작 부인이 보낸 애정과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편지가 떠올라 술렁이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 하녀가 정리하기 위해 꺼내는 드레스에서 향기가 퍼져 나왔다.

“아, 이 냄새는.”

정원 가득 피어난 꽃이 시들기 전, 앤시아를 위해 꽃잎을 말리고 향 주머니를 만들어 주던 메리의 손길이 닿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제 남이 된 것인데도 여전한 그들의 애정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감격한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던 앤시아는 결국 눈물로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나단을 돌아보았다.

“집에 온 것 같아요, 오라버니.”

“그래. 생각보다 하녀들의 일솜씨가 괜찮구나.”

앤시아는 나단의 앞이라 티는 내지 않았으나 혼수품이 도착했다 한들 절반이나 건질 수 있을까 걱정했다. 분명 로사가 격이 맞지 않는다는 둥의 이유로 내칠 줄 알았다.

다행히 가문의 이름을 내세우며 몰아붙이던 나단의 존재는 아무리 기고만장한 로사라 할지라도 무시할 수 없었나 보다.

방 안을 이리저리 살피던 앤시아는 침대까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놀랐다.

“오라버니, 침대까지 들고 오신 거예요?”

“공방에서 끼워 맞출 수 있게 특별 제작 해 주어서 힘들지 않았어.”

“그래도 이렇게나 크고 무거운걸……. 와……. 정말 굉장해요.”

방 안에 적절히 배치된 가구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앤시아는 연신 감탄했다. 그 먼 거리를 달려온 가구에 상한 곳 하나 없는 게 신기했다.

“마님, 드레스를 분류해 봤는데 확인해 주시겠어요?”

“응, 보러 갈게.”

엘리의 부름에 앤시아가 곧장 달려가려다 나단을 돌아봤다.

“오라버니, 저 안에 좀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그래. 나는 다른 짐을 확인하고 올 테니 천천히 보렴.”

“아직도 더 있어요?”

“그럼. 아직 내리지 못한 짐도 많아.”

“우와……. 더 있다니. 말도 안돼.”

이제 감격을 넘어서 슬슬 그들의 애정이 넘치다 못해 지나친게 아닌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마님, 확인해 주셔야 다른 상자도 분류할 수 있어요.”

“앤, 어서 가 보거라.”

“ “아, 네. 그럼 전 들어가 볼게요.”

안에서 부르는 소리에 앤시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사라졌다. 선물에 기뻐하면서도 놀라는 순수한 앤시아의 모습에 나단은 무리한 여정을 보상받은 듯 뿌듯했다.

***

“악! 물지 마라, 이놈!”

“쯧쯧, 요령 없기는. 물기 전에 손을 빼냈어야지.”

“으, 또 죽여 버렸다.”

인근 영지의 의뢰로 마수 사냥을 나온 흑의 기사단 사이에서 때아닌 눈토끼 굴리기가 유행했다. 정확히는 굴린다기보다 손안에서 얼마나 오래 살려 둘 수 있는지였다.

정예 기사만 모여 있다 보니 마수 처치 자체는 순식간이었으나 산을 뒤지고 다니느라 밤이 깊으면 효율을 위해 모닥불을 피고 휴식을 취했다.

한 달을 보름으로 줄였기에 더욱 가열찬 낮이 지나고 밤이 되면 긴장이 풀리기 마련이었다.

대부분 잠을 자거나 무구를 손질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 왔다.

리샤르 역시 밤이면 자신의 천막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그랬던 공작이 이번 토벌전에서는 모닥불 앞에 앉아 다가오는 눈토끼를 생포하기 시작했다. 장갑조차 벗은 맨손으로 쥐고 한참 동안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는 공작의 행동에 기사들은 의아해했다.

눈토끼는 처음엔 리샤르의 손에서 5분도 못 버티고 죽임을 당했다. 그 이후로도 리샤르는 눈토끼를 잡아 와 손안에 굴렸다.

그렇게 몇 마리를 희생시킨 끝에 마지막 한 마리는 죽지 않았다. 대신 하룻밤 사이 완전히 탈진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리샤르의 손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다.

그 순간 보인 리샤르의 만족한 미소가 낯설다 못해 두려워 지켜보던 기사들은 오한에 몸을 떨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