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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26화 (26/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26화.

거기까지는 그저 공작께 특이한 취미가 생겼구나 싶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 마수를 베어 내는 데 있어 리샤르의 검이 날카로워졌다.

마석의 위치가 심장에 가깝다 보니 마수를 만나면 급소를 찌르기보다 목을 베는 쪽을 선호했다. 리샤르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그날은 달랐다.

과감하게 심장을 찔러 내는 검의 궤적에 흔들림이 없었다. 마석은 건드리지 않고 급소만 노린 덕에 팔을 휘두르는 것보다 체력 소모가 적었다. 이는 평소보다 많은 숫자의 마수를 처리하는 결과를 냈다. 이전에도 정확한 편이었으나 날카로움과 섬세함이 월등히 늘어났다.

바로 며칠 전까지 함께 마수 처치에 나섰던 기사들이었기에 리샤르의 변화를 확실히 알아챌 수 있었다.

짐작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기사들은 눈토끼를 신중히 만지던 리샤르의 모습을 떠올렸다.

새로운 취미로만 여겼던 리샤르의 눈토끼 만지작 사건은 눈토끼굴리기라는 새로운 훈련법으로 기사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읏, 전 새로 잡아 와야겠어요.”

“이왕이면 두 마리 잡아 와라.

이놈은 이제 물지도 않네.”

“엑, 이 근처 눈토끼는 씨가 말랐는데 두 마리를 언제 잡아요?”

“그게 다 훈련이다.”

벌써 세 번째 저녁 메뉴가버린 눈토끼를 내려놓은 앳된 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숲으로 향했다. 몇몇 기사들도 오늘 저녁 담당인 기사에게 시름시름 앓는 눈토끼를 넘겨주고 뒤를 따랐다.

“야, 이 무식한 놈들아! 차라리 한 방에 보내 줘라. 이젠 마수가 불쌍해 보이려고 그런다.”

반항할 생각도 못 하는 눈토끼는 흉악한 마수라기보다 애처로워 보였다. 차라리 거대한 이빨을 내밀며 사람 팔을 물어 대는 쪽이 거침없이 해치울 수 있었다.

아서 모겐스 역시 그 말에 동의 했다.

처음에는 팔뚝을 물어뜯으려 난리 치던 눈토끼가 한 시간 넘게 손안에 쥐고 주물럭거리자 진이 빠졌는지 얌전해졌다. 툭 튀어나온 앞니를 건드는데도 고개만 픽돌릴 뿐 물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온순해진 눈토끼를 무릎에 얹고 있자니 처음으로 마수를 보며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려가서 키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리샤르의 서늘한 음성이 기사들의 소란스러움을 잠재웠다.

“마수를 상대할 때는 끝까지 처리한다. 그것이 기본임을 잊은 자는 오늘 불침번을 서며 재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예! 각하!”

당황한 기사들이 손안에서 이리 저리 굴리고 있던 눈토끼를 향해 살기를 내뿜자 방금까지 얌전했던 게 거짓말인 양 입질을 해 왔다. 놀이하듯 느긋하던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리샤르는 못마땅한 시선을 거두었다.

하루 만에 눈토끼를 죽이지 않을 만큼의 악력 조절을 익혀 놨더니 갑자기 기사들이 저마다 눈토끼를 잡아들였다. 어차피 마수이니 어떻게 하든 상관은 없었지만 눈토끼를 보고 귀엽다는 둥키우고 싶다는 둥 하얀 털을 쓰다듬는 기사들이 거슬렸다. 어째서 거슬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영마음에 들지 않아 원칙을 알리고 나서야 술렁이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내일도 이른 시간부터 사냥이 시작되니 쉬도록.”

“예. 각하께서도 편히 쉬십시오.”

기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천막으로 돌아가려던 리샤르는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멈춰 섰다. 기사들 역시 그 소리를 들었으나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마석섞인 공작가 깃발을 보고 편안히 기다렸다.

“각하를 뵙습니다.”

예상대로 공작가에서 보내온 전령이었다. 체구가 작아 말의 부담을 줄여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기사가 말에서 뛰어내려 곧장 리샤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각하, 공작저에 새로운 소식이 있어 전달하고자 달려왔습니다.”

마수 처치를 위해 외부로 나와 있는 기사단에게 전령이 찾아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최근에 있었던 일로는 황제의 명으로 결혼 상대가 정해졌으니 청혼서를 보내라는 어처구니없는 소식 정도였다.

다행히 전령으로 온 신입 기사에게서 비장함이나 긴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리샤르 역시 별다른 걱정 없이 전령이 내민 편지를 받아 들었다.

“로사 마일이 보냈군.”

시녀장의 이름이었기에 안 그래도 긴장감 없던 분위기가 더욱 풀어졌다. 리샤르의 눈이 편지를 읽는 동안 전령으로 온 신입 기사는 동경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기다렸다.

몇 초나 지났을까.

“시녀장이 소설을 쓰는 취미가 있었던가.”

리샤르의 뜬금없는 말에 전령은 물론 기사들까지 의아해했다.

여전히 축 늘어진 눈토끼를 쓰다듬던 아서가 리샤르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택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 그렇지. 자네는 레슬리 백작가에 머물렀을 테니 봤겠군.”

“예? 뭘 말입니까?”

천천히 종이를 내리고 아서에게 향한 리샤르의 눈이 짐승의 것처럼 빛났다.

“나단 레슬리. 내 부인의 전 약혼자라는 소문이 있는 자.”

어째서 마수를 만났을 때와 같은 눈을 하고 있는지 차마 아무도 묻지 못했다.

*

나단이 가져온 혼수품은 거의다. 앤시아의 개인 물품이었다.

놓을 곳을 알려 주고 순서를 정하는 것만 하는데도 지칠 만큼 많은 양이었다. 공작을 위한 물품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었다.

혼수품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싶어 나단을 바라보니 그가 웃는 얼굴로 답을 내주었다.

“널 데려갔으니 선물을 받아야 하는 건 우리 쪽이지 않을까.”

“으응? 그, 그런가요?”

“가능하다면 너를 되돌려 받고 싶지만.”

“아하하…….”

차라리 다행이었던 게, 공작에게 주는 선물이 있었다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사가 물어뜯었을 것이다. 이런 하찮은 걸 선물로 가져왔냐며 헐뜯었겠지.

물론 조금 전 들러서 어떻게 남편 되실 분을 위한 물품 하나 챙기지 않았냐며 잔소리를 늘어놓기는 했지만, 귓등으로 흘렸다.

지금 로사와 말다툼이라도 벌였다간 나단이 흑화할 수 있었다.

‘당분간은 나단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안 그래도 앤시아는 나단과 악행에 관한 대화를 나눈 후 ‘악녀로서 한 방’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누군가의 인생을 뒤트는 일은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현대인에게는 무리였다.

이미 나단의 출현만으로 한 달뒤 리샤르 공작이 돌아올 때쯤이면 엄청나게 부푼 추문이 그를 맞이할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으니 소소하게 1포인트라도 주워 먹는 심정으로 앤시아는 악행을 이어 갔다.

얼마나 소소하냐면 굳이 참견하지 않아도 될 하녀들의 간식 시간에 끼어드는 수준이었다.

“줄리, 엘리. 여긴 뭐 하는 곳이니?”

“사용인들이 쉬는 공간이에요.

지금쯤이면 간식이 나왔을 거예요.”

“간식? 쿠키 같은 거?”

“네, 마님. 보조 요리사가 연습겸해서 만들어 주는 거…… 마님?”

이미 앤시아의 손은 휴게실 문을 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작은 테이블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쿠키를 먹던 하녀들이 놀란 듯 급히 일어섰다.

“일어날 거 없어. 쿠키가 있다 길래 궁금해서 들러 본 거야.”

그러니까 내놔 봐, 쿠키.

하녀들의 동공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뺏어 먹을 게 없어서 사용인의 간식을 탐하는 고용주라니.

엄밀히 앤시아는 고용주도 아니었다. 게다가 기껏 차려 준 요리엔 거의 손도 대지 않으면서 하녀들의 유일한 간식을 원하는 모습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즉, 이건 누가 봐도 심술이고 못된 심보였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마른 하녀가 쿠키를 접시째로 앤시아의 앞에 내밀었다. 앤시아는 주저 없이 가장 큰 쿠키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퍼석.

씹기는 씹었다. 씹었는데 내가 씹은 게 뭔지 모르겠다.

퍼석한데 눅눅하고 밀가루 맛외에 느껴지는 건 미약한 소금맛이 전부인 이 정체불명의 음식은 뭐란 말인가.

앤시아는 기계적으로 턱을 두어 번 움직였으나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음식에 까다로운 앤시아임을 알기에 곁에 있던 줄리는 망설임 없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마님, 여기에 뱉으세요.”

웬만하면 삼키고 싶었으나 앤시아의 예민한 위장에 이걸 넣었다간 배탈 확정이었다. 입 안의 것 앤시아가 화분에 음료를 뱉어 내는 걸 보고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으세요, 마님?”

“이 시큼털털한 물은 뭐야? 상한 거 아냐?”

“맛이 좀 시큼하긴 한데 보조요리사들이 과일 에이드 맛을 내 준다며 이것저것 섞어서 그런 거예요.”

과일은 한 조각도 안 들어갔지만.

작게 들려온 소리에 한숨도 섞여 있었다. 하녀들도 좋아서 먹는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때운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공작가의 하녀들이 이런 개도 안 먹을 것 같은 간식을 먹는다고?

시녀장 로사는 이걸 그냥 내버려 둔다는 거야?

순간 튀어나오려던 말들을 앤시아는 볼을 깨물며 참아 냈다.

단어 선택을 잘못하면 또 오해 받는다.

앤시아는 마른 하녀가 들고 있던 접시를 받아 그대로 화분에 쏟아부었다. 바닥에 쏟으면 치우기 힘들 것 같다는 짧은 판단이 섞였으나 중요한 건 버렸다는 거였다.

“이런 건 개도 안 먹겠어.”

“마님, 그렇다고 버리시면 저희가 먹을 게 없습니다.”

“왜? 너희들이 개야? 이런 걸 먹게? 아니, 개도 안 먹는 거니까 개보다도 못하다는 거네.”

하녀들의 표정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차마 화를 내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감정을 완전히 감출 만큼 눈앞의 공작 부인이 무섭지도 않을 테지.

그나마 표정 관리를 잘하고 있는 나이 많은 하녀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서 고개를 숙였다.

“마님, 아무리 하찮다고는 하나 그거나마 먹지 않으면 오후 일이 힘듭니다.”

“좀 이따 저녁 먹으면 되잖아.”

“저희의 저녁은 모든 일과가 끝난 후에 먹을 수 있습니다.”

나이 많은 하녀의 말에 앤시아는 크게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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