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27화.
물론 앤시아는 악행을 쌓고 싶었다. 쿠키를 버리면서도 한두시간 뒤 저녁을 먹을 테니 괜찮으리란 계산이 섞인 미미한 악행이어야 했다.
“일과가 끝나는 게 언젠데?”
답은 가까이에 선 줄리에게서 들려왔다.
“마님의 잠자리를 봐 드린 후 주방에 남은 음식을 먹습니다.”
남은 음식을 먹는다고? 이게 대체 어느 시대야?
아침을 언제 먹는데 저녁을 그때 먹어?
자기 전에 먹으면 소화도 안 되는데.
게다가 남은 음식? 어떤 남은 음식?
혼란스러워하는 앤시아를 보며 엘리가 애써 좋게 포장해 주었다.
“주인마님이 오신 후로 육류가 많이 남아서 모두 기뻐하고 있어요. 너희도 그렇지?”
“아, 네.”
“그건 맞습니다.”
시골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아니고 남은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다니.
이건 어디까지나 앤시아의 관점이었고 실제로는 손도 대지 않은 귀족 요리로 포식하고 있었다.
배부르게 먹은 기억 덕분인지 앤시아를 향한 하녀들의 시선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런 하녀들의 태도에 앤시아는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못된 소리를 해도 이들은 항의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내 새끼 순대도 그랬지.
치킨 훔쳐 먹었다고 혼내고 저녁 간식 안 주면 그렇게 서러워 했는데.
주인이 주지 않으면 과자 하나 제 맘대로 먹을 수 없는 처지의 강아지와 하녀가 겹쳐 보여 앤시아는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뭐든 먹어야겠지. 요리장에게 새로 구워 달라고 해.”
“저기, 마님. 지금은 요리장님께서 저녁 준비로 한창 바쁘실 때라…….”
“줄리, 네가 가서 적당히 내 핑계 대고 만들어 둔 디저트 가져 다줘. 그럼 너희도 불만 없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앤시아는 괜히 여기 있어 봤자 마음만 불편해질 것 같아 곧장 뒤돌아 나왔다.
그날 이후 사용인들 간식에도 꿀과 버터가 들어간 쿠키와 빵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 덕에 하녀들은 앤시아의 막말보다 매일 먹게 된 고급 간식에 칭찬의 말을 꺼냈다.
또다시 악행은 선행으로 바뀌었다.
이 일을 나중에 전해 들은 앤시아는 물 건너간 악행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나단이 있는 동안엔 그 옆에만 붙어 있어도 여러 시선이 달라붙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의심. 동경. 호기심.
다양한 시선은 소문을 만들어 낼 것이므로 앤시아는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나단을 찾아갔다.
먼 길을 쉼 없이 달려온 나단과 마부들은 며칠 정도 쉬며 여독을 푼 후 돌아간다고 했다.
마차가 정렬해 있는 정원 앞 공터에 도착한 앤시아는 따로 찾아볼 것도 없이 눈에 들어온 나단을 향해 총총히 다가갔다. 평소라면 앤시아의 기척에 곧장 환한 웃음을 보였을 나단이 마부에게 지시하느라 바빠 보였다.
일에 집중하는 남자는 멋있었다. 나단이 종이를 확인할 때마다 마부가 고개를 조아리며 받아들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고 보니 혼수품을 싣고 온 마차들은 저대로 돌아가는 걸까?
“오라버니, 벌써 돌아가시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 앤, 나를 보러 온 거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서자 나 단은 오히려 반갑게 맞아 주었다. 당연하다는 듯 이어지는 포옹에 여전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하녀와 달리 경비를 서던 기사의 눈빛은 사나워졌다.
“빈 마차로 돌아가면 손해가 크지 않나요?”
“안 그래도 그윈티드 영지의 특산물을 실어 갈 생각이란다.”
“그렇군요. 그럼 며칠은 더 계시겠네요?”
“그래. 어머니께서 네 소식을 궁금해하시니 이번엔 그리 길게 머물지는 못하겠지만.”
나단은 언제든 또 올 것처럼 말했다. 설령 오지 못한다 해도 다시 만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나단의 태도에 앤시아는 감격했다.
“오라버니, 정말 좋아해요.”
발꿈치까지 들어 가며 나단의 어깨를 끌어안는 앤시아의 깊은 포옹에 나단 역시 등을 끌어안으며 호응했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앤시아의 백금발이 흩날리며 나단에게 감겨들었다. 이 이상 친밀할 수 없을 만큼 달라붙은 둘의 모습에 줄리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고 엘리는 달아오른 뺨에 부채질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이때 일렬로 서 있던 마차들이 허둥지둥 좌우로 갈라졌다. 소란스러워지는 분위기 속에 커다란 종소리까지 울려 퍼졌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앤시아와 나단 일행을 제외한 공작가 사용인들은 일사불란하게 달려 나왔다.
의도치 않게 그 중심에 서 있던 앤시아와 나단은 정면에서 피어 오르는 먼지구름에 당황했다.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 말발굽소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앤시아가 놀랄까 더욱 품으로 끌어 당기던 나단의 눈에도 새까만 흑마에 올라탄 흑곰의 존재가 선명하니 들어왔다.
리샤르 그윈티드.
한 달 뒤에나 돌아올 공작이 나흘도 채 넘기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
이 시기에 원작에서 다뤄진 특별한 사건은 없었기에 앤시아가 짐작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까운 곳에 말이 멈추고 흑곰가죽을 뒤집어쓴 기사들이 뛰어내렸다. 무구의 무게 탓에 쿵쿵 바닥을 딛는 소리가 쇳덩이라도 떨어트린 듯 묵직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정렬한 사용인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갑작스럽게 돌아온 주인을 맞이했다.
누구보다 먼저 말에서 내린 리샤르는 가장 앞에 서 있던 집사장을 향해 흑곰 가죽을 벗어 던졌다. 제법 묵직했는지 나이 든 집사장은 살짝 휘청거렸다.
말에서 내리기 전부터 가죽을 벗어 던질 때까지 리샤르의 새파란 눈은 앤시아와 나단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시기에 리샤르가 돌아온 이유가 무언지 짐작도 되지 않아 괜히 불안해졌다. 불안감에 저도 모르게 움츠린 앤시아의 심장이 쿵쿵 크게 뛰었다. 그런 앤시아의 불안을 읽은 듯 나 단이 등을 쓰다듬자 리샤르 쪽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분명 웃음소리였는데 얼굴은 차갑다 못해 석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굳어 있었다. 무뚝뚝해 보이던 입술 끝이 미묘하게 비틀리며 이전보다 더 강렬해진 동굴 곰 목소리가 음산하게 흘러나왔다.
“내가 자리를 비운 지 며칠이나 되었길래 새신부가 남자를 끌어들였을까.”
저기요? 원작에선 찐여주나오기 전까진 내가 뭘 하든 조용히 지켜보는 역할이셨잖아요?
앤시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아닌 황당함이 드러나자 리샤르는 입을 다물었다.
시녀장의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리샤르의 머릿속엔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마수 토벌 중인 리샤르에게 보내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기엔 처음부터 끝까지 앤시아에 관한 이야기 뿐이었다.
앤시아 랜피스.
언제까지 안주인 자리를 비워 놓을 거냐며 상대가 없다면 대신 찾아 주겠노라 농담처럼 말하던 황제가 대뜸 청혼서를 넣어 보라며 추천해 준 상대였다. 황제의 인장까지 박혀 날아든 혼인 서약서를 보며 이건 거부해 봤자 신경전만 벌이다 두 손 들게 될 일임을 직감했다.
곧장 앤시아 랜피스에게 청혼서를 보내고 정보원을 통해 받은 몇 줄 안 되는 내용은 지금도 기억했다. 앤시아 랜피스는 레슬리 백작을 후견인으로 두었으며 자작의 신분이기는 하나 돈을 주고 산 것일 뿐 실상은 평민이었다.
쓸모없으면서도 체면치레는 할 수 있는 상대를 황제답게 잘도 골랐구나 싶었다.
정보 중에는 약혼자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나단 레슬리에 대한 정보는 이름 외에 읽지도 않았다. 이후 적혀 있는 정보는 적당히 보고 폐기했다.
어쩌면 약혼자의 존재로 앤시아나 백작가 쪽에서 거절할 수도 있었으나 그럴 경우 황제 쪽에서 수를 쓸 것이다.
이 결혼이 성사되지 않는 경우는 앤시아 랜피스의 죽음뿐이겠지.
예상대로 상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신부로 맞이한 앤시아와 마주해 보니 보고서에 쓰여 있던 대로 과연 아름다웠다. 단지 여성의 외형이 아름답다 한들 리샤르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소가 되기엔 부족했다.
오히려 한순간 마주친 녹안의 선명한 싱그러움이 머릿속에 박혀 들었다. 약식혼 중 조금 눈물을 보인 것 같아 첫날밤이 걱정되기는 했다.
겁을 먹고 울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과 달리 오히려 남들이 피하는 리샤르의 눈을 보며 호의적인 웃음까지 보였다.
첫 밤을 보내기 위해 붙잡은 몸은 지나치게 부드러웠고 약했다.
앤시아가 가느다란 몸을 내보이며 울먹일 때 이상할 만큼 몸이 긴장하며 힘이 들어갔다. 처음보는 마수와 조우했을 때 감각과 비슷하면서도 달라 정확한 감정을 알 수 없었다.
마수 토벌을 하는 내내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집중하지 못하는데도 검이 향하는 방향은 평소보다 날카롭고 정확했다.
이대로라면 보름이 아니라 열흘로 단축할 수 있었다.
그럼 더 빨리 볼 수 있겠구나.
문득 리샤르는 이것이 다른 기사들이 말하던 그리움이라는 감정임을 깨달았다. 토벌이 길어질 때면 집이 그립다거나 가족이 보고 싶다며 한숨을 쉬던 기사들을 리샤르는 이해하지 못했다.
리샤르에게 집이란 손질이 필요한 무구를 내려놓고 다음 토벌전까지 머무는 장소였다. 모든 편의가 제공되니 여관이나 야영지와 비교하면 편리하다는 감각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리만치 저택으로 돌아갈 날이 손꼽아 기다려졌다. 저택에 돌아가면 함부로 손대기 겁날 만큼 연약한 존재이지만 눈을 마주쳐 주는 앤시아를 볼 수 있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
자신도 모르게 떠올리고 나니 리샤르의 손에 쥔 검은 더욱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다. 이제 눈토끼를 다루는 것도 익숙해져 리샤르의 갈망은 조금씩 커졌다.
그러던 중 날아든 시녀장 로사마일의 편지는 리샤르의 심기를 무척 불편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