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28화.
안주인의 체통도 생각하지 않고 방만하게 구는 부인.
주인님이 안 계신 틈을 타 사내를 끌어들이기까지.
약혼자인 나단 레슬리를 상대로 침실에서나 입을 법한 옷차림으로 뛰어나와.
사용인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정 행각을 벌이며.
공작가를 우습게 보는 부인의 파렴치한 행각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죽 훑어 내린 장문의 글 사이사이에 보인 내용이 저러했다.
나단 레슬리라면 리샤르가 보고 받은 보고서에서도 언급된 이름이었다.
아서 모겐스에게 묻자 건실한 청년이며 앤시아와 친분이 깊어 보였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
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샤르는 이미 흑마에 올라타고 있었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정예 기사에게 뒤를 맡기고 내달리는 리샤르를 따라 기본 호위들이 붙었다. 한밤중의 숲을 대낮이라도 되는 양 거침없이 내달릴 만큼 리샤르는 서둘렀다. 말의 고삐를 감아쥐면서도 자신이 왜 서두르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시녀장이 보낸 편지의 내용이 몇 번이고 머릿속에 떠올랐다.
「주인님이 떠나시기가 무섭게 부인의 전 약혼자가 이른 시간임에도 찾아들었습니다.
주인님이 자리를 비우시자마자 새신부가 외간 남자를 끌어들이 다니요.
그윈티드의 성을 받은 자가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곱씹을수록 말을 모는 리샤르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밤새 말을 달려 한낮이 돼서야 도착한 공작가는 여느 때와 달리 수십 대의 마차가 줄을 서 있었다. 대여섯 마리의 군마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자 황급히 비켜서기는 했으나 차림새나 마차의 형태가 북부의 것과 달라 다른 지역에서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을 뿐 리샤르의 시선은 정면에 서 있는 앤시아에게 고정됐다. 한낮의 태양 아래 더욱 눈부신 백금발과 발그레한 뺨이 사랑스러웠다.
앤시아의 놀란 듯 커진 눈이 리샤르와 마주쳤다. 리샤르는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또다시 긴장해 버리는 몸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다가가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 튀어나왔다.
말에서 뛰어내려 곧장 앤시아에게 다가가는 동안 그녀를 끌어안은 나단의 존재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부터 두 사람인걸 알았음에도 앤시아에게 집중 하느라 인식이 늦었다.
옅은 갈색 머리에 선해 보이는 눈매를 가진 평범한 체형. 전형적인 문학 계열 청년이었다.
앤시아의 등에 닿은 나단의 손이 움직임을 보이자 인식하기 전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불쾌감이 순식간에 치솟았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시녀장의 편지를 수십 번 곱씹은 터라 그 모습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 지 며칠이나 되었길래 새신부가 남자를 끌어들였을까.”
계속 곱씹다 보니 입으로 나온 말도 비슷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리샤르는 자그마한 앤시아와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나단이 어떻게 반응할지 기다려 주었다.
변명이든 당황하는 모습이든 보여야 이후에 리샤르도 반응할 수 있었다. 대치 중인 마수가 달려들어야 검을 휘두를지 내밀어 찌를지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살짝 떨고 있던 앤시아는 리샤르의 말에 오히려 떨림이 잦아들었다.
리샤르가 어떤 말을 하든 자신에게 하는 건 괜찮았다. 사용인들 앞에서 모욕하든, 가벼운 여자라고 하든 상관 없었다.
애초에 추문이 생기면 이득인건 앤시아 쪽이었다.
하지만 나단 앞에서는 안 돼.
무엇보다 지금 나단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날렵한 턱선이 긴장한 듯 꿈틀거리며 시선은 리샤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워. 안 돼.
말티즈가 도베르만한테 덤비는 격이다.
물론 리샤르를 보면 허스키 인순대가 생각나지만. 지금 기세는 차라리 로트와일러?’
잠시나마 앤시아는 머릿속이 개판이 된 듯 복잡했으나 나단이 자신을 뒤로 숨기려 하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단이 앤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분노를 터트리기 전 먼저 앞으로 나섰다.
“공작님, 잘못 알고 계세요.”
“잘못 알고 있다라.”
“네. 공작님이 자리를 비우시든 말든 오라버니는 오셨을 거예요.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죠?”
당당하다 못해 억울하다는 듯 눈을 치켜뜨는 앤시아의 행동에 리샤르는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던 다른 말을 꺼냈다.
“내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도착했다던데.”
“제가 마차로 공작가에 오는 데 걸린 시간은 한 달. 오라버니가 저 많은 마차를 이끌고 출발한 날짜는 이십 일 전이에요. 공작가에 오기도 전에 공작님이 출정할 날짜를 알고 맞췄다는 건가요? 무슨 수로요?”
듣고 보니 그러했다. 시녀장의 편지에 쓰인 글에만 집중하다 보니 당연한 사실을 간과했다. 그런데도 나단의 앤시아를 향한 친밀한 태도가 거슬려 리샤르는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글귀를 끄집어냈다.
“침실에서나 할 만한 차림으로 외간 남자를 맞이하는 게 혼인한 여인이 할 행동인가?”
“네. 저는 해요.”
앤시아는 화났다.
로사 외의 사람에겐 어느 정도 감춰 두었던 본 성격이 훅 튀어 나왔다.
첫날밤도 무사히 피했으니 당분간 두려울 건 없었다. 오히려 공작 부인답지 않은 이런 철없는 발언이 흠이 된다면 더 좋은 결과였다.
“전 제가 입고 싶은 걸 입고 반가운 사람이 오면 맨발로 뛰어나가서라도 반겨요. 나단 오라버니는 제가 반가워하는 사람 중 제 일이고요.”
“저자는 그대의 전 약혼자가 아닌가?”
아하. 슬슬 그대라는 호칭이 나오기 시작하는구나.
“아뇨. 약혼 안 했어요. 제 뒷조사를 하신 거 같은데 하다 마셨네요.”
“뒷조사라니. 그건 기본적인 절 차 중 하나일 뿐.”
“네네. 공작님 전통, 절차 좋아하시는 거 알아요. 그런데요. 어떤 대단한 전통이든 규칙이든.”
앤시아는 리샤르를 향해 또 한발 다가섰다.
“오라버니를 다치게 할 만한 거라면 제가 거절해요.”
“하……. 그대가 무슨 수로 거절하지? 원치 않는 청혼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나.”
“네. 원치 않는 청혼서를 받아 들일 만큼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대놓고 이 결혼에 흔쾌히 응한 게 아님을 밝히는 앤시아의 발언에 리샤르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본인도 강요로 인해 청혼서를 보내기는 했으나 은연중 평민출신인 앤시아에게는 기회라고 여겼기에 당황한 것이다.
그런 리샤르와 달리 앤시아의 뒤에 서 있는 나단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앤시아가 앞을 가로막아도 나단의 가슴까지밖에 오지 않아 훤히 보이는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점점 더 불쾌해졌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그 사람이 있네요.”
리샤르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남편의 앞에서 다른 남자를 지키겠다는 말을 하는 그녀의 행동에 기가 차서 분노조차 잊을 정도였다.
“가족을 지키는 데 제가 못 할 일은 없어요.”
그런 앤시아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는 나단의 존재는 더욱 거슬렸다.
지금 허리춤에 있는 단도를 던지는 것만으로도 저 문학청년을 겁줄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온갖 방법이 열 가지 정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리샤르는 단검을 꺼내는 대신 지금 느껴지는 혼란스러움에 집중했다.
앤시아가 나단을 감싸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이 로사 마일의 편지 내용과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저 모습에 어디가 방탕하고 파렴치함이 보인다는 건가.’
오히려 가족을 지키고자 작은 몸을 있는 힘껏 뻗대며 버티는 모습이 애잔했다.
조금의 위해라도 끼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듯 리샤르와 눈을 똑바로 맞추며 나단의 앞을 지켜 선 앤시아는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며칠 전 출정식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처럼 가냘프고 사랑스러웠다.
리샤르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일방적인 시녀장의 편지에 휘둘렸다.
작고 사랑스러우며 위협도 되지 않는 앤시아가 가족처럼 여기는 이를 지키고자 필사적이었다. 앙증맞은 주먹을 꼭 쥔 채 곰 같은 사내들 앞을 버티고 서 있다.
시시각각 리샤르의 서늘하기만 하던 푸른 눈이 서서히 온기가 들어섬을 알아챈 앤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역시 공작은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리샤르의 침묵이 길어지자 안도하는 앤시아와 달리 죽 경계하던 나단은 앞으로 나섰다.
“앤, 이건 공작과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 같구나.”
다정한데도 나단의 말 속에 칼처럼 날카롭고 서늘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나단도 화났다. 로사를 대할 때보다 더 화가 났음에도 앤시아에게 보이는 다정함을 잃지 않았다.
“결혼을 위해 청혼서 한 장 달랑 보내는 공작님이 질투심을 보이시는 건 아닐 테고, 상식이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는 분과 과연 대화가 통할지 걱정은 됩니다만.”
“오라버니, 그래도 그런 말은좀.”
공작 부인인 앤시아와 소백작일 뿐인 나단의 입장은 달랐다.
앤시아가 철없는 어린애처럼 제멋대로 대꾸하는 것과 나단이 비꼬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자칫 상급 귀족을 조롱한 것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앤시아가 나서서 상황을 중재할 만큼 상황을 안 좋게 몰아간 리샤르에게 나단은 목이라도 걸 기세였다.
“우리 앤을 보아서라도 제가 노력하는 수밖에요.”
“오라버니, 제발요.”
“나의 앤. 널 놓는 게 아니었는데.”
앤시아를 바라보는 나단의 시선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간신히 분위기가 누그러지는 듯싶었는데 나단이 다시 장작을 밀어 넣었다.
앤시아에게는 다정하기만 하던 나단의 눈은 리샤르를 향할 때면 깊은 원망이 담겨 있었다. 나단의 눈빛은 앤시아가 보인 신뢰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앤시아가 한 말들은 진심일지 몰라도 나단이 가진 감정은 차라리 로사의 편지에 적힌 쪽에 가까웠다.
“……저런 눈을 하는데도 그저 오라비일 뿐이라고?”
차분하게 가라앉던 리샤르의 푸른 눈에 다시금 의심이 들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