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29화.
눈빛이 달라진 리샤르에게서 다시 험악한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나단 역시 앤시아의 곁에 바싹붙으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런 나단의 행동은 당연히 리샤르의 분노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주인을 마중 나왔던 사용인과 기사들의 시선이 일촉즉발의 상황을 지켜보듯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간신히 진정시켰나 싶었더니.
아이고, 머리야.’
두통이 이는 것 같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래도 개싸움에 필요한 건 말이 아닌 물 한 바가지인 듯했다. 이 타이밍에 정말로 물을 가지러 갈 수는 없으니 앤시아가 그 물 역할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앤시아는 리샤르와 나단을 번갈아 본 후 살짝 고개를 들며 입을 벌렸다. 작은 움직임이었으나 두 남자의 시선을 모으기에는 충분했다.
“에…… 에취!”
“이런, 몸도 약한 널 너무 바깥에 세워 뒀구나.”
앤시아의 재채기 한 방에 리샤르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던 나단의 신경이 단숨에 옮겨 왔다. 살짝 어깨를 움츠리는 앤시아의 행동에 나단은 곧바로 케이프를 벗어 어깨에 걸쳐 주려 했다. 그러나 나단이 케이프를 벗는 짧은 시간, 그보다 빠르게 덮쳐 온 검은 그림자가 앤시아를 감췄다.
“앤시아!”
나단은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앤시아를 빼앗기고 말았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다. 나단의 놀란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앤시아는 자신의 상황을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갑자기 어두워지고 몸이 한 바퀴 빙글 도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공중에 들려 있었다.
“그윈티드 공작, 그 아이를 함부로 다루지 마시오!”
“내 아내를 추위에 떨게 할 수 없지.”
“예? 엑?”
머리 위에서 들린 리샤르의 음성에 앤시아는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다급히 제 몸을 확인했다.
딱딱하면서도 부드럽고 새까만 털이 코끝을 간질일 만큼 밀접해 있어 당황스러웠다. 슬쩍 손으로 만져 보니 뻑뻑한 거 같으면서도 흙냄새에 무슨 가죽 냄새 같은 게 나는 게 아무래도 이거.
‘곰 가죽? 나 지금 곰 가죽 입은 거야?’
앤시아는 조금 전까지 집사장이 들고 있던 곰 가죽으로 온몸이 돌돌 감긴 채 리샤르의 팔에 안겨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지.”
당황한 앤시아가 입만 벙긋대는 사이 리샤르는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어찌나 빠른지 나단이 필사적으로 리샤르의 뒤를 쫓았음에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폭풍의 눈이었던 세사람이 저택 안으로 사라지자 험악하던 상황도 정리되었다.
기사들과 사용인들 모두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후아, 다, 다행이다.”
“피 보는 줄 알았네.”
안도의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리샤르가 혹여나 마수를 썰어버리듯 백작가의 손님을 처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던 사용인들은 이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저택 앞까지 리샤르의 등 뒤를 지켰던 호위 기사들도 어깨를 돌리며 긴장을 풀어 냈다.
“안까지 쫓아가야 할까?”
“비상사태도 아니니까 호위는 여기까지만이지.”
“그거야 그렇지만 정말 마님 때문에 돌아온 거라고?”
공작을 호위하기 위해 함께 온 호위들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곤란했다.
마수 토벌이 한창일 시기에 갑자기 말을 타고 떠나는 리샤르를 쫓아 정신없이 함께 달려왔다.
저택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긴장하며 왔더니 뭔가 치정 싸움비슷한 걸 목격한 듯했다.
무엇보다 기사들은 리샤르의 기세가 변한 것에 더욱 놀랐다. 처음에는 문학청년처럼 보이던 나 단을 향해 미미한 짜증을 보였다. 리샤르에게서 선명히 짙어지던 적의에 호위들이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리샤르는 앤시아를 안아드는 순간 불쾌한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다.
“그럼 여기서 각하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대기해야 하나?”
“아까 분위기로 봐선 시간 좀 걸릴 거 같던데 훈련장에 나가지.”
기사들마저 자리를 뜨자 양쪽으로 갈라졌던 마부들도 저마다 우왕좌왕하다 휴식이나 하자며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떠나며 공작가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단 세 명을 제외하면 그랬다.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앤을 놓아줘!”
나단은 앤시아를 곰 가죽으로 둘둘 말아 보쌈해 간 리샤르를 필사적으로 쫓으며 소리쳤다.
이대로 계속 달린다면 둘을 놓치게 될 것 같아 초조했다. 그런 나단의 염려와 달리 리샤르는 저택 안쪽 응접실 앞에서 속도를 늦췄다.
넓은 응접실 안 커다란 소파에 곰 가죽으로 둘러싸인 앤시아를 앉힌 리샤르는 주저 없이 벽난로로 향했다. 나단은 곧장 앤시아의 곁으로 달려가 곰 가죽을 벗겨 냈다.
“앤, 괜찮니?”
“아, 응. 네. 괜찮아요.”
얼떨떨한 얼굴의 앤시아를 꼼꼼히 살피던 나단은 벽난로 쪽에서 들리는 수상한 소리가 신경 쓰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리샤르의 손에서 무언가 부서져 가루가 되고 있었다.
앤시아에게서 곰 가죽을 풀어내며 힐끗거리다 보니 리샤르의 손이 다시 벽으로 향했다. 뭘 하는 건가 지켜보자 벽에 깊이 박혀 있는 마석을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뜯어내어 장작 위에서 가루로 만들었다. 순수한 악력으로만 말이다.
웬만큼 단단한 곡괭이로 내리쳐도 쪼개기 힘들다던 마석을 악력 만으로 산산조각 내는 리샤르의 힘에 앤시아를 보듬던 나단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저 미친 괴력을 가진 공작이 여리고 약한 앤시아에게 닿는다는 상상만으로도 두려울 지경이었다.
이어 불씨 하나가 정작 속으로 던져졌고 무슨 폭죽 터지듯 작은 불꽃들이 연달아 타올랐다.
그제야 리샤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석 가루를 이용해 장작을 빠르게 태워 온도를 올리려 한 것이다.
앤시아를 조금이라도 빨리 따듯하게 하고자 벌인 일에 나단은 아주 조금이지만 리샤르에 대한 원망을 줄일 수 있었다. 나단은 리샤르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 놀라지 않았다.
두 사람의 태연한 반응과 달리 둘을 번갈아 보던 앤시아는 뒷목잡기 직전이었다.
‘저 주먹만 한 마석이 얼마나 귀한 건데, 그걸 불쏘시개로 쓰냐고! 나단 넌 그걸 보고 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건데?’
백작가에서는 보기 힘든 크기의 마석인데도 나단은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그저 앤시아가 떨지 않는지 이리저리 살피며 곰 가죽을 벗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 할 뿐이었다.
소리도 없이 나단의 등 뒤로 다가온 리샤르가 붙잡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실행했을 터.
나단은 리샤르의 말도 안 되는 악력을 목격한 후라 손목이 붙잡힌 것만으로도 긴장했다. 저절로 온몸에 힘이 들어갈 만큼 본능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나단은 앤시아에게 다정한 웃음을 보이는 걸 잊지 않았다.
앤시아의 시선이 나단의 손목으로 향하자 붙잡고 있던 리샤르의 손이 잠깐 움찔거린 후 풀렸다.
나단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목을 가볍게 털며 리샤르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앤시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는 것뿐입니다. 제가 손대는 게 불편하시면 하녀를 부르십시오.
눈빛은 조금의 호의도 담겨 있지 않으면서 웃음만은 능숙하게 짓는 나단의 모습에 리샤르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상황을 적당히 유하게 넘어가지 못했다.
“아까는 말이 짧았던 것 같은데.”
“잘못 들으셨겠지요. 각하께 고작 소백작인 제가 결례를 저질렀을 리가요.”
“흠…….”
리샤르의 인간 같지 않은 괴력에 나단이 주눅 들었다고 보기에는 말투나 움직임이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화해를 위한 초석이라기엔 미묘했다.
리샤르에게서 보이는 의심의 눈초리에 나단은 은은한 미소로 답했다.
“마수의 비명만 듣다 보니 사람 소리를 잘 못 들으시나 봅니다.”
“하?”
나단의 발언은 웃는 얼굴로 갑자기 칼을 찔러 오는 수준이었다. 차라리 진검이었다면 망설임없이 받아치며 목을 찔렀을 테지만, 대화로 사람을 찌르는 일에 익숙지 않은 리샤르이기에 반응이 늦었다.
가상의 검을 손에 한 번 쥐었다 놓는 심정으로 한 번 숨을 고른 후에야 리샤르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이런 인내심은 리샤르에게 낯설었으나 나단의 뒤로 보이는 앤시아의 존재가 그것을 가능케했다.
“후……. 레슬리 소백작.”
“아, 저기 하녀가 오는군요. 누구와 달리 앤시아의 전담 하녀들은 충성심이 깊어 믿음직스럽습니다.”
“누구와 달리?”
묵직한 곰 가죽을 소파 옆에 던져 놓은 후 앤시아의 곁에 앉으려던 나단은 리샤르의 서늘한 시선에 웃는 눈으로 응수했다.
“이번엔 제대로 들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나단은 여전히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앤시아가 공작과 나단이 계속 충돌하는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둘의 시선이 앤시아에게로 향했다.
앤시아는 이미 나단의 말에 여러 대 얻어맞아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리샤르에게서 등을 돌렸다.
앤시아가 자신을 바라보자 마치 조명이 켜진 듯 나단의 웃음이 더욱 밝아졌다.
“앤, 무슨 할 말이 있니?”
“네. 이건 오라버니답지 않아요.”
내 순한 댕댕이가 쌈닭이라니.
체급이라도 비슷하면 모를까 이 한순간만 방심해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지금은 리샤르에게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거는 이가 없었다 보니 반응이 늦어 피를 보지 않은 것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단은 뭉뚝한 이빨을 드러내며 길지 않은 발톱을 세웠다. 쉽게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본인이 가지지 않은 무기까지 모조리 드러내며 맞서야 할 만큼 나단은 앤시아를 위해 필사적이었다.
나단이 이렇게 날을 세워야 할 만큼 조금 전 리샤르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모욕적이었다.
나단이 돌아가기 전까진 소문이 퍼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공작이 어떻게 알고 온 건지 궁금하면서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보호를 받는 건 기쁜 일이나 나 단이 위험한 길을 건너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사람을 맨손으로 찢어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상대에게서 나단을 지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