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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30화 (30/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30화.

이런 식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보호를 바라지 않았다.

나단에게 평소처럼 좋은 오라버니로 있어 달라고 호소하려 했다.

싸울 필요 없다고. 공작 부인을 공작에게서 지켜 내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지 말라고.

나단은 그런 앤시아의 마음을 너무도 쉽게 알아채 버렸다.

“앤. 내가 너에게 부담을 주었구나.”

이 눈치 빠른 남자가 바로 내 마음의 댕댕이 나단이다.

“미안하구나, 앤. 그리고…… 공작 각하께도 저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곧바로 사과하는 나단의 뜬금없는 행동에 리샤르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주먹 쥔 손을 움찔거렸다.

“공작 부인의 오라비로서 잠시 제 주제를 잊고 만용을 부렸습니다. 보시다시피 앤…… 앤시아가 몸이 약해 과하게 걱정한 탓에 주제넘게 끼어들었습니다. 부디 그윈티드 공작님께서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순식간에 태세 전환을 하며 진심으로 사과하는 나단의 행동에 앤시아의 심장이 쿡쿡 쑤셔 왔다.

‘아, 내 양심. 진짜 이 남자는 다른 의미에서 위험해.’

오로지 앤시아를 위해 나단은 자존심도 어두운 감정도 순식간에 치워 버렸다.

처음 보았던 문학청년 분위기로 돌아간 나단은 허리까지 숙여 가며 리샤르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 상황에서 오해로 인해 한차례 두 사람을 추궁했던 리샤르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리샤르에게서 조금 전까지 보였던 불쾌한 기색 대신 당혹감이 자리 잡는 걸 본 앤시아는 안도했다.

새파란 눈이 미약하게 흔들리는 게 리샤르의 침묵이 길어질 듯 보였다.

앤시아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하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줄리, 오라버니께 창고를 보여드릴 수 있을까?”

“창고를요?”

“응, 빈 마차로 돌아가실 수 없으니 동부에서 팔지 않으면서 오래 보관이 가능한 것 위주로 보여 드려.”

“앤, 그런 건 내가 따로 알아보마. 지금은 공작 각하께 제대로 사죄를 해야 할 것 같구나.”

“아뇨, 오라버니. 꼭 지금 가셨으면 좋겠어요.”

앤시아는 두 사람을 떼어 놓기로 마음먹었기에 단호했다.

한풀 기세가 꺾인 나단은 리샤르가 참견하지 않자 이내 줄리를 따라나섰다. 이어 앤시아가 엘리를 쳐다보자 놀란 듯 딸꾹질까지했다.

“히끅! 주, 주인님을 어, 어디로 모시, 흐극!”

“그런 거 아냐. 문을 닫고 앞에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려던 거였어.”

“가, 감사해요, 마님!”

엘리는 혹시나 줄리에게 시킨 것처럼 자신에게도 리샤르의 안내를 부탁할까 봐 겁을 먹었는지 앤시아의 말에 후다닥 응접실을 나가 문을 닫았다.

단둘이 되자 앤시아는 한시름놓은 듯 몸에 힘이 빠졌다. 살짝 휘청이며 의자에 기대는 앤시아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리샤르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래. 공작은 뜻밖에 대화가 통하는 상대니까.

“우리 얘기 좀 해요.”

정작 리샤르는 앤시아의 말에

‘고작 사흘 만에 곰 가죽을 쓰고 다시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예정대로라면 나단이 일주일 정도 머물다 돌아가고 그사이 사용인 사이에서 무럭무럭 커진 추문을 한 달 뒤 돌아온 리샤르가 듣게 되는 것. 그 후의 반응은 아마도 경멸이나 방치라고 생각했다.

당장 이혼을 떠올리기엔 리샤르는 여간해선 본인이 먼저 앤시아를 내치지 못한다.

이 결혼 자체가 황제의 명이기도 하고 리샤르 본인이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기도 해서였다.

앤시아가 떠나도 붙잡지 않을 만큼, 황제의 귀찮은 방해에도 이혼을 추진할 만큼 리샤르가 적극적이 되는 건 진짜 여주인공비앙카가 등장한 후였다.

무심하고 마수 토벌 외엔 관심 없는 남자주인공인 리샤르 그윈티드는 찐여주인 비앙카로 인해 여러 가지 감정을 알게 되고 결국 사랑까지 느끼게 될 테니까.

그런 비앙카에게 상처를 입힌 후에야 앤시아에게 쌓여 온 악녀라는 소문을 빌미로 이혼이 성사된다.

‘악녀 노릇은 제대로 못 했지만, 추문이 커지는 건 자신 있었는데.’

원작하고는 달라지겠지만, 결과적으로 악녀 소리만 들으면 되는거 아닌가.

꿀 떨어지는 나단의 행동에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앤시아가 더해지면 웬만한 작은 소문도 부풀려지기 마련이었다.

공작 부인의 추문에 못된 짓 한 스푼 얹으면 손쉬운 악녀 만들기 완성! 그렇게 행복 회로를 돌리려던 차에 갑작스레 공작이 돌아왔다.

리샤르가 예정대로 한 달 뒤에만 돌아왔더라면 지금처럼 나단이 목숨 걸고 대치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앤시아 역시 몇 번 마주치지 않을 리샤르 앞에서 연약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해지면 웬만한 작은 소문도 부풀려지기 마련이었다.

공작 부인의 추문에 못된 짓 한 스푼 얹으면 손쉬운 악녀 만들기 완성! 그렇게 행복 회로를 돌리려던 차에 갑작스레 공작이 돌아왔다.

리샤르가 예정대로 한 달 뒤에만 돌아왔더라면 지금처럼 나단이 목숨 걸고 대치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앤시아 역시 몇 번 마주치지 않을 리샤르 앞에서 연약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련함과 두려움을 연기하며 무관심 속에 지낼 자신이 있었다.

원작의 여주인공 비앙카는 무척 활달하고 밝은 여성이었으므로,

‘우울한 원작 앤시아만큼은 아니어도 최대한 내숭을 떨 생각이었는데.’

나단이 없었다면 앤시아가 리샤르를 향해 본성을 드러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냐. 완전히 드러난 건 아닐 수도 있어.’

앤시아는 조용히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무뚝뚝한 리샤르를 찬찬히 살폈다.

아까 곰 가죽으로 앤시아를 둘둘 말아 짐짝 들 듯 했을 때도 첫날밤 침실에서 붙잡힐 때와 달리 무척이나 안정적이었다. 어디 하나 아픈 곳 없이 흔들림 없는 편안함이었달까.

남편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외도 상대를 불러들인 뻔뻔한 여자 취급할 때는 언제고 신줏단지 모시듯 했다. 게다가 나단이 자리를 비운 지금 리샤르에게서 불쾌해 하는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심해 보일 만큼 잔잔해진 눈으로 앤시아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눈빛 알아.’

간식도 먹었고 산책도 했는데 딱히 뭔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주인이 부르니까 기다릴게.

집중은 하고 있는데 딱히 원하는 건 없는 상태와 비슷했다. 앤시아는 이 상황을 좀 더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싶어졌다.

이번에 나단이 돌아가면 추문을 부풀릴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수 있었다.

반년 뒤 쫓겨나기 위해 하나라도 더 악녀 포인트를 모아야 했다.

앤시아는 자신의 어설픈 사악함으로 혼자서는 무리임을 알게 되었기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나하나 짚으며 잘잘못을 따질까.’

아니면 감정에 호소할까.

앤시아는 고민하면서도 리샤르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리샤르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앤시아와 눈을 맞췄다.

역시 앤시아는 리샤르의 눈을 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적의를 불태우며 서로를 찢어 죽일지 때려죽일지 순간의 판단으로 달려들어야 하는 눈 맞춤이 아니고서야 이리 긴 시간 서로의 눈을 바라본 상대는 없었다.

앤시아의 순수한 시선에 리샤르는 긴장이 풀림을 느꼈다. 상대가 내게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려지고 온전히 귀에 담고자 집중하게 됐다.

정작 리샤르가 집중하면 할수록 앤시아는 빤히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무언가 망설이는 듯도 보였다. 작은 입술이 몇 번 달싹이다. 살며시 손끝으로 두드리는 행동 하나하나에 리샤르의 집중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런데도 앤시아는 입술 끝만 톡톡 두드리다 천천히 손을 내려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분명 무언가 할 말이 있음에도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리샤르의 굳게 다물렸던 입술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마주하고 있던 앤시아의 맑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갓 피어난 여린 새싹 같은 녹안이 슬픔으로 천천히 젖어 드는 걸 보며 리샤르는 언제 자신이 쥐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테이블을 바스러트렸다.

“이건, 고의가 아니오.”

혹여나 앤시아가 놀랄까 다급히 변명하는 리샤르였다. 이에 드디어 앤시아의 입도 열렸다.

“공작님께 보이는 저는 어떤 사람인가요?”

손안에서 바스러지는 테이블을 바닥에 대충 털어 내던 리샤르는 이 질문에 손을 멈췄다.

앤시아가 어떻게 보이냐니. 몇 시간밖에 보지 못한 부인을 향한 감상이란 작고 연약하고 귀엽다.

그 정도였다.

리샤르가 답하기 전 앤시아는 한탄하듯 말을 흘려 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북부의 공작가에 시집와 이 응접실조차 오늘에서야 들어와 본 제가……

공작님이 보시기에 내연남을 들일 만큼 대범한 사람으로 보였나요?”

앤시아는 나단이 있을 때와 달리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대범은커녕 가냘프게만 보였다.

나단을 지키기 위해 드센 척 외치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가녀린 여인의 처연함이 앤시아에게서 보였다.

“공작님께서 저를 남편이 없을 때를 노려 외간 남자나 끌어들이는 추잡하고 문란한 여인으로 보시겠다면.”

앤시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여기서 리샤르가 앤시아의 말이 맞다너는 추잡하다고 한다면 충격받은 얼굴로 무너져 내릴 생각이었다. 앤시아는 슬쩍 시선을 내리며 쓰러지는 동선은 부서진 테이블 반대편으로 할 계획까지 세웠다.

정작 리샤르는 앤시아의 입에서 나온 단어 하나하나에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리샤르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나오지 않자 앤시아는 차분하나 떨리는 음성을 만들어 냈다.

“공작님이 보시고 싶은 대로 보시고 생각하시고 싶은 대로 생각하세요. 어차피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원하는 것만 보겠죠.”

충격받은 듯 사정없이 흔들리는 파란 눈을 보며 앤시아는 자신의 의도대로 리샤르가 죄책감을 느껴 주는 것에 쾌재를 불렀다. 물론 표정만은 처연함을 잊지 않았다.

“어차피 전 혼자니까요.”

혼자라는 말을 한 앤시아는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슬픔을 삼키려는 듯 숨을 조심스럽게 들이 쉬었다. 두려운 듯 떨리는 손끝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테이블 아래로 감추려 했다.

바로 앞에 앉은 남편에게조차 의지할 수 없는 앤시아의 처지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굳게 다물렸던 리샤르의 입 끝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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