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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31화 (31/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31화.

“부인은 혼자가 아니오. 이 저택에 있는 수십 명의 사용인이 부인의 말을 따를 것이니.”

리샤르의 위로 아닌 위로는 앤시아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네. 공작님께서 믿는 사용인들이니 믿으셔야지요. 전 외부인이니 믿어 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외부인이라니. 이제 엄연한 공작 부인이오.”

뜻밖에 리샤르는 계속해서 앤시아를 위로하려 했다. 리샤르의 다급한 말에도 앤시아는 체념한 듯 흐릿한 웃음을 보였다.

“저를 어떻게 보시는 그건 공작님 선택이니까요. 전 정말로 괜찮아요. 저를 뭐라고 생각하는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녹안을 가득 채운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으려는 듯 앤시아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제 가족과 다름없는 오라버니에게만큼은 제대로 된 대우를 해주세요.”

가장 중요한 말을 꺼냈다는 안도감인지 앤시아의 두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앤시아의 눈물은 조금 전부터 뜨끔거리던 리샤르의 위장에 송곳이 꽂히는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공작님께서 명령하신다면 전 전제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을게요. 감시를 붙이셔도 좋아요.”

물론 정말로 가둔다면 창문을 타고 나가서라도 나단을 배웅하며 최고의 추문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성공한다면 나단이 떠나고 뒤에 남은 앤시아를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질책할 것이다. 가두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원하던 결과였다.

“부인을 가두는 일은 없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던 리샤르에게서 답이 튀어나왔다.

기다렸던 답이 나와 앤시아는 속으로 기뻐하며 겉으로는 놀란 양 눈을 깜박거렸다.

그때마다 방울지며 떨어지는 눈물이 리샤르의 위통을 가속시켰다.

“제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된다는 건가요?”

“물론이요. 이 집에서 부인이 가지 못할 곳은 없으니까.”

“그럼 오라버니에게 가도 괜찮나요?”

어째서 그쪽으로 방향이 틀어지는 건지 불쾌하면서도 의아해하는 리샤르에게 앤시아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답해 주었다.

“공작가에 오라버니가 머무는 이상 자유로운 제 두 발은 항상 오라버니께 향할 거예요. 언제나처럼 오라버니의 손을 잡을 것이고 남들이 의심할 만큼 달라붙겠죠. 그때마다 모두가 저를 손가락질할 거예요. 공작님이 저를 보시는 것처럼 더럽고 추잡한 여인이라고.”

“그건!”

“전 제 가족을 사랑하는 걸 숨길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해코지할 생각은 하지 말고 손가락질만 하라고, 그것도 원인인 앤시아에게만.

그런 마음으로 앤시아는 앞서쳐 둔 그물에 걸린 리샤르에게서 확답을 받아 내려 했다.

“집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을 만큼 쓸모없는 몸뚱이가 전부인 저를 북부까지 달려올 수 있도록 키워 주고 보살펴 주신 레슬리 백작가 분들이세요.”

보고서를 통해 앤시아의 몸이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리샤르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전 제 모든 걸 걸고 그분들을 사랑해요. 그분들, 오라버니와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추문을 듣는 것 따위 제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요. 공작님이 그게 거슬리신다면 저를 가두셔야 할 거예요.”

리샤르는 자신이 시녀장에게 휘둘려 거침없이 내뱉은 말들이 앤시아의 여린 마음을 난도질했음에도 그녀가 끝까지 당당하게 굴었던 이유를 알았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건 나단의 앞에서만이었다. 그녀가 강할 수 있었던 순간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그 시간뿐이었다.

리샤르와 단둘이 마주한 앤시아는 눈물을 흘렸고 손끝을 떨며 목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아름다우면서도 불안해 보였고 사랑스러울 만큼 귀여운데도 서글퍼 보였다.

지금의 앤시아가 리샤르가 알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첫날밤이 두렵다며 작은 몸을 더욱 웅크린 채 덜덜 떨며 부탁하던 앤시아였다. 그녀는 잠자리를 가지려 할 때가 돼서야 두려움을 견디지 못한 듯 기다려 달라 애원해 왔다.

가볍게 손목을 붙는 것만으로도 멍이 드는 연약한 몸으로 나단을 지키고자 리샤르의 앞을 막아섰다. 가족처럼 여기는 나단의 앞에서만 앤시아는 강해졌다.

고통을 두려워하고 상처받는 걸 무서워하며 애원했던 앤시아는 리샤르가 오해하고 제멋대로 말하자 저항을 포기했다.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얼굴로 힘없이 받아들이려 했다.

그런 여인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다.

니.

리샤르는 앤시아와 부부임에도 아직 가족이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이런 것이 가족이라면.’

이토록 여린 여인의 필사적인 애정을 받을 수 있는 게 가족이라면.

탐이 났다.

갑작스럽게 피어오른 탐욕스러운 감정에 리샤르는 숨을 삼켰다.

앤시아 그윈티드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제 손 밖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갑작스레 갈증이 일었다.

앤시아를 아내로 받아들인 건 그저 황제의 귀찮은 참견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런 식으로 리샤르가 알지 못한 감정을 끄집어낼 존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갈증에 마른침을 삼키던 리샤르는 앤시아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갑자기 곁으로 다가온 리샤르로 인해 아련하게 젖어 있던 앤시아의 눈이 놀라움으로 짙어졌다.

자신을 보며 반응하는 앤시아에게 리샤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기쁨을 느꼈다. 계속 자신을 보게 하고 싶었다.

출정식 때 짧은 인사를 나누며 환하게 웃었던 것처럼 그녀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은 리샤르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답을 내놓게 했다.

“지나치게 가깝다면 방해할 것이오.”

“네?”

“동부에서는 가족처럼 여기는 남녀가 얼마나 친근감을 드러내는지는 모르오. 나는 북부의 사내이니 그걸 용납하지 못하겠지.

그래서 분명 그대가 힘들어할 만한 말을 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다면 부인의 뜻대로 하시오.”

리샤르가 한발 물러서 주었다.

그로서는 매우 큰 양보를 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나 리샤르의 귀에 들어갈 만큼 추문이 돌고 있음에도 앤시아의 행동을 어느 정도 묵인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리샤르가 말한 ‘힘들어하게 될 그대’는 앤시아를 뜻하는 것이니 문제없었다.

“고마워요, 공작님.”

앤시아의 환한 웃음과 여전히 또렷이 자신을 마주하는 녹안에 리샤르는 그녀의 슬픔이 잦아들었음을 확신했다. 활짝 웃는 앤시아를 보고 있자니 리샤르는 조금 전부터 쿡쿡 쑤셔 오던 위통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앤시아는 언제 울었냐는 듯 손등으로 젖은 뺨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 일어서던 리샤르를 두고 앤시아는 곧장 문으로 향했다.

“공작님은 바로 마수 토벌하러 가실 거죠? 그럼 전 더 늦기 전에 오라버니랑 상가에 다녀올게요.”

이제 와 가지 말라고 할 수 없어 리샤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공작님의 관대함에 감사드려요.”

“나는 별로 관대하지 않소. 두 사람만 보내지 않을 테니.”

“그래도 감사해요. 엘리! 오라버니께 갈 거야. 안내해 줘.”

“네, 마님.”

순식간에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앤시아를 보며 리샤르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쿡쿡 쑤시는 듯한 위통 대신 이번엔 심장이 찔리는 것 같아 조금 곤란해졌다.

의도치 않게 앤시아의 악녀 포인트가 엉뚱한 쪽에서 착실히 쌓이고 있었다.

“마님, 창고로 모실게요. 좀 좁지만, 지름길로 가면 빨라요.”

보통 때는 앤시아의 뒤를 따르던 엘리가 이번엔 안내를 위해 앞장섰다.

하녀 일을 할 때면 빠른 걸음을 자랑하는 엘리였으나 평소 보폭이 좁은 앤시아를 염두에 둬서 느릿하게 걸었다.

지름길인 좁은 복도로 들어서 앞서 걷던 엘리는 이대로는 너무 오래 걸린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지름길이라 해도 창고까지 거리가 꽤 되기에 앤시아의 체력과 걷는 속도를 생각하면 마차를 타는 편이 나았다.

“마님, 마차를 타고 가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되돌아가기 위해 돌아서던 엘리는 바로 등 뒤에 있을 줄 알았던 앤시아의 부재에 당황했다.

“마, 마님!”

바로 뒤에 있으리라 여겼던 앤시아가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 있었다. 도톰한 드레스가 바닥에 펼쳐져 그 위로 하늘하늘 흩날리는 머리카락조차 그림이 되어 사랑스럽기까지 한 앤시아의 안색은 창백했다.

지척까지 다가간 엘리는 앤시아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것을 보고 다급해졌다.

“마님, 괜찮으세요?”

“하아……. 아니, 안 괜찮아.”

“어, 어떡해. 잠시만요.”

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엘리는 복도에 아무도 없음을 알아채고 당황했다. 지름길이라고는 하나 좁은 편이라 이용하는 사람이 적은 탓이었다.

“마님, 금방 사람을 데려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당황한 엘리가 급히 자리를운 사이 앤시아는 벽에 머리를 기댄 채 힘겨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 앞에서 긴장하긴 했나봐.’

긴장이 풀리니 순식간에 지쳐버린 이 연약해 빠진 몸뚱어리가 앤시아는 익숙함에도 답답했다.

백작가였다면 이렇게 긴장할 일도 이를 악물며 버틸 필요도 없었다.

‘조금만 참으면 돼. 침대에 콕박혀서 한숨 자면 좀 나아질 거야.’

아마도 엘리는 곧 다른 하녀나 혹은 기사를 데리고 돌아올 것이다.

가벼우면서도 열심히 달려올 엘리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소리도 없이 몸이 떠올랐다. 단 두 번이었으나 흔들림 없는 안정감에 앤시아는 눈을 감고도 상대를 알 것 같았다.

“공……작님.”

순간 안정적이던 품이 굳는 듯 했으나 이내 깃털이라도 올라탄 듯 부유감이 이어졌다. 식은땀이 날 만큼 급속도로 나빠진 몸 상태도 잊을 만큼 편안하고 기분좋은 안정감이었다.

망치로 내려쳐도 안 깨질 단단한 마석을 한 손으로 부숴 버리던 리샤르였다. 강한 힘을 가졌음에도 앤시아를 안아 든 손은 안정감 있으면서도 다정했다.

마치 힘 조절 못 하고 마구 덤벼들던 덩치 큰 강아지가 제 몸의 크기와 힘을 자각하고 주인이 다치지 않을 만큼 달라붙는 것 같아 기특하게 느껴졌다.

완벽한 리샤르의 힘 조절에 앤시아는 창백한 안색임에도 살포시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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