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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32화 (32/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32화.

리샤르는 자꾸만 시선을 끄는 앤시아의 뒷모습을 복도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분명 열심히 걷는 것 같은데도 얼마 나아가지 못하는 작은 동물 같았다.

눈으로 배웅하던 리샤르는 갑자기 하녀가 방향을 바꾸고 앤시아마저 사라지자 저도 모르게 초조해졌다.

중간에 사라졌다 한들 저택 안다른 복도일 텐데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사라진 앤시아가 신경 쓰였다.

리샤르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원래는 그저 복도 끝까지 걸어가는 걸 지켜볼 생각이었지만 마음을 바꿨다. 긴 다리로 순식간에 앤시아가 지나간 복도를 따라잡아 커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샛길용 복도로 들어섰다.

좁은 편이나 벽을 따라 일정하게 박혀 있는 마석의 존재로 어둡지는 않았다. 금방 따라잡을 생각으로 발을 내딛는데 빠르게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녀는 당황한 얼굴이었으나 비명을 질러서 사람을 부르거나 하진 않았다. 그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녀에게 의원을 부르라 명하고 곧장 안으로 향했다.

몇 발자국 내디니니 복도 한가운데 앉아 있는 앤시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석에 반응한 마석 가루들이 앤시아의 주변에 빛 무리를 일으켰다. 마석투성이인 저택 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었으나 이상하리만치 눈을 떼기 힘들었다.

살짝 머리를 기울여 벽에 기댄 것만으로도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살랑 흘러내리며 시선을 빼앗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귀족답지 않은 행동에 뒷모습뿐임에도 리샤르의 시선은 도무지 떨어질 줄 몰랐다.

하녀의 반응이나 주저앉은 앤시아의 모습을 보면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저 모습은 마치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알리려는 듯 가련하고 아름다웠다.

여인의 외모에 그다지 관심 없던 리샤르조차 앤시아에게서 보이는 아름다움에는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하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귀족여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홀로 흘리는 한숨은 애달프기까지 했다.

저도 모르게 다시는 저 여인의 무릎이 바닥에 닿는 일은 없게 할 것이라 맹세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묘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이게 기사들이 말하던 기사도라는 건가.’

처음 겪는 감정과 최근 알게 된 감정이 뒤섞이며 제 마음을 이해 하기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리샤르의 몸은 착실히 앤시아를 향해 움직였다.

놀라지 않게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다치지 않도록 손가락 움직임 하나까지 최선을 다했다. 저항감 없이 안겨 든 앤시아를 내려다보니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나단을 만나러 가겠다며 밝게 웃던 여인 이 아니던가. 그것조차 자신의 아픔을 감추고 가족을 위해 내보인 꾸민 모습이었던 걸까.

그런 리샤르의 고민은 앤시아가 가슴에 뺨을 문지르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사라졌다.

“공……작님.”

마수의 잘린 머리 하나보다도 가벼운 앤시아의 부름에 리샤르는 언제 느꼈는지 기억도 까마득한 감각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지키고 싶다.

리샤르에게 있어 지켜야 하는 건 영지였고, 그윈티드 공작가였다. 처리해야 하는 건 마수였고 적당히 상대하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상대는 황제였다.

무엇을 떠올리는 최근 리샤르가 느껴야 했던 감각 중에는 없었던 종류였다.

사랑스럽다. 귀엽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내 영지와 가문의 이름을 잃지 않기 위해 지키는 것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이대로 밖에 내다만 놔도 몇 시간이면 얼어 죽을 것 같은 가냘픈 여인이 온전히 자신을 의지하는 것에 심장이 반응했다.

공작 부인의 방으로 곧장 데려가려던 리샤르는 빈방으로 알고 있던 곳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에 멈춰 섰다. 이건 첫날밤 앤시아가 입고 있던 로브를 풀어냈을 때 향유 속에 섞여 있던 희미한 향기와 비슷했다.

북부에서는 맡아 보지 못한 향인 데다 새하얗던 앤시아와 함께 그녀의 향으로 각인되었기에 저 절로 발길이 멈췄다.

마침 문이 열고 나오던 하녀들은 리샤르에게 안겨 있는 앤시아를 보고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인 방 안의 풍경은 봄을 그대로 옮겨 온 듯 화사했다. 대부분 어두운 색으로 이루어진 저택 안에 동떨어진 색을 가진 방은 품 안에 있는 앤시아와 똑 닮아 있었다.

밝은 색상의 가구는 만져 보지 않아도 온기가 느껴질 것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지녔다. 커튼부터 침구는 물론 소파에 놓인 쿠션하나까지 준비해 온 이의 애정이 집착처럼 느껴질 만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이 방을 누가 꾸민 것인지 알려 주지 않아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방 안을 눈으로 살핀 리샤르의 시선이 나단에게 멈추자 가볍게 고개를 숙여 왔다.

“앤을 위해 준비해 온 혼수품입니다.”

레슬리 소백작.”

집착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수준의 애정이 퍼부어진 공간은 역시나 나단의 솜씨였다.

리샤르는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나단 레슬리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느꼈다.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많기는 하나 이런 일에 있어서 리샤르의 가치는 무가치, 쓸모없는 수준이었다.

“익숙한 곳에서 쉬는 게 앤, 아니, 앤시아에게도 좋을 테지요.”

공작 부인이 된 이상 편하게 이름을 불러도 되는 상대가 아니었다.

몇 번이고 나단의 입을 통해 나온 아내의 이름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울림을 주었다. 그 이름을 입에 담은 나단 레슬리를 내버려 둘 만큼.

“백작가에 머무는 동안 사용한 이불과 동일한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이곳에서라면 편히 쉴 수 있을 겁니다.”

나단의 권유에 앤시아를 푹신해 보이는 침대에 내려놓자 식은땀을 흘리는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보자마자 난리를 칠 줄 알았던 나단은 뜻밖에 고요했다. 익숙하다는 듯 이불을 덮어 주고 줄리에게 몇 가지 심부름을 시켰다.

그런 나단을 지켜보던 리샤르는 어째서 그가 창고가 아닌 이곳에 있는지 작은 의문이 떠올랐다.

“부인이 소백작에게 창고로 가보라 권했던 것 같은데.”

“앤시아가 쓰러진다면 이쪽으로 올 것 같아 와 있었습니다.”

리샤르는 앤시아가 쓰러질지 어떻게 알았는지 묻는 대신 묘하게 쓰려져 오는 속에 숨을 삼켰다.

그에 나단은 당연하다는 듯 차분하게 답을 흘렸다.

“앤이라면, 앤시아라면 분명 최선을 다해 저를 지키려 했을 테니까요.”

묻지도 않았는데 염장 지르듯 훅 찌르고 들어오는 나단이었다.

앤시아를 안고 오느라 공기를 쥐듯 조심스럽던 리샤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세가 술렁이듯 흔들리는 리샤르를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나단은 그저 앤시아만 바라보며 안쓰럽지만 사랑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낯선 곳에서 아직 파악도 못한 두려운 상대를 향해 최선을 다해 자기 뜻을 밝히며 버텼을 겁니다.”

“대화한 것뿐이오.”

“그렇군요. 역시나 많이 노력했나 봅니다.”

나단의 손이 앤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움찔거리다 간신히 이불 끝에 머물렀다.

“착하고 마음 약한 아이지만, 가끔 상상도 못 할 만큼 강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누구보다도 약하면서 나단의 앞에선 누구보다 강했다.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반했는가?”

돌려 말하는 법 없는 리샤르의 질문에 나단은 말로 답하는 대신 웃음을 보였다.

이제 당신 차례겠지.

당연한 순서라는 듯 자신만만하면서도 그렇게 되는 게 씁쓸하다는 듯 나단의 웃음이 흐려졌다.

어색하면서도 묵직한 침묵이 흐르는 사이 나단의 심부름을 간하녀가 돌아왔다.

“말씀하신 가방이 이게 맞습니까?”

“맞아. 고맙구나.”

앤시아처럼 곧잘 고마움을 표하는 나단에게 줄리는 살짝 고개를 될 상황이었다. 앤시아가 아프다 한들 리샤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적재적소.

리샤르가 있어야 할 곳은 마수가 있는 곳이었다. 머리를 베고 심장을 찔러 피를 보고 마석을 취한다.

간혹 서류 처리나 황제의 부름으로 한동안 검을 잡지 못하면 초조해질 만큼 리샤르 역시 만족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검을 잡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등 뒤의 문 안쪽에서 들려올지도 모를 여린 목소리 하나를 필사적으로 귀 기울여 기다릴 뿐이었다.

이 답답하면서도 아릿해지는 심정이 무언지 몰라 리샤르는 갑갑해졌다. 곁에 있어도 소용없는 걸 아는데 지켜보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감기 따위에 걸려 앓아누운 자신의 머리맡에 앉아 그토록 오랜 시간 지켜보던 어머니를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옆에 있다 한들 나아지는 것도 아닌데 왜 있는 걸까.

그러나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보지 않으니 견딜 수 없었다.

얼굴 본 지 며칠 되지 않은 여인의 존재가 리샤르에게 왜 이렇게 간절한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미 수차례 자신의 감정을 움직인 상대임에도 이런 감각 자체가 낯설어 리샤르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응…….”

공작가 저택의 문들은 대부분 묵직했다. 두꺼운 만큼 방음도 잘되어 앤시아처럼 자그마한 여인이 내는 호흡 내뱉는 수준의 신음은 알아채기 힘들었다. 전장과 마수 퇴치로 단련된 기감이 아니었다면 놓쳤으리라.

문을 여는 리샤르의 행동은 침착했으나 이미 손잡이가 으스러져 있었다. 그렇게 열린 문틈으로 리샤르에게 보인 것은 침대 위에 달라붙어 있다시피 한 나단과 그에게 안겨 있는 앤시아였다.

아마도 지금 리샤르의 손에 들린 부서진 문손잡이를 던지는 것만으로도 나단의 삶은 끝날 것이다. 그걸 알기에 리샤르는 침착하려 애썼다.

나단의 손끝이 힘겨워하는 앤시아의 입술을 문지르고 있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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