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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33화 (33/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33화.

승차감 좋은 편안한 리샤르의 품에 안겨 도착한 곳에서 익숙한 향이 맡아졌다.

이어 나단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앤시아는 리샤르의 품에 안겨 있는 상황이 민망해 죽은 척했다.

물론 의식이 없는 척 기운이는 척이었다.

앤시아가 익숙하면서도 푹신한 이불에 눕혀지고도 리샤르와 나 단은 방에 머물렀다.

아프고 힘들어 죽겠는데 당사자를 두고 대화 중인 두 남자 때문에 앤시아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단은 아까의 날 선 기세 대신 조곤조곤 앤시아에 관해 이야기했다. 중간중간 리샤르를 말로 패는 듯한 느낌이 없잖아 있어 잠든 척하던 앤시아는 조금 긴장하기도 했다.

다행히 리샤르는 불쾌한 기색도 없이 물러났다. 겉보기와 달리 말이 통하는 상대임을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다.

언제 눈을 떠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주변이 분주해졌다. 물수건을 짜는 듯한 소리와 무언가를 뒤지는 소리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앤시아는 눈을 떴다. 마침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낸 나단이 앤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안도한 듯 은은한 미소를 보였다.

“앤. 깨울까 고민했는데 일어나서 다행이야.”

앤시아가 물끄러미 상자를 바라보자 나단은 기다렸다는 듯 열어 보였다.

“필요할 거 같아서 준비해 왔지.”

그 안에는 고급스러운 주머니가 들어 있었는데 속에 무엇이 들었는 절대 알고 싶지 않을 만큼 쓰디쓴 냄새가 풍겨 나왔다.

앤시아는 초인적인 인내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것만은 참아 냈다.

저게 설령 개똥을 말려 온 거라해도 나단이 상자에까지 넣어 가져온 이상 무조건 웃는 얼굴이어야 했다.

정말 개똥은 아닐 것이다.

방치된 순대 똥을 치울 때도 이런 냄새는 안 났으니까.

그나저나 저 개똥보다 냄새가 심한 정체불명의 물건을 왜 꺼내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응. 난 저거 용도를 모르겠는 걸.’

이 타이밍에 내놓는 이유는 뻔했으나 앤시아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멀쩡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정작 안색이 하얗게 질려 나 단이 보기엔 더없이 안쓰럽게 보일 뿐이었지만.

“앤시아. 다시 의식을 잃기 전에 어서 먹자꾸나.”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저절로 머릿속을 지나가는 문구를 따라 의식의 흐름도 놓아 버리고 싶었다.

나단의 손에 들린 푸르죽죽한 원형의 물건이라니.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창고 구석에 방치된 채 한여름의 습기와 빗물을 머금었다. 가을의 서늘함에 간신히 말라 형태를 유지한 폐기물 덩어리로 보였다. 나단이 꺼낸 게 아니었다면 독살 내지는 괴롭히기 위한 용도로 꺼낸 거라 고밖엔 믿을 수 없는 모양새였다.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는 앤시아의 망설임에 나단은 침대에 걸 터앉아 거리를 좁혔다.

“냄새와 달리 막상 목으로 넘기면 괜찮단다.”

설마 이걸 먹어 봤단 말인가.

“먹어 봤으니까 안단다. 나를 믿으렴.”

앤시아의 놀란 눈을 마주한 나 단은 당연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네가 북부로 간다 하니 추위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약초를 추가했다고 하는구나. 믿을만한 의원이지만 그래도 소중한 앤에게 무작정 먹일 수는 없지.”

앤시아는 입 앞까지 들이대진 환약 냄새를 맡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았다. 이미 나단이 직접 복용까지 해 괜찮다는 걸 확인한 약을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일부러 앤시아를 생각해 강화해 온 약이 아닌가.

애써 장점을 떠올리려 했으나 풍겨 오는 심상치 않은 구린내에 도저히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기존 약을 두 배로 먹으면 안 되나.’

상냥한 나단의 미소가 오늘따라 얄밉게 보였다.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앤시아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벌렸다. 약을 먹여 본 경험이 많은 나단은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앤시아의 입 안에 털어 넣었다.

“?!”

‘이거 상한 거 아냐? 사람 먹는거 맞아?’

입 안에 들어온 약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도저히 삼키고 싶지 않아 앤시아는 입만 벌리고 있었다.

“물과 함께 삼키면 되니까. 그대로 있으면 더 괴로워.”

아니, 그러니까 이 끔찍한 걸 삼키기 싫다고.

저도 모르게 혀로 밀어내려는 앤시아의 반응을 알아챈 나단의 손이 더 빨랐다. 항상 다정하기만 하던 부드러운 나단의 손길이 제법 강경하게 앤시아의 입술을 붙잡았다. 오리 주둥이처럼 다소 웃긴 모습임에도 그런 앤시아가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워 나단은 절로 웃음이 났다.

“삼키면 물을 줄게.”

아까는 물과 함께 삼키라더니 이젠 물도 안 준단다.

나단은 앤시아가 뱉지 못하게 하려는 듯 꽤 강경했다. 항상 앤시아를 우선시하는 나단이기에 그녀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단호한 모습도 보였다.

입 안을 잠식해 오는 고약한 냄새를 없애고자 앤시아는 죽을힘을 다해 약을 삼켰다.

“착하다, 앤.”

“으…….”

원망의 말보다 물이 먼저였다.

줄리가 건네준 물을 반 컵이나 마셨음에도 입 안에 쓴맛이 남아 있었다.

거짓말쟁이.

눈물이 글썽거릴 만큼 쓴 약에 저절로 원망의 눈초리로 나단을 째려봤다. 정작 나단은 알고 있었다는 듯 앤시아의 입술에 묻은 가루를 살살 문질러 떼어 주었다.

이때 문 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단은 등을 지고 있는 데다 앤시아의 입술을 닦아 주느라 관심도 주지 않았다. 줄리 역시 물수건의 습도에 사활을 건 것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문손잡이를 손에 든 리샤르가 열린 문틈으로 악귀처럼 서 있는 걸 목격한 유일한 사람은 앤시아뿐이었다.

신기하게도 앤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것처럼 뿜어져 나오던 리샤르의 흉흉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마치 족발 뼈를 앞발로 붙잡고 으르렁대다가 이름을 불린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얼굴을 보였던 순대처럼.

앤시아 눈에 보이는 리샤르는 순대의 확장판, 인간 버전이다 보니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겁을 먹고 쓰러질 만한 모습조차 평범하게 받아들였다.

이에 리샤르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무척 놀라웠다. 지금 리샤르가 보인 흉포한 감정은 분명 연약한 여인에게 두려움을 주기 충분했다. 나단의 뒤통수에 문손잡이를 꽂아 넣는 상상을 지우며 다급히 기세를 죽이기는 했으나 이미 충분히 느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앤시아는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여전히 안색은 좋지 않았으나 또렷해진 눈으로 리샤르를 바라보았다.

리샤르가 안으로 들어서자 줄리가 눈치 빠르게 손을 내밀어 문손잡이를 받아 들었다. 거침없이 앤시아의 곁으로 다가간 리샤르는 나단과 반대편 침대에 걸터 앉았다.

곁에 놓인 의자는 장식용이라는 듯 두 남자는 앤시아를 향한 거리를 가까이하는 데만 집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단은 앤시아의 입가에 묻은 약재 가루를 꼼꼼히 닦아 주었다. 그걸 바라보는 리샤르의 시선이 어둡게 가라 앉았다.

다른 때라면 얼마든지 오해하라며 부추겼겠지만, 실시간으로 공작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된 앤시아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칫 자신이 잠든 후 둘만 남은 상황에서 벌어질 사고를 방지하고자 오해할 만한 이 상황을 설명하기로 했다.

“오라버니, 대체 이 쓰고 맛없는 건 뭔가요?”

“몸에서 한기를 몰아내고 기력을 올려 주는 약재가 추가된 환약이지.”

“세상에, 아직도 입술에 약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열심히 닦아 주었는데도 쓴맛이 남았나 보구나.”

자, 이제 들었으니 알겠지?

대놓고 변명 잔치를 벌이는 앤시아와 나단의 대화에 리샤르의 표정은 못마땅하나 어두운 기세가 사라졌다.

“은근 손이 많이 가는 공작님이라니까.”

앤시아의 예상대로 리샤르는 냉혹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말이 통하고 이쪽의 의도를 곧잘 알아다.

안심되자 약효가 빠르게 도는 건지 나른해졌다. 피로감과는 다른 감각에 앤시아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이는 것을 본 줄리가 눈치껏 커튼을 내렸다.

앤시아에게 휴식이 필요함을 알기에 두 남자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앤시아는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다 한마디 덧붙였다.

“오라버니, 의원님께 제발 맛좀 개선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안 그래도 이야기해 두고 왔단다. 다음엔 달콤한 약을 가져오마.”

두 사람의 대화에 리샤르가 무덤덤한 말투로 슬쩍 끼어들었다.

“필요하다면 공작가 주치의를 불러 약을 지어 주겠소.”

“어릴 때부터 앤시아를 죽 봐온 의원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지어 줄 것입니다.”

“어릴 때라고 해 봤자 고작 몇 년 아닌가? 공작가의 주치의는 잘린 팔도 이어 붙일 만큼 실력이 있지.”

“공작가 주치의는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신가 봅니다. 저희 쪽은 약초밖에 모르는 의원이라 약을 짓는 능력밖에 없으니 믿어 주시죠.”

그래그래.

잠깐 휴전한 것 같더니 또 시작이구나.

둘이 나가서 적당히 싸우렴.

불안해하기엔 너무도 졸렸기에 앤시아는 두 사람의 싸움을 무시한 채 찾아드는 수마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얼마나 잔 걸까.

기억도 안 나는 꿈을 잔뜩 꾸다가 눈을 뜨는 순간 사라진 것 같은 몽롱함이 판단력을 흐렸다.

허리를 누르는 묵직한 감각은 몇 년 만인데도 저도 모르게 미소 지을 만큼 익숙했다. 주인을 바디 필로우로 여기는 순대의 존재는 잠결에도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영영 느끼지 못할 감각이었기에 아직 꿈속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주인을 깔개 삼은 괘씸하지만 사랑스러운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고자 손을 뻗었다. 약간은 거친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털의 감촉을 기대하며 뻗은 손끝에 찰지면서도 매끈한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한여름 해동한답시고 내버려 둔 닭가슴살이 하루살이의 먹이가 된 걸 손으로 눌렀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면서도 무르지 않고 단단했다.

이건 순대가 아니었다.

몽롱했던 의식이 순식간에 깨어났다.

눈을 뜨자 벽에 박힌 마석으로 인해 분명 밤임에도 사물이 뚜렷하게 보였다. 완전히 낯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익숙하지는 않은 구조에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던 앤시아는 이곳이 첫날밤 머물렀던 부부 침실임을 알아챘다.

잠든 곳과 깨어난 곳이 달랐다.

의아해하던 앤시아는 허리를 끌어당기는 힘과 배 위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손가락 구조에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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