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34화.
등에 닿는 단단한 육체와 따끈하게 느껴질 정도의 체온이 누구의 것인지 고민하는 사이 허리를 끌어안은 손이 풀리며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공작님?”
리샤르는 품에 안고 있던 앤시아가 혹여나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까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 다행히 앤시아는 리샤르를 불렀고 이에 긴장으로 굳었던 몸에 힘이 풀렸다.
자신이 긴장한 줄도 몰랐던 리샤르는 제 몸의 변화에 의아해하면서도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앤시아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고, 공작님. 제가 왜 여기에 있나요?”
“문이 망가져서.”
앤시아는 잠들기 전 문손잡이를 들고 있던 리샤르를 기억했다.
고작 그 정도로 방까지 옮겨야 했나 의심하는 사이 덤덤한 리샤르의 낮은 목소리가 설명을 덧붙였다.
“조금 화가 나서. 문을 닫다 실수로 부숴 버렸지.”
어떻게 문을 닫으면 실수로 부서지는데?
“왜 화가 나셨는데요?”
물으면서도 답을 알 것 같았다.
리샤르에게서 곧바로 답이 돌아오는 대신 앤시아의 어깨에 숨결이 닿았다.
타인의 숨결이 이런 식으로 선명하게 닿아 오는 일은 백작가 사람들과의 친근한 포옹에서 몇 번이고 겪었던 일이었다. 단지 침대라는 개인적인 공간에서 무방비한 상태로 타인의 숨결이 밀착하는 경우는 키우던 짐승 외엔 처음이었다.
배 위에 닿은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체온과 어깨를 데울 만큼 밀착한 숨결이 지나치게 선명해 앤시아는 자신이 입은 옷도 달라졌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얇은 실내용 드레스는 자기 전 입고 있던 것과 또 달랐다.
완벽한 잠자리 옷차림으로 한 침대에 누운 공식 부부라니. 침착하려 해도 긴장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 역시 내가 이런 성향인지 몰랐는데.”
갑작스러운 취향 고백을 하필 침대에서 하지는 말았으면 싶었다.
“부인.”
낮게 깔리는 동굴 곰 목소리에 앤시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자꾸만 떨리는 앤시아의 어깨에 마치 진정하라는 듯 리샤르의 체온이 닿았으나 오히려 굳어 버릴만큼 긴장했다.
“내 것을 공유하는 건 무척이나 불쾌하더군.”
여기서 ‘내 것’이 무언지 되묻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으나 리샤르는 착실히 답을 내주었다.
“부인은 내 것인데. 자꾸 다른 이의 손을 타니 참기 힘들더군.”
그렇다고 그대의 오라비를 부술수는 없으니까.
마치 입 안에서 속삭이듯 은밀하면서도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에 앤시아는 못 들은 걸로 치려 했다.
“밤은 이제 시작이니 부인은 좀 더 자 두는 게 좋겠어. 밤도둑이 들지 않게 지켜 줄 테니.”
그 밤도둑은 절대 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그런데 부인. 이 향은 부인에게서만 나는 건가?”
“아, 아뇨. 백작가에서 자주 쓰던 향 주머니만 있으면 돼요. 동부에선 아주 흔하디흔한 꽃이고요.”
“꽃에서 이런 향이 나는 건가.”
“그럼요. 만들기도 쉽고 아무나다 쓰는 거예요. 조금도 특별할 거 없는 향이에요.”
침실이라는 공간이 주는 야릇한 분위기를 깨고자 필사적인 앤시아의 바람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부가 좋아질 것 같군.” ”
나단과 다툰 게 아니라 조언이나 교육이라도 받고 온 건 아닐까.
리샤르답지 않은 발언들에 앤시아는 합리적 의심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좋
좋죠, 동부. 따뜻하고 꽃도 많이 피고 사람도 좋고 꽃도 많고……. 네, 꽃이에요, 꽃.”
앤시아는 어떻게든 이 간질간질 한 분위기를 깨고 싶었다. 그러나 당장 목덜미를 스치는 온기조차 피할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면 조금 피곤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는데.”
이렇게 들이대는 리샤르라니.
앤시아는 상상도 못 했다.
찐여주 등장 전까지 마수 퇴치 외엔 아무 관심도 없어야 할 리샤르의 변화에 앤시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앤시아를 끌어안은 채 리샤르는 기다렸다.
리샤르 그윈티드는 타인을 배려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황제를 대할 때는 번거로워지는 게 귀찮아 대부분 수긍하고 있기는 했다.
그건 배려와는 달랐다. 리샤르에게 있어 상대의 기분을 살피거나 건강을 염려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대부분은 리샤르가 신경쓸 부분이 아니었다.
전 공작의 병을 치료하고자 요양을 떠난 공작 부부는 서로를 염려했다. 공작가의 대소사 모두 오랜 세월 함께해 온 집사장과 솔선수범하는 시녀장의 노력으로 유지되었다. 흑의 기사단 기사 역시 호승심은 다소 높은 편이나 리샤르의 앞에서는 말 잘 듣는 개와 다를 바 없었다.
상대의 감정을 살피기보다 효율적인 전투의 지시를, 보고서 확인 후 승인을 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렇기에 앤시아만을 걱정하는 나단의 행동이 낯설면서도 그의 말에 집중했다. 나단의 앤시아를 향한 지나친 관심이 언짢으면서도 그의 염려가 타당함을 인지했다.
실제로 가냘픈 부인의 몸에 손을 댄 것만으로 리샤르는 의도치 않게 멍 자국을 만들기까지 했다.
마수 퇴치 중 훈련한 덕에 이제 손에 쥐는 것은 겁나지 않았다.
그러나 리샤르의 예상보다 앤시아는 무척 약했다. 부서진 문틈으로 들어오는 미약한 냉기만으로도 추워할 만큼 연약했다.
부부 침실로 앤시아를 옮기고 하녀가 준비하는 사이 리샤르 역시 산속을 누비느라 더러워진 몸을 씻었다.
가운을 입고 나오니 침실 안은 훈훈한 열기로 가득했다. 벽난로의 장작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침대 옆에 작은 난로까지 놓여 있었다. 리샤르에게 있어 더울 정도였다.
창문을 열고 싶어지는 지나친 온기였으나 곤히 잠든 앤시아의 발그레한 뺨을 보며 인내했다.
천천히 연습한 대로 앤시아의 뺨에 손을 대자 무의식중에 얼굴을 비벼 왔다.
위험을 모르는 작은 동물의 천진함 같았다.
- 따뜻해…….
이렇게 온기가 가득한데도 앤시아는 아직 부족하다는 듯 리샤르의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에 매달렸다. 리샤르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방금 걸친 가운 끈을 풀어냈다.
두툼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 앤시아의 체온으로 따끈하기까지했다. 평소라면 이불조차 덮지 않을 온도였음에도 리샤르는 이 온기가 나쁘지 않았다.
잠든 앤시아를 뒤에서 끌어안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턱 끝을 간질였다. 한 손안에 들어올 만큼 작은 복부에 손이 닿자 리샤르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몇 번이고 눈토끼를 만지며 훈련해 왔으나 실제로 닿은 앤시아의 몸은 첫 밤의 기억보다 더 연하고 부드러웠다.
이대로 욕심껏 끌어안았다간 손에 쥔 젤리처럼 뭉그러질 것 같았다. 최대한 손에서 힘을 빼려 애쓰다 보니 오히려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 훈련이 부족했다. 내일 마수 토벌에 합류하면 모든 눈토끼를 손에 넣어서라도 반드시 힘조절을 완벽하게 터득하리라.
그런 각오를 머릿속에 새기는 사이 앤시아가 깨어났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새삼 기쁘다는 감정을 느꼈다. 턱밑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앤시아는 특유의 달달한 향을 품고 있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하다 보니 품 안에 작은 몸이 꼼지락거리며 자꾸만 멀어지려 했다. 놓치고 싶지 않아 품으로 끌어당기며 동그란 어깨를 턱으로 눌렀다.
“잠이 오지 않는다면 조금 피곤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는데.”
턱밑에서 생생하게 굳어지는 몸이 느껴졌다. 긴장을 풀라는 듯 가볍게 턱으로 두드리다 보니 코끝에 맴돌던 향기가 진해졌다.
좀 더 제대로 맡고 싶은 향이었다.
리샤르는 어느새 턱이 아닌 코와 입술로 앤시아의 어깨를 문지르고 있었다.
상상도 못할 리샤르의 행동에 앤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공작이 애교를 부려? 설마 진짜 그런 거 아니지?’
진짜 순대였으면 인정이지만.
뜬금없는 공작의 행동은 영문을 알 수 없기에 일단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졸려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앤시아는 제 어깨에 부비부비중인 리샤르의 행동에 어깨를 움츠리며 벗어나려 했다. 물론 그건 생각일 뿐 리샤르의 팔 하나가 허리에 감긴 것만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아~ 졸리다~ 하아암.”
하품하는 척까지 하며 앤시아는 피곤함을 어필했다.
그러는 사이 리샤르의 얼굴이 스치며 조금씩 밀려나던 드레스가 기어코 맨살을 드러냈다. 얇은 천 하나 사이에 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생생한 감각에 앤시아는 몸을 틀었다.
“저기, 공작님도 피곤하실 텐데 어서 주무세요.”
드러난 어깨를 리샤르의 입술에서 떼어 내기 위한 움직임이었으나 이리저리 뒤척이는 사이 눈이 마주쳤다.
새파란 눈은 미동도 없이 앤시아에게 향한 채 어깨를 적셔 오던 숨결이 짙어졌다. 익숙한 파란색이 아니었다면 짐승에게 물려 잡아먹히기 전의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를 만큼 감정이 배제된 눈이었다.
‘와. 저거 완전 짐승.’
앤시아의 감상은 머릿속에서 조차 이어지지 못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새파란 눈동자에 놀랄 틈도 없이 입술이 포개졌다.
약식혼 때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겹쳐진 입술이 부드러우면서도 뜨거웠다.
리샤르는 앤시아의 입술을 보는 순간 나단의 손에 부드럽게 눌리던 형태가 생생하게 떠올라 불쾌해졌다. 앤시아의 입술에 남아 있을지 모를 다른 사내의 손길을 덮어 버리고 싶은 욕구에 머리보다 몸이 반응했다.
성급하게 달려든 것에 비해 온 화한 입맞춤이었다.
맞닿은 입술이 부드럽고 달아서 물어뜯고 싶어졌다. 자신의 난폭한 성정을 잘 알기에 리샤르는 뱃속이 들끓는 듯한 감각을 가라 앉히며 조심스럽게 입술로만 상대를 탐했다.
이에 앤시아의 머릿속은 난리가 났다.
‘얘 미쳤나 봐!’
아니, 미쳤다고 하기엔 부부이긴 하지.
법적으로 부부가 맞고 여기가 부부 침실이기도 하고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도 맞는데.
근데 너 찐여주 오면 걔한테 반할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