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35화.
마수를 죽이는 것만이 인생의 즐거움이었던 리샤르는 예쁘고 활기찬 건강미 넘치는 찐여주를 만난 후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다.
예쁜 건 디폴트라고 쳐도 활기차고 건강미 넘치는 여주인공.
앤시아와는 외모부터 성격까지 전혀 다른 비앙카와 사랑에 빠질 것을 알기에 앤시아는 지금의 키스가 당황스러웠다. 그런데도 입술을 머금듯 비벼 오는 입맞춤은 명백한 애정이 느껴져서 혼란스러웠다. 더 곤욕스러운 건 리샤르의 집요한 키스가 당황스럽기는 해도 싫지 않다는 점이었다.
입술을 가볍게 물기까지 하며 허리를 끌어당기는 손에 힘이 들어가 헉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원작이랑 달라도 너무 다른데.’
원작 앤시아의 고통스러운 첫 걱정이 앞섰다.
무엇보다 오롯이 서로의 입술에만 집중하는 이 시간이 길어지면 굉장히 위험할 것 같았다.
아무리 앤시아가 공작을 반려동물 보듯 이해의 눈으로 바라본다 한들 애정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듯 친밀한 접촉은 평온하기만 하던 앤시아의 심장을 펌프질했다.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적절히 서로를 멀리하며 내외하다가 여주인공에게 넘겨주려던 계획이 송두리째 날아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대로 분위기에 휩쓸려 버린다면.
앤시아의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제한된 시야 끄트머리에 얇은 커튼이 쳐진 창문이 들어왔다.
창문 밖에 걸친 둥근 달의 존재를 발견한 순간 리샤르의 첫 밤을 보내야 한다던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미 빈틈없이 맞닿은 리샤르의 단단한 몸이 모든 걸 생생하게 알려 주었다.
아무리 모른 척하려 해도 콧구멍에 호박을 밀어 넣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앤시아는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정말이지 원작앤시아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떻게 공작과의 첫날밤을 버텨 낸 것인지 묻고 싶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말을 하고 싶어도 입술이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앤시아는 이런 상황에서 가장 효과가 좋은 주특기를 실행했다.
1초 눈물 흘리기.
필요하다면 흐르던 눈물도 멈추고 바싹 말라 있던 눈에서 눈물을 뽑아낼 수도 있었다. 앤시아는 리샤르가 알아차릴 때까지 1리터라도 뽑아낼 기세로 열심히 눈물을 흘렸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리샤르는 부드러우면서도 탐욕스러울 만큼 진득이 달라붙게 하는 감각을 쫓아 점점 더 강하게 앤시아를 끌어당겼다. 미약한 저항인 듯 앤시아의 입술이 떨어질라치면 콧등이나 뺨을 맞대며 다시 달라붙고야 말았다. 그러던 중 리샤르는 맞닿은 뺨이 젖어 있음을 알아챘다.
“부인?”
드디어 리샤르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앤시아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어깨까지 떨며 울먹였다.
“무서워요, 공작님.”
분위기에 휩쓸려 허락할까 봐무서워 죽겠다, 진짜.
거기에 허리며 등을 끌어안는 리샤르의 악력에 척추에서 우두둑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정조의 위기도 위기지만 생명의 위기 역시 절절하게 느껴졌다.
틈만 나면 악력 조절을 위해 노력한 리샤르가 이런 앤시아의 마음을 알았다면 억울했을 것이다.
“기다려 주신다고……. 흑…
약속하셨는데…
……. 흐윽…….”
키스만 한 것뿐이다.
그렇게 변명하려던 리샤르는 지금 멈추지 않았다면 과연 자신이 키스만으로 끝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약속, 지켜 주실 거죠?”
“……공작가의 약속은 가볍지 않으니 울지 마시오.”
리샤르의 느릿한 답에 앤시아는 눈물 젖은 얼굴로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러면서도 겁이 나는 듯 잘게 떨리는 몸이 리샤르는 안쓰러우면서도 다시 품 안에 가두고 싶어져 곤란했다.
부부인데 어째서 입을 맞춘 것만으로도 이렇게 두려워하는가.
답답하면서도 당장 무섭다며 떨고 있는 가녀린 여인을 앞에 두고 있자니 리샤르는 착잡해졌다.
리샤르는 제 입으로 약속을 운운하면서도 자극을 당해 붉게 부어오른 앤시아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좀 지나쳤던 것 같군.”
조금 전까지 제 것인 양 마음껏 취하던 부드러움이 손끝으로 살짝 누르자 선명하게 떠올랐다.
울고 있는 앤시아가 가엽게 느껴지기보다 눈물조차 잘 어울리는 여인이라 좀 더 울려 보고 싶어졌다.
앤시아의 입술을 매만지는 리샤르의 푸른 눈이 짙어지는 듯 보였다.
지금 더 울면 왠지 위험한 것 같다는 본능적인 느낌에 앤시아는 더욱 환하게 웃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좀 아프긴 하지만 공작님이 약속을 지켜 주신다고 해 주셔서 기뻐요.”
양심. 제발 양심 좀 챙기세요.
앤시아는 쥐꼬리만큼도 믿지 않는 리샤르를 향해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도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기색이 보이는 리샤르의 푸른 눈은 여전했다.
어쩌면 위기 상황일지도 모른다.
앤시아는 그리 궁금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떠오른 화제를 급히 꺼냈다.
“공작님, 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아까?”
오늘 하루 리샤르는 몇 번이고 나단과 앤시아가 함께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쓰렸다. 그것을 분노라고 부른다면 적절할 듯도 했다.
“공작님은 나단 오라버니를 처음 보셨는데도 마치 뭐라도 보신 것처럼 화를 내셨잖아요.”
앤시아는 공작저 입구에서 나단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리샤르가 두 사람을 향해 모욕적인 발언을 했던 것을 언급했다. 이에 리샤르의 짙어지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건, 미리 선입견을 품었던 탓이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사과하지.”
오해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딱히 사과받을 필요는 없었지만, 앤시아는 분위기를 계속 바꾸기 위해 질문을 했다.
“공작님은 어째서 선입견을 품으신 건가요?”
“시녀장에게 편지를 받았소.”
“아…….”
역시 그런 거였구나.
시녀장 로사는 앤시아가 어설픈노력을 이어 가는 동안 강한 한방을 공작에게 보낸 것이다.
앤시아에게 이렇다 할 감정이 없었던 리샤르치고 단어 선택이 과격하다 싶더니. 역시 로사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앤시아는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앤시아에게 오히려 리샤르가 의아함을 느꼈다.
“부인을 음해하려는 듯 지독한 편지였지. 그에 휘둘린 건 분명 내 잘못이 맞소. 그대와 소백작이 지나치게 친밀한 건 맞으나 편지에 적힌 내용은 지독한 악의로 과장되고 왜곡되었으니.”
“남편이 자리를 비운 틈에 남자를 끌어들이는 새신부라고요?”
천진한 앤시아의 목소리로 들으니 리샤르는 자신이 입에 담은 말들이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건, 내 실수요. 사과하지.”
“괜찮아요. 몇 번이나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베개 하나만큼 거리를 벌린 앤시아는 방긋 웃어 보였다.
리샤르는 마냥 밝기만 한 앤시아가 이해되지 않았다.
“부인은 시녀장을 탓하지 않는 건가.”
“왜요? 로사는 자신이 할 일을 한 거잖아요. 공작가를 지켜 왔고 앞으로도 지켜 갈 텐데요.”
“그렇다고 해서 부인을 함부로 매도한 편지를 보낸 건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겠소.”
“그럼 태형을 내릴까요? 아니면 일주일 정도 감옥에 가둘까요?”
앤시아는 나단의 조언을 떠올리며 냉큼 답을 내었다.
이에 리샤르는 조금 감탄했다.
어리바리하게만 보이던 공작 부인이 제법 안주인답게 결단력을 보였다. 자신이었다면 손목을 잘라 버렸겠지만, 그렇게 인재를 하나 잃는 것보다는 앤시아의 판단이 더 적합해 보였다.
리샤르가 고개를 끄덕이기 전, 앤시아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식이면 로사는 한동안 꼼짝도 못 할 거고 집사장 혼자서 이 큰 저택을 이끌어 나가긴 너무 힘들 거예요. 전 아직 저택에 방이 몇 개인지도 모르는걸요.”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용 인의 도움을 구하는 데 자연스러웠다. 앤시아의 순진한 웃음 속에 현명한 안주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정작 앤시아는 책임 따위 조금도 질 생각이 없었다.
놀고 먹고 뒹굴뒹굴하면서 악행도 열심히 쌓아 둬야지. 그러다 진짜 여주가 등장하면 눈치껏 뭉개다가 빠져 줄 예정이었으므로 쓸데없는 데 기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로사가 보이는 앤시아를 향한 악의에도 딱히 마음상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로 괜찮다는 의미의 웃음을 보였는데 리샤르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무척 가냘파 보이는 여인이지만 마음만은 이미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충분했다.
리샤르는 주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칫 왜곡될 수 있는 내용을 적어 보낸 시녀장에게 개인적으로 책임을 물으려던 판단을 보류했다.
‘아내의 판단에 맡겨 두는 것도 괜찮겠지.’
리샤르는 배시시 웃는 앤시아가 사랑스러우면서도 대견해 충동적으로 끌어안았다.
“아!”
정작 끌어안겨진 앤시아는 돌덩이처럼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쳐 고통스러웠다.
놀란 듯 작게 새어 나온 소리조차 지금의 리샤르에게는 위험했다. 이대로라면 다시 앤시아를 탐할 것 같아 리샤르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생생한 육체에 앤시아는 고개를 휙 돌려 벽에 박힌 마석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그사이 리샤르는 벗어둔 가운이 아닌 제대로 된 의복을 갖춰 입었다.
적당히 옷 입는 소리가 끝난 것 같아 돌아본 앤시아는 금방이라도 외출할 기세인 리샤르를 보며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마수 토벌하러 가시는 건가요?”
마수를 언급하며 저리 해맑은 귀족 여인이 어디 있을까 싶어 리샤르는 오히려 무뚝뚝한 얼굴에 짧게나마 미소 비슷한 게 스쳐 갔다. 그러나 이어진 생각이 리샤르의 얼굴에 깃든 미미한 감정마저 지워 냈다.
“레슬리 소백작이 머무는 이상 자리를 뜰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