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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36화 (36/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36화.

“마수 토벌, 안 급하신가 봐요.”

너무도 솔직하게 내뱉은 탓에 앤시아는 아차 싶었다. 다행히 리샤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오히려 앤시아의 흘러내린 옷을 끌어 올려 살짝 드러난 어깨를 감싸 줄 뿐이었다.

“급하지. 그래서 보내려고.”

공작에게 있어 마수 토벌은 삶그 자체였다. 바로 지금 떠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걸 위해 나단을 내쫓기라도 하려는 걸까.

순하게 생글거리던 앤시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렇지만 오라버니가 혼수품을 실어 온 저 많은 마차를 빈 마차로 돌아가게 하는 건…….”

“비어 있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너무도 당연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리샤르는 그대로 돌아서 부부 침실을 나가 버렸다.

일단 일촉즉발의 상황을 넘긴 것에 안도하던 앤시아는 나단이 가져갈 마차에 리샤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걱정되기 시작했다.

‘설마 빈 마차로 가기 싫으면 다 부숴 버리겠다! ……이런 건 아니겠지?’

불안감에 좀처럼 다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앤시아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창문을 열어 보았다.

창문조차 묵직하니 힘겨웠으나, 막상 열고 나니 들이닥치는 찬바람에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이 매서운 바람을 효과적으로 막아 준 고마운 두께와 무게였다.

“어? 저건 나단이 데려온 마차잖아?”

아직 한밤중인데도 저택 앞이 사람들과 등불로 밝았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앤시아는 두꺼운 가운을 걸치고 침실을 빠져 나왔다. 문밖에 있던 줄리가 놀라 급히 숄을 꺼내 와 걸쳐 주었다.

리샤르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들이 저택 앞으로 몰려들었으니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마음이 급해져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어제 쓰러졌던 게 거짓말인 양 몸이 가벼웠다.

그 개똥보다 못한 냄새를 풍기던 약이 명약이긴 했나 보다. 그렇다고 또 먹을 엄두는 안 나지만.

줄리의 안내로 길도 헤매지 않고 곧장 저택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온 처리가 가능한 마차는 요리장을 따라 가십시오.”

“무게가 많이 나가도 괜찮은 마차는 저쪽 기사부단장께 가 보세요.”

“나머지 마차는 집사장을 따라 이동하시면 됩니다.”

수십 대의 마차가 각자 방향을 달리해 이동하는 걸 멍하니 바라보던 앤시아는 그 사이에서 마부들을 상대하는 나단을 발견했다.

“오라버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 앤, 너까지 깨워 버렸구나.”

나단은 무척 바빠 보였는데도 앤시아의 부름에 다정한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나단과 대화 중이던 마부는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불만을 토로했다.

“소백작님,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움직여 봤자 효율이 떨어진다니까요.”

“알고 있네. 새벽부터 떠나는 대신 돌아가는 길에 충분히 쉴수 있도록 배려하지.”

“그냥 낮에 출발하면 되잖습니까?”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할 테니 지금만 고생해 주게나.”

나단의 솔직한 부탁에 자다 말고 불려 나온 마부들은 투덜대면서도 각자 가야 할 방향으로 향했다. 마부들을 보내고 나서야 나단은 앤시아의 손을 붙잡으며 반겨 주었다.

“미안하구나, 앤. 아무래도 공작의 미움을 단단히 산 것 같구나.”

“설마 공작님이 오라버니를 쫓아내는 거예요?”

“어찌 보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공작가 창고를 개방하면서까지 빈 마차를 채워 빨리 돌려보내겠다고 하는 걸 보니.”

“네?”

뭔가 앞뒤 말의 조합이 이상했다.

“앗, 설마. 오라버니가 특산품을 조사하고 사들이느라 공작가에 오래 머무를까 봐 뭐든 채워 보내려고 공작가 창고를 열었다는 건가요?”

“그래. 공작의 질투심이 제법 매섭구나. 이런 식으로 갑자기 떠나게 될 줄이야.”

앤시아의 뺨으로 향하던 나단의 손이 어쩐지 입술 위를 닿지도 못한 채 배회하다 천천히 내려갔다. 당연히 쓰다듬을 줄 알고 살짝 고개를 기울이던 앤시아는 그런 나단을 의아하다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나단은 조금 전 자신에게 마차를 채워 줄 테니 곧장 떠나 달라던 리샤르를 떠올렸다. 위협하듯 가까이 다가서 원하는 목록이 있다면 뭐든 가져가라며 으름장을 놓던 리샤르에게서 흐릿하나 익숙한 향이 맡아졌다.

지금 눈앞에 있는 앤시아에게서 선명하게 맡을 수 있는 향이었다.

부부가 되었으니 당연히 함께했으리란 걸 알면서도 나단은 애써 모른 척하며 앤시아의 곁을 맴돌았다.

현실을 직시하자 차라리 어서 떠나라며 경고하는 리샤르에게 감사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깨달아 버린 현실에, 타인의 아내가 되어 버린 앤시아를 바라는 것이 괴로워졌다. 지금도 이렇게 반갑고 행복한데 가슴 한쪽이 송곳으로 쑤셔 오듯 고통스러웠다.

“오라버니?”

“그래도 안심이야. 공작이 소문과 달리 이성적인 사람이라.”

“정말요? 저 흑곰인지 흑표범인지 어딜 봐도 짐승에 가까운 공작님 말하는 거 맞아요?”

물론 내 눈엔 댕댕이지만.

아무리 나단이 한 말이라지만 동의하기엔 꽉 안겨 우드득 하는 소리를 냈던 허리가 아릿한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서 다소 감정적으로 본심을 말해 버렸다.

나단 역시 그런 앤시아의 격양된 모습에 놀란 듯했으나 이내 평소와 같은 다정한 웃음을 보였다.

“제 것을 눈앞에서 몇 번이고 뺏기면서도 공작은 인내했다. 날수십 번이고 찌르고 싶다는 지독한 눈을 하고선 말이지.”

그건 앤시아도 인정했다. 몇 번이나 리샤르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는 걸 목격할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숨 쉬듯 피를 보는 야만인 같다던 소문과 달랐어. 내가 네게 보인 선명한 애정에도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물건을 망가트릴지언정 내게는 손대지 않았지. 다소 거칠긴 해도 분명 이성적이었단다. 북부를 지켜 낸 게 우연은 아니었나 보구나.”

나단은 공작가에 온 이후 처음으로 앤시아의 뺨이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게 아닌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어린아이 달래듯 가벼운 접촉이었다.

그러니까 공작 앞에서조차 숨쉬듯 애정 공세를 퍼부었던 게 고의였다고?’

지금 나단은 제 목을 걸고 공작을 도발했다는 이야길 하고 있었다.

‘미쳤어? 진짜로 피에 미친 공작이면 어쩌려고?!’

앤시아의 생각을 읽은 듯 나단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이의 아내가 된 너를 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란다, 앤.”

하지만 필요하다면 기꺼이 해낼 나단이었다. 당황한 앤시아에게 나단은 과하지 않은 가벼운 포옹을 해 주었다.

“나의 소중한 앤시아. 너의 행복을 누구보다도 바라고 있단다.”

앤시아는 뒤늦게 지금 하는 포옹이 나단이 건네는 이별 인사임을 이해했다.

그 먼 길을 달려와 앤시아의 앞에 선 순간부터 헤어지는 지금까지 나단은 오로지 하나만을 위해 움직였다. 그런 나단에게 앤시아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마차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분주했어야 할 나단은 앤시아가 손을 잡아 오자 그대로 멈춰 섰다. 나단의 지시가 없어도 이미 공작에게 지시를 받은 사용인들은 부지런히 물품을 나르고 마부들은 각자의 마차에 짐을 채워 넣었다. 나단이 데려온 마부들 역시 모두 숙련된 이들이라 실수하나 없이 빠르게 준비가 끝나갔다.

그렇게 두어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 대부분 마차가 저택 앞에 줄을 섰다.

“정말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마무리가 돼 가네요.”

“그렇구나. 너무 유능한 사람만 모았나.”

나단의 푸념 아닌 푸념에 앤시아는 작은 웃음을 보였다.

“그래도 마차가 수십 대인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줄 알았어요.”

“그래.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정신없이 바쁜 이들을 지켜보며 앤시아와 나단은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사이 벌써 떠난 줄 알았던 리샤르가 기사단을 이끌고 나타났다. 리샤르의 시선은 여전히 꼭 잡은 둘의 손에 머물렀으나 이전과 달리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지 않았다.

“영지를 빠져나가는 데까지 호위 겸 배웅을 해 주겠소. 내 아내의 오라비 같은 사람이라 하니 그 정도 대우는 해 드려야지.”

나단이 뭉그적거리며 가지 않을까 싶어 감시하려는 게 아닐까.

그런 말을 꺼내는 대신 앤시아와 나단은 웃는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공작님.”

“각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곧 출발할 테니 소백작도 내 아내와 인사가 끝나면 마차에 오르시오.”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리샤르는 기사단을 향해 돌아섰다. 그래도 인사할 시간을 더 주겠다는 듯한 태도는 나쁘지 않았다. 별거 아닌 듯 보여도 리샤르가 보인 호의에 나단은 웃음을 보였다.

마차에 오르기 전 나단은 앤시아에게 마지막까지 염려의 말을 전했다.

“앤, 그윈티드 공작가에는 대대로 함께한 가신들과 주치의가 있단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네 건강도 지금보다 더 나아지겠지. 물론 백작가에서도 항상 약을 보낼 것이고.”

“제발 달콤한 약으로 부탁드려요, 오라버니.”

“그래. 그러니 네 몸이 괜찮아지면 연락하거라. 몸이 좋지 않아져도 연락하고, 언제든 내가, 백작가가 떠오르거든 꼭 편지를 보내 다오.”

웃으며 꺼낸 말 속에 점점 물기가 젖어 들었다.

“앤, 기억해. 네가 부르면 난 언제는 네게 달려올 수 있다는 걸.”

앤시아는 한참 붙잡고 있었던 나단의 손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분명 한 달 전 백작가에서 잡았던 나단의 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지금, 공작가로 오기 위해 시간을 단축해 가며 서둘렀던 나 단의 손은 많이 상해 있었다. 얼굴을 보면 여전히 다정한 미남의 얼굴이었으나 턱선이 날카로워 보일 만큼 살이 빠졌다. 저 많은 마차를 이끌고 시간까지 단축하기 위해서 나단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든 부르면 달려올 수 있다니.

이렇게 몸이 상하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앤시아를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달려올 게 뻔한 나단을 다시 부를 수 없었다.

“알았어요. 그 대신 보고 싶다고 편지 보내도 오지 마세요. 그건 투정이니까. 와 달라고 할 때만 오셔야 해요.”

“이런. 어려운 주문을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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