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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37화 (37/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37화.

장난스럽게 주고받는 말 속에 자꾸만 슬픔이 묻어나 서로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어차피 반년 뒤에 보게 될 거란걸 아는 앤시아조차 가슴이 아플만큼 이별은 괴로움이었다.

나단은 앤시아가 자신을 부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 듯 웃음 속에 슬픔이 묻어났다.

“공작을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이만 가 봐야겠다.”

가겠다고 말하면서도 나단은 차마 앤시아의 손을 놓지 못했다.

앤시아 역시 빤히 쳐다볼 뿐 손을 놓아주지 않자 나단은 애써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편지로 전할 수도 있으나 아버지나 어머니께 전할 말이 있다면 지금 해 다오. 최선을 다해 네 마음을 전하마.”

이런 순간에조차 나단은 부모의 일도 잊지 않고 챙겨 주었다. 그런 나단이 고마우면서도 이제 이 손을 놓으면 이별임이 믿기지 않아 망설여졌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못 하겠어요.”

“뭐든 괜찮단다. 돌아가는 내내 앤, 너의 말을 품고 갈 테니 어떤 말이든 편하게 해 다오.”

어쩌면 나단은 이렇게 말 한마디도 예쁘게 할까.

일주일만 더 머물면서 리샤르에게 ‘예쁜 말 하기 특강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앤시아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리샤르가 말에 오르는 걸 보았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

앤시아의 마음이 순간 다급해졌다. 지금까지 보였던 장난스러움이나 해맑은 웃음조차 잊을 만큼.

“사랑해요.”

누구를 향한 말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애절했다.

“사랑해요, 언제까지나.”

가족으로서든 사람이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호의는 앤시아가 나단과 백작 부부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건 사랑이었다.

“잊으시면 안 돼요.”

나단의 어깨 너머로 말에서 뛰어내리는 리샤르가 보였다. 그가 오해하든 말든 당장 나단의 손을 놓기조차 쉽지 않았다. 지금 헤어지면 반년을 보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도무지 놓을 수가 없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나단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풀렸다.

감정이 물밀듯이 올라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 냈다. 눈물 따위로 눈앞이 흐려지는 건 나단이 떠난 후라면 얼마든지 대환영이었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아 내던 앤시아는 익숙한 나단의 품이 가까워지자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이제 입조차 열 수 없었다.

울음이 터져 나올 테니까.

반년 뒤 볼 수 있으니까 괜찮다가 아니었다. 반년이나 보지 못하니까 이별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볍게 생각하고 행동했던 자신이 이제야 원망스러웠으나 돌이 킬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제 몸에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버텨 냈다.

울음을 참느라 잘게 떨고 있는 앤시아의 등 뒤로 천천히 나단의 팔이 둘렸다. 언제나처럼 다정하면서도 점점 깊어지는 포옹에 앤시아는 나단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리샤르가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앤시아의 손은 풀릴 줄 몰랐다. 깊게 끌어안았던 나단의 팔이 풀린 후에야 앤시아 역시 마지못해 손을 놓았다.

울음을 참느라 코끝이 빨개진 앤시아의 콧등을 가볍게 건드린 나단은 이 이상은 없을 만큼 다정하고 깊은 미소를 보였다.

“이 마음에 품은 유일한 말, 끝까지 지켜 내마.”

“그 말은 내 아내의 후견인에게 꼭 전해 주길 바라지.”

리샤르는 앤시아가 전한 말을 오해하지 않는다는 듯 덧붙였고 나단은 호의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단이 보인 의외의 반응에 리샤르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정작 나단은 그런 리샤르의 반응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손까지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각하, 배웅은 여기서 받겠습니다.”

“공작의 호의를 거절하는 건가?

이건 백작가에도 좋은 선물이 될텐데.”

악수하기에는 이르지 않은가 눈으로 말하는 리샤르에게 나단은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그러곤 말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는 앤시아를 향해 다정하면서도 안타까운 눈길을 보냈다.

“앤시아를 울리지 않는 것이 제가 바라는 유일한 선물입니다.”

“소백작은 유일한 게 많은 것 같군. 게다가 울린 건 그쪽이 아닌가.”

“이제 공작 부인이시니 오라비의 손이 아닌 각하께서 눈물을 닦아 주셔야지요.”

그동안 꼬박꼬박 앤시아의 이름만 부르던 나단은 리샤르의 앞에서 처음으로 공작 부인이라 칭했다. 이에 리샤르의 무뚝뚝하던 얼굴에 조금이지만 힘이 풀렸다.

주머니를 더듬던 리샤르는 눈치 빠르게 다가온 집사장이 건넨 손수건을 받아 앤시아에게 건넸다.

물론 나단이 꺼낸 손수건 쪽이 더 빨랐으나 의도적으로 피했다.

앤시아는 리샤르가 건넨 손수건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면서도 눈만은 나단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이었다.

나단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고 마차의 선두로 향했다. 주춤 한 걸음 내디뎌 그 뒤를 쫓으려던 앤시아의 무릎이 휘청였다.

이럴 것이라 예상했다는 듯 리샤르는 앤시아의 허리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나단이 마차에 오르자마자 무너져 내리는 앤시아를 안아 들었다. 버둥대거나 울부짖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격렬한 감정이 느껴지는데도 앤시아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앤시아는 여기서 제가 울음을 터트리면 나단이 결코 떠나지 못하리란 걸 알기에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켜 냈다. 그저 천천히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눈에 담으려는 듯 눈물이 고일 때마다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리샤르는 그런 앤시아를 안아든 채 기다려 주었다.

“흑……. 흐윽…….”

완전히 시야에서 마차가 사라진 후에야 앤시아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가냘픈 몸은 울음을 토해내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리샤르는 나단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아니더라도 지금은 앤시아의 곁에 있어야 함을 알아챘다. 그러나 앤시아는 가족과 같은 나단을 배웅하며 흘린 눈물이마르기도 전 공작 부인답게 행동하려 했다.

“공작님, 가 보셔야 하지 않아요? 제가 배웅해 드릴게요.”

방금까지 흐느껴 울던 앤시아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녀의 목소리에선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그러면서도 공작 부인의 소임을 다하겠다는 듯 리샤르를 배웅하려 했다.

다른 때라면 주저 없이 떠났을 리샤르였으나 깊은 슬픔을 보인 앤시아를 두고 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 급히 떠나야 하는 건 아니오.”

정작 리샤르를 기다리고 있는 호위 기사들은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듯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마수 토벌 중 돌아온 공작이 다시 떠나기를 기다리는 이들의 기세가 묵직했다. 이 시기에 공작가로 돌아와서는 안 될 일이었다.

“오라버니와 백작가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 주셨어요. 정말 감사해요.”

이미 충분히 시간을 허비한 리샤르와 기사들을 향해 앤시아는 울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임에도 웃음을 보였다.

“마수 토벌 중 돌아오신 거잖아요. 공작님 덕분에 인근 영지까지 안전하다고 들었어요. 정말 훌륭하세요.”

빨갛게 달아오른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닦아 내면서도 연신 재잘거리는 앤시아는 분명 무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애초에 리샤르는 갑작스럽게 마수 토벌 중 지역을 이탈한 탓에 기사를 보충해 급히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안사람이 눈치 빠르게 그런 공작을 이해하고 배웅해 주려 하는 건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 괜찮아요. 공작님이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하세요.”

이토록 작고 여린 여인이 공작이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키며 배웅을 이어 나갔다. 그렇기에 리샤르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말에 올랐다.

“일주일. 그보다 빨리 돌아올테니 울지 마시오.”

한 달은 걸릴 일을 일주일 안에 마치겠다는 공작의 단호함에 앤시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네. 공작님도 무리하지 마세요.

다치시면 안 돼요.”

제발 원작하고 다르게 움직이지 말고 예정대로 기한 채우고 돌아오라는 의미였다.

이런 앤시아의 본심을 알 리 없는 리샤르는 심장 부근에서 평소와 달리 기묘한 간질거림을 느꼈다.

자신이 다친다면 이 가녀린 여인은 눈물을 보일까?

나단을 떠나보내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서글프게 우는 여인인데 리샤르가 다친다면 분명 울어 줄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목 언저리가 간질거렸다. 리샤르는 저도 모르게 떠올린 기대감에 당혹스러웠지만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며 말에 올라탔다.

언제나처럼 공작을 배웅하기 위해 흔들림 없이 지키고 선 수많은 사용인과 달리 금방이라도 휘청일 것처럼 가녀린 앤시아의 존재가 누구보다도 크게 눈에 들어왔다.

“다녀오세요.”

“……다녀오겠소.”

질서 정연하게 서 있는 사용인들에게 배웅 받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고작 한 명이 늘어난 것뿐인데 왜 이토록 다르게 느껴지는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억지로 떼는 발이 마수의 독에 당했을 때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잦은 출정으로 준비는 빈틈없이 완벽할 텐데도 무언가 두고 온 것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해가 지기 전 산을 넘을 것이다. 뒤처지는 자는 각오하도록.”

“예!”

인사는 이미 충분히 했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아쉬움을 애써 외면한 채 리샤르는 말을 몰아 저택을 빠져나갔다.

수십 마리의 군마가 떠나가며 땅을 울리던 소리가 멀어지자 앤시아는 애써 짓고 있던 미소를 풀어 냈다.

“후우……. 생각보다 더 힘들구나.”

예정대로 늦게나마 리샤르를 보내고 나니 나단을 보낸 슬픔이 다시 몰려왔다.

지금 심정으로는 방에 틀어박혀 종일 침대에서 울고 싶었다. 슬퍼지면 울고 보고 싶으면 또 울면서 중간중간 탈수가 오지 않게 하녀가 챙겨 주는 음료를 마시며 감정을 추스르면 좋겠다 싶었다.

겸사겸사 전 약혼자의 귀환에 충격받은 공작 부인의 뒷말이 퍼지면 더 좋고,

“아, 모르겠다. 오늘 정도는 계획 같은 거 생각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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