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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38화 (38/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38화.

혼잣말하며 터덜터덜 방으로 향하는 앤시아의 귀족답지 않은 모습에도 뒤를 쫓는 하녀들은 안쓰러운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앤시아의 천진한 행동은 평민출신이 많은 사용인 사이에서 손가락질 받기보다 동정과 공감을 샀다. 게다가 주인인 공작이 전 약혼자로 소문난 나단과 앤시아의 애정 넘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도 태연히 배웅하지 않았는가. 사용인들 머릿속에 나단 레슬리의 방문은 공식적으로 큰 문제 없이 치러진 공작 부인의 첫 손님맞이 정도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고작 내연남이 떠난 것만으로도 그리 흐트러진 몸가짐이라니.

쯧.”

명백한 시비조의 말투에 앤시아의 걸음이 멈췄다.

펑펑 우느라 빨개진 얼굴을 한 앤시아에게 불만을 품고 시비를 걸 만한 인물은 적어도 이 저택엔 단 한 명뿐이었다.

새벽 내내 유독 보이지 않던 시녀장 로사가 복도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나.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르겠군요. 공작가의 재산을 탈탈 털어 주는 거로도 모자라 내연남을 저리 당당하게 눈물로 배웅하다니. 예법은 배우면 된다지만 상식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언제는 공작가 재산이 어마어마해서 공작 부인에게 내어 주는 내탕금 따위 티끌이라 콧대를 세우더니, 앤시아를 무안 주기 위해서라면 손바닥 뒤집듯 말이 바뀌었다.

“로사. 새벽엔 어디 갔었던 거야?”

“흠, 시녀장인 제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도 못 하겠지요.”

“공작님을 배웅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 있었어?”

리샤르를 언급하자 한순간이 긴 하나 로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그건 공작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제가 얼마나 공작가를 위해 헌신하는지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얘도 겁먹는 게 있긴 하네.

굳이 리샤르와 앤시아가 함께 있을 때는 나서지 않더니 뒤늦게 나타나 시비를 걸어왔다. 사람을 가리며 행동하는 걸 보아 로사는 앤시아의 생각보다 약한 빌런이었다.

누구보다 가장 앞장서서 참견하고 방해했어야 할 로사가 이상하리만치 보이지 않았던 건 예상과 다른 리샤르의 반응 때문이었다.

리샤르의 분노에 쫓겨나거나 울고 있어야 할 앤시아가 오히려 나단과 함께 있지를 않나, 이후에 나타난 리샤르의 품에 안겨 울기까지. 리샤르와 앤시아가 아무렇지 않게 함께 있는 걸 보고 로사는 당황했을 것이다.

편지가 가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면 어째서 주인님은 돌아오신 걸까? 편지를 읽고도 공작 부인의 추문을 눈감아 주기로 한 걸까? 침실에서 부부간의 은밀한 대화가 오고 간 것일까?

답을 알 수 없는 의문들이 로사를 차마 리샤르와 앤시아가 함께 있는 장소에 나서지 못하게 했다.

시녀장이 보냈을 악의 가득한 편지를 받고 돌아온 공작이 공작부인을 내치거나 그녀의 오라비격인 소백작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오히려 빈 마차를 채울 물품으로 돌아갔을 텐데요. 자신의 더러운 추문이 부디 가라앉기만을 바라면서 숨어 있어야지요.”

공작이 떠난 후에야 간신히 얼굴을 내밀고서는 참으로 당당했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꼿꼿하게 서서는 잔뜩 울어 안쓰럽게 붉어진 앤시아를 타박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앤시아는 그런 로사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앤시아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슬픔에 젖어 붉어진 눈조차 안쓰럽게 보일 작고 가녀린 소녀 같은 여인. 눈이 마주친다면 먼저 손수건을 내밀고, 말재주가 없다면 곁에 앉아 함께 슬퍼해 주고 싶을 만큼 안타까운 모습일 것이다.

혹시 로사는 공감 기능에 문제라도 있는 게 아닐까. 색안경 필터를 꼈다 한들 이런 상황에서 조차 저렇게 악의를 품고 달려들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현재 앤시아는 심정적으로 무척 피로했다.

다른 때라면 이런 로사와 대치하거나 좀 더 자극하며 미래를 위한 악녀 포인트를 적립했겠지만, 나단을 떠나보냄으로 인해 앤시아의 인내심은 상당히 낮아진 상태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로사의 도발에 넘어가 준다.

지금의 나는 예민 보스니까.

‘괜히 로사 편지 때문에 나단이 리샤르랑 기 싸움하다가 일찍 돌아가게 됐잖아. 다 너 때문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억울하네…….’

“더러운 추문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걸까?”

“세상에. 제 입을 더럽히실 생각이신가요?”

그 손으로 적어 낸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이번에는 로사의 주제넘은 행동을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로사, 차를 좀 타 주겠어?”

앤시아의 부탁에 로사는 미간이 찌푸려질 만큼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당연하다는 듯 자신이 움직이지 않고 가까이에 있던 다른 하녀에게 눈짓했다.

그에 곧장 움직이려던 하녀는 앤시아의 덤덤하나 선명한 지시에 멈춰 섰다.

“시녀장이 타 주는 차가 마시고 싶어. 지금의 난 무척 슬프고 예민해서 차 맛에 민감할 거 같거든.”

“정말이지 욕망에 충실한 분이라 할 말이 없군요.”

고작 차를 타 달라고 한 것뿐인데도 로사는 착실하게 앤시아를 깎아내렸다.

여기서 또다시 거절하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로사는 보란 듯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까운 응접실로 들어서는 당당함이 안주인 못지 않았다.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이 자리의 주인공같은 자신감마저 묻어났다.

자신이 안주인인 양 느긋하게 응접실로 들어선 로사는 하녀가 준비한 티 세트 앞으로 다가왔다. 따뜻하게 데워진 주전자에 찻잎만 적정 시간 우려내면 될만큼 하녀의 손에 준비된 상태였다.

로사는 찻잎을 넣는 별거 아닌 동작까지 과장된 우아함을 연출했다.

저러다 새끼손가락에 쥐가 나겠다 싶을 만큼.

은은한 향이 퍼지기 시작하자로사는 마지못해 앤시아의 빈 잔을 채워 주었다. 아직 김이 피어 오를 만큼 뜨거워 보이는 찻물이 우아한 동작과 달리 무자비하게 부어졌다.

자칫 잔을 드는 앤시아가 손을 델 수도 있을 만큼 찰랑하게 채워졌다. 이런 작은 일에서까지 착실하게 악의를 드러내니 앤시아는 화가 났음에도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로사는 정이 넘치나 봐. 손 델뻔했어.”

“모래가 가득 든 잔이라도 우아하게 들 줄 아는 게 귀부인이랍니다.”

“응. 로사 말이 맞아. 난 귀부인 이 못 되는지 영 버겁네.”

앤시아는 보란 듯이 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쨍강.

응접실에 깔린 카펫 덕에 큰 소음이 나지는 않았으나 고급 찻잔이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튄찻물에 로사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 정말이지 민폐만 끼치는 것도 재주지 않나 싶습니다.”

응. 넌 선을 넘는 게 특기고.

이미 몇 번이고 수위를 넘나들던 로사였으나 그동안은 필요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

로사는 혀를 차며 하녀들에게 깨어진 다기를 치우라는 듯 손짓했으나 앤시아도 손을 흔들어 제지했다.

“로사가 치워 줘. 손님들이 드나드는 공간인데 파편이라도 남으면 안 되잖아.”

“청소는 이 아이들이 더 잘할 겁니다. 적재적소라는 말 정도는 아시겠지요.”

“응. 그러니까 시녀장인 로사가 치워 달라고.”

“하아, 이 정도 말도 못 알아들 으실 줄이야.”

“알아. 공작 부인의 지시를 시녀장이 거부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유치하고 소소한 복수라고 해도 상관 없었다. 이런 순간조차 악의를 드러내는 걸 참지 못한 로사에게 조금이라도 되돌려 주고 싶었다.

로사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으나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허리를 굽혔다.

앤시아 발치의 깨어진 조각을 집으려 손을 뻗던 로사는 기어코 한마디를 빼먹지 않았다.

“그 자리가 허울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이 순간을 후회하실 겁니다.

“로사는 적당히를 모르는 그 혀 때문에 당장 후회하게 될 거야.”

다정하게 속삭이듯 경고하는 앤시아의 목소리에 로사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의심스러웠다.

마치 과거 한참 공작가의 기강을 잡던 전 공작 부인에게서 매일 몸을 떨며 들었던 음성과 겹쳐져 저도 모르게 조각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허약해 빠진 새 공작 부인에게 한마디 해 줄 생각으로 로사가 고개를 드는 순간 눈앞에 찾물이 쏟아져 내렸다.

앤시아가 찻주전자를 집어 들어 그대로 로사에게 내던진 것이다.

화들짝 놀란 로사가 손을 들어 가로막자 묵직한 찻주전자와 함께 손등으로 뜨거운 물이 고스란히 끼얹어졌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머, 로사. 괜찮아?”

“지금 제게 찻주전자를 던지신 거예요?!”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해? 뜨거워서 놓친 것뿐인데. 로사의 말대로 허울뿐인 공작 부인이라 예법 같은 건 잘 몰라서.”

“이게 예법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요?!”

비명을 지르듯 화를 내던 로사는 풀풀 김이 오르는 손을 벽난로 옆 물 항아리에 집어넣었다.

“로사가 그랬잖아. 예법도 모르고 수치도 모르고, 아는 게 없는 공작 부인이라고. 뜨거운 물이 닿으면 화상을 입는다는 것도 모를 수 있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앤시아의 변명에 로사는 숨 쉬듯 그녀를 깎아내렸다.

“하, 그러니 이런 무식한 짓을 벌이신 거겠죠. 제 말이 틀리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셨네요.”

로사는 뭘 믿고 저렇게까지 오만 방자할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두려운 일이 벌어질까 봐 잔뜩 털을 세우며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원래도 앤시아를 싫어라 했지만, 지금은 도가 지나쳤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앤시아를 깎아내리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은 됐다.

“로사. 편지 말인데.”

언제까지고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로사의 입이 드디어 다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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