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39화.
“한참 마수 토벌로 정신없이 바쁘셨을 공작님을 돌아오게 할 만큼 중요한 편지 말이야.”
“그, 그 편지가 왜요?”
“공작님께 달라고 하니까 주시더라고.”
로사가 공작에게 보낸 편지를 앤시아가 읽었음을 확인시켜 준 것과 다름없었다.
뻔뻔하게 굴 줄 알았던 로사가 눈을 피하는 걸 보니 이 화제를 꺼내고 싶지 않아 오히려 강하게 굴었구나 싶었다.
“로사는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아?”
찻주전자를 던지고 뜨거운 찻물을 붓는 건 이제 시작일 뿐이라면?
여전히 슬픔이 남아 있던 앤시아의 붉은 눈가가 유순하게 휘어지며 웃음을 보였다.
“내가 언제까지 참아 줘야 할까?”
살랑살랑 가벼운 걸음으로 로사에게 다가갔다. 하녀들도 평소와 다른 앤시아의 모습에 긴장한 듯 멀찌감치 서서 쳐다볼 뿐이었다.
로사가 손을 담근 물 항아리에 발을 올린 앤시아는 더없이 화사한 웃음을 보였다.
“로사는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이렇게 끊임없이 선을 넘는 걸 보면.”
앤시아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물 항아리는 다른 때라면 꼼짝도안 했을 만큼 무게감이 상당했다. 하지만 다행히 지금의 앤시아는 로사를 향해 차곡차곡 쌓인 분노의 힘으로 물 항아리를 기울일 수 있었다.
“무슨!”
와장창.
벽난로 주변이라 카펫도 없어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 냈다.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보는 줄리와 양손을 꼭 쥐며 응원하는 듯 눈을 빛내는 엘리가 언뜻 보인 것도 같았다.
‘하녀들에게 항아리 파괴자로 낙인찍히게 생겼네.’
이런 웃긴 생각을 하느라 앤시아의 입가에 해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앞으로도 그 가벼운 입이 선을 넘을 때가 기대돼.”
어찌나 화사하게 웃는지 앤시아의 진심처럼 보였다.
“나만 그런가? 로사는 기대되지 않아?”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이라니. 고작 물 항아리 깬 거로 협박이 돼? 시녀장이 가장 소중히 하던 걸 갈가리 찢거나 부숴야 수지가 맞지 않을까?”
공작가로 들어오기 전 검문을 핑계로 찢기고 부서진 앤시아의 드레스와 장신구 이야기였다.
“그건 절차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당연한 걸 지금까지 속에 담아 두다니. 역시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기엔 격이 맞지 않네요.”
그 일 공작님도 알아?
이 한마디면 로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릴 것이다. 그건 너무 쉬운 방법이었다.
공작을 벌써 써먹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로사가 앤시아에게 해 온 태도를 보아 이쪽이 더 잘 먹힐 테니까.
“엘리, 혹시 말채찍 파는 곳 알아?”
“네! 귀부인용 채찍 파는 곳도 알아요.”
갑작스러운 앤시아의 질문에도 엘리는 빠르게 답을 내주었다.
지나치게 빠른 답에 왠지 모를 수상함이 느껴졌지만, 앤시아는 로사를 돌아보며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공작가 안주인이 자기 손으로 하는 것도 좀 그런가? 공작님께 부탁하면 내 손이 되어 줄 힘센하인이나 노예를 얻을 수 있을 거야.”
노예라는 말에 로사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앤시아는 이 세계에 노예가 아직 남아 있고 그들을 향한 취급이 동물 이하임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만 있는 정도였다. 로사의 반응을 보니 북부에서도 노예는 마찬가지 취급인 듯했다.
“아, 이왕이면 노예에게 작은 회초리를 주는 건 어떨까? 로사가 너무 아프면 내 마음이 편치 않을 거 같아서.”
말채찍 이야기에도 코웃음 치던 로사는 이런 모욕적인 말은 처음이라는 듯 분노에 가득 차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노예를 살 생각도 채찍을 들일계획도 없었지만, 앤시아는 역시나 로사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수 있는 건 그녀보다 열등한 존재에게 제압당하는 상황임을 확신했다.
저렇게 계급 의식이 뚜렷하면서도 공작 부인이 된 앤시아를 필사적으로 헐뜯는 걸 보면 정말이지 강심장이었다.
“어, 어찌 그런 저속한 일을.”
“저속하다니? 공작 부인이 직접 손을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우아한 방법 아냐?”
현재 로사가 실제로 당한 건 찻물을 손에 뒤집어쓴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자신이 그간 앤시아에게 한 행동과 발언은 생각도 안하고 억울하고 분하다는 듯 표독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시녀장이 공작 부인을 저렇게 잡아먹을 듯이 봐도 될 리가 없었다.
“로사. 노예한테 회초리 맞는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파들파들 떨 거면서 공작 부인인 나에게는 어쩜 그렇게 함부로 굴 수 있을까?”
그거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었지만, 입을 꾹 다문 로사는 진심으로 노예를 불러들이는 일만은 피하고 싶은 듯 보였다.
로사를 이대로 두든 한번 단단히 혼을 내든 앤시아의 상황은 딱히 달라질 게 없었다. 로사는 계속 앤시아를 인정 못 하고 뒷말을 해 댈 거고 그건 앤시아, 그녀가 원하는 바였다.
로사가 앤시아에게 줄 수 있는 불이익이라 해 봤자 내탕금 장난질 정도인데 그쯤이야 공작가의 이름을 쓰면 그만이었다. 음식에 장난질하려면 앤시아를 무슨 신줏단지 보듯 하는 요리장을 이겨내야 했다.
‘그럼, 괜히 참을 필요 없잖아.’
나단도 돌아갔고 공작조차 저택을 비운 지금 앤시아가 조심해야 할 건 없었다. 오히려 패악을 떨면서 제멋대로 굴어야 할 때였다.
앤시아는 깨진 항아리를 피해 걸으며 하녀들을 돌아보았다.
“잘 봐 두렴.”
내가 이렇게 못된 주인이야.
“지금은 찻주전자지만 다음엔 뭐에 맞게 될지 모를 일이니.”
내 말을 들어. 인정하든 말든, 내가 공작 부인이고 저택의 법이니까. 내 말이 맞아.
“알겠니?”
“예, 마님.”
천진한 미소와 함께 모두를 향해 경고했다. 그러자 하녀들은 겁을 먹기는커녕 두 주먹까지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님 파이팅. 잘하셨어요. 힘내세요.
저 호의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들을 보니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것 같았다.
얘들아, 패악 떠는 날 봐야지.
이런 거 응원하면 너희가 고달파지는 거야.
정작 로사는 얼굴이 시뻘게질만큼 분함을 참아 내느라 숨조차 거칠어 보였다.
이 정도 경고했으면 로사는 더 패악을 떨든 쭈그리는 알아서 하겠지.
“아, 피곤해.”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마님.”
줄리와 엘리의 안내를 받으며 앤시아가 응접실을 나가자 안에 남은 하녀들이 바닥에 주저앉은 로사의 눈치를 보느라 머뭇거렸다.
“저 여자…… 공작 부인으로서 응당 갖춰야 할 기본 예법도 갖추지 못한 천한 핏줄 주제에.”
증오심마저 느껴지는 로사의 어두운 목소리에 하녀들은 허둥지 둥 깨어진 찻주전자 조각과 찻물을 치워 내고 자리를 피했다.
홀로 남은 로사는 붉게 익은 손을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공작가를 관리하느라 밤낮없이 바쁜 내 손을 이렇게 만들다니, 생각이 없어도 얼마나 없는 건지. 주인님마저 저 그럴싸한 외형에 속고 있는 게 분명해.”
로사는 시녀장이라는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을 갈아 가며 헌신해 왔다. 공작의 무관심을 신뢰라고 제멋대로 착각한 채, 공작가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제 위치를 공고히 했다.
이 거대한 저택은 로사의 삶이자 인생이고 자부심이었다.
온 힘을 다해 지켜 온 저택을 노예를 입에 담는 천하고 격에 맞지 않는 안주인에게 뺏길 수만은 없었다.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건 생각도 않는 로사는 마음을 굳힌 듯 곧장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
나단이 돌아가고 리샤르가 떠난 후 앤시아는 한동안 방에 틀어박혔다.
슬픔은 자연스레 의욕 없음으로 이어졌기에 침대와 한 몸처럼 지내기를 며칠째.
“엘리. 내 등에 뭐 안 생겼어?”
“혹시 천사의 날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희도 언젠가 생기지 않을까 하고…….”
“아, 아니. 곰팡이 같은 거 안피었냐고.”
“그럴 리가요. 답답하시면 환기를 시키겠습니다.”
줄리는 곧장 가장 멀리 있는 창문을 열었고 엘리는 혹시나 앤시아가 추울까 봐 숄을 가져와 둘러 주었다.
“아, 좋다. 선풍기 틀고 이불 덮는 기분 최고야.”
“선풍기요?”
“아, 아냐. 환기하니까 좋다고.”
나단이 채워 준 온갖 물품들로 가득한 커다란 방은 마치 백작가에 있는 것처럼 익숙하고 포근했다. 이불이나 쿠션에서 나는 익숙한 향이 앤시아를 안정시켰다.
좀처럼 의욕이 나지 않아 방에서만 뒹굴뒹굴하다 보니 잘하면 원작 앤시아의 칩거를 흉내 낼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슬픔이 점점 가라앉자 등에 풀이라도 돋을 것 같은 지루함에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역시 나한테 칩거는 무리야.
처음 계획했던 대로 부지런히 악녀 포인트를 쌓아야 했다.
어영부영 시간만 흘려보냈더니 공작가 안에서 자신의 뒷말이 잘퍼져 나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좋아. 악행도 한 걸음부터!”
“네, 마님. 힘내세요!”
“가벼운 항아리 모아 둔 곳부터 가시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긴 했지만, 악행이라는 말을 듣고도 앤시아를 바라보는 하녀들의 시선은 따뜻했다. 이 두 사람이야 원래 앤시아를 좋게 보고 있으니 어설픈 악행을 저질러 봤자 뒷이야기가 나오기 힘들었다.
기대했던 것은 로사와의 일이었다. 작은 전쟁을 각오했던 앤시아는 정작 악의적인 소문 한 자락 들려오지 않는 것에 의아했다. 이대로 잠잠하다면 앤시아에게 호의를 보이는 하녀나 요리장을 괴롭혀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앤시아에게 악의를 가진 로사와 싸우는 편이 훨씬 더 마음 편했다.
아무래도 직접 로사와 부딪치며 공작가 안에서의 앤시아에 대한 악명을 부풀려야 할 것 같았다.
“가벼운 접시도 따로 챙겨 놨습니다, 마님.”
“아니. 나 참견하러 갈 거야.”
결심했으니 곧장 실천할 생각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기다렸다는 듯 둘의 손에 옷이 갈아입혀진 앤시아는 곧장 시녀장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다시 봐도 황당할 만큼 견고하고 화려한 로사의 집무실에 들어서니 집사장까지 함께 있었다.
“주인마님, 저희를 부르시지 않고 이곳까지 직접 걸음 하시다니요.”
한동안 방에만 머물렀던 앤시아를 알고 있기에 집사장은 안쓰러운 듯 다가왔으나 시녀장은 마치 뒤늦게 알아챈 듯 마지못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인사라기에는 부족했으나 꼬투리 잡기에는 어려웠다.
앤시아는 곧장 안으로 걸어가 로사가 일어난 덕에 빈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냉큼 걸터앉았다.
황당해하는 로사를 향해 턱을 치켜들며 앤시아는 뻔뻔하게 굴었다.
“왜? 뭐? 내가 공작 부인인데 좀 앉으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