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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41화 (41/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41화.

“마님, 오늘은 더 쉬시는 게 어떨까요? 내일 더 많이 구매하실 수 있도록 최대한 마담을 초대하겠습니다.”

“아니. 결심한 건 바로 해 버려야 해.”

나갈래. 나간다고.

지금 이 기세로 달려 나가야 공작가 돈을 물 쓰듯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마차에서 조금 체력이 깎여 나가겠지만, 쉬엄쉬엄 다니면 될 일이었다.

저택 안에서 다리가 퉁퉁 붓도록 로사를 쫓아다니며 참견질 해봤자 돌아오는 반응이 너무 약했다. 돈이라도 팍팍 쓰면서 사치스런 공작 부인 노릇을 하는 편이 반응이 더 나을 듯싶었다.

그렇게 결심하고 말리는 하녀와 호위를 데리고 중심가로 나왔으나 역시나 회색빛의 건물들이 소비 욕구를 위축시키다 못해 날려 버렸다.

“후우. 진짜 돈을 쓰려 해도 쓸만한 구석이 없잖아.”

“마님 취향에 맞는 천이나 물건을 주문하시면 어떨까요?”

“하긴, 있는 걸 맞추는 게 아니라 내 취향의 천을 주문해서 제작하면 되는 거구나.”

항상 백작 부인과 물건을 고를 뿐, 직접 구입해 본 적은 없어 주문 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앤시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맞아. 주문 제작이라면 제대로 비쌀 텐데. 좋은 생각이야.”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고 차후 날을 잡아 사람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왕 나왔으니까 바로 주문하러 갈래.”

활짝 웃는 앤시아를 보며 줄리는 공작 부인이라면 직접 물건을 사러 다니지 않는다는 말을 꾹삼켰다. 이런 자유분방한 행동이 천진한 앤시아와 어울렸다. 어차피 공작가에 시집온 이상 앤시아는 그에 맞게 변해 갈 것이다.

줄리와 엘리는 지금만이라도 천진한 마님을 모시는 걸 다행으로 여기자 마음먹고, 이내 적극적으로 앤시아의 곁에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의상과 어울리는 보석도 보러 가시겠습니까?”

“응, 시간 되면 보러 갈래.”

“레이스는 디자인을 따로 주문하실 수도 있어요.”

“그것도 좋겠어. 오늘 하루 바쁘겠는걸. 두 사람이 잘 데리고 다녀 줘야 해.”

“물론입니다.”

“맡겨 주세요, 마님.”

드디어 기운이 난 주인을 보는 하녀의 눈에 안도의 기색이 어렸다.

그윈티드 영지 중심가의 의상실은 언제나와 같이 한산했다.

“오늘도 한가하구나.”

“단골분들께 보낼 초대장을 준비할까요?”

“아니. 한가해서 좋다는 뜻이었어. 차를 한 잔 더 다오.”

의상실 주인인 젊은 미망인 이브는 여느 때처럼 조용한 가게에서 종업원이자 하녀인 소녀와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이미 겨울 신작 드레스는 전부 완성되어 전시해 두었고 내년 봄을 위한 의상 디자인 역시 올해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예정이라 한가 했다.

오후에도 손님이 없으면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볼까 고민하던 이브는 문에 달아 놓은 방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다른 의상실은 일부러 점원을 입구에 세워 두었다가 손님이 들어오기 전 미리 문을 열고 맞이 하나 형편이 넉넉한 이브는 그렇게까지 굽히며 장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어서 오세요. 마담 이브의 의상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하루에 몇 번 열릴까 말까 한 문이 열리자 주인인 이브보다 하녀가 먼저 빠르게 반응했다.

활짝 열린 문으로 공작가 하녀복을 입은 두 여인이 들어섰다.

며칠 전에 방문한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매와 같은 눈썰미로 튼튼한 옷감으로 지어진 드레스를 바느질 상태까지 꼼꼼히 확인해 순식간에 골라 흥정도 없이 구매해 갔었다. 구경만 하거나 예약을 걸어 두는 경우가 대다수이기에 제법 괜찮은 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공작가 하녀라 한들 평민인 그녀들이 며칠 만에 다시 드레스를 구매하러 왔을 리는 없었다. 이런 경우 반품이나 뒤늦은 하자에 대한 에누리를 원하는 진상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오랜만의 쿨거래가 이렇게 깨어지는가 싶으면서도, 익숙한 일이었기에 이브는 마음을 다잡았다.

소소한 실랑이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기에 이브의 안색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웬만하면 몇 푼 정도는 내어 줄생각으로 차분히 몸을 일으켜 돌아서니 안정감 있는 그레이톤으로 꾸민 실내에 빛 폭탄이 떨어진 것 같은 충격적인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부시죠. 너무도 아름답죠.

머릿속에 떠오른 알 수 없는 가사에 이브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활짝 열린 문틈으로 찬바람이 쌩쌩 불어닥치는데도 소녀의 존재만으로 봄이 온 듯 공기가 온 화해졌다.

“그윈티드 공작 부인이십니다.”

이브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자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와 양쪽으로 선 하녀들이 사랑스럽다 못해 고귀해 보이는 소녀의 신분을 알렸다.

“환…… 영합니다.”

이브는 거의 기계적으로 몸에 밴 자세를 만들며 인사를 건넸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북부로 시집와 일찍이 남편을 떠나보내고 의상실을 차린 후 단 한 벌도 팔리지 않아 창고에 처박혀야 했던 화사하고 밝은 색상의 드레스들이 순식간에 공작 부인에게 겹치는 환상을 보았다.

보관해서 뭐 하랴 싶어 천이나마 건질 생각으로 조각내어 액세서리나 만들 예정이었기에 적당히 쌓아 둔 것들이었다. 이런 천운이 날아들 줄 알았다면 잘 보관해 둘 것을. 뒤늦은 후회가 이브의 심장을 조여 왔다.

“들어가도 될까요?”

목소리조차 레몬 사탕을 녹인 듯 상큼하고 달달해 이브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북부의 여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익숙해진 잿빛 세상 속 평온하기만 했던 이브의 심장이 방정맞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마담?”

“어서, 안으로 모시지 않고, 빨리, 놓치면 안, 흡.”

모두가 당황한 사이에도 앤시아만은 상큼 발랄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가끔 예술 계통 종사자 중에 앤시아를 보고 지나칠 정도로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그렇기에 이브의 호흡곤란이라도 일으킬 것 같은 과격한 반응에도 앤시아는 차분히 종업원이 안내하는 소파로 향할 뿐이었다.

드레스를 살짝 들며 몸을 반쯤 회전시켜 소파에 앉는 평범한 행동만으로도, 이브는 심장 위에 얹은 손이 바르르 떨릴 만큼 격한 반응을 보였다.

예전, 앤시아의 맞춤 드레스를 위해 백작가를 방문한 젊은 디자 이너도 저런 식으로 과도한 감정을 주체 못 했었다.

“차를, 아니, 다과를, 다, 달콤한 거로.”

과호흡 증상까지 보이는 의상실 주인을 보며 앤시아는 익숙하다는 듯 부채를 들어 얼굴을 반쯤 가렸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던 사랑스러움과 성스러운 빛이 줄어들자 이브의 호흡이 돌아왔다.

“마담이 불편하다면 이대로 나갈 수도 있어요.”

“아, 아닙니다!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시나요?! 날마다라도 방문해 주세요. 아니, 언제든 불러만 주시면 달려가겠습니다.”

종업원인 하녀는 항상 침착하다 못해 다소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던 주인 이브의 흥분한 모습에 놀라면서도 재깍 새로운 찻잔과다과를 준비했다.

앤시아가 찻잔을 들기 위해 부채를 내려놓자 이브의 시선이 따라 내려갔다.

“손끝조차 어쩜 저리 사랑스러우신지. 동부에서 유행하는 레이 스를 손목과 손등에 배치하고 천은 이번에 수입한…….”

“주인님, 손님이 앞에 계십니다.”

하녀의 속삭임에 이브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환한 웃음을 짓는 앤시아를 보며 이브는 디자인 북을 탈탈 털어서라도 공작 부인에게 어울릴 드레스를 찾아내겠노라 다짐했다.

이미 앤시아는 의상실에 들어서는 순간 걸려 있는 드레스들의 한 톤 다운된 색감을 보며 구매욕을 싹 지운 상태였다. 애초에 없는 걸 주문하러 들어왔을 뿐이었다. 의상실 주인의 격렬한 환대를 보아 웬만한 주문은 쉽게 이루어질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앤시아가 쉼 없이 쏟아내 놓는 색상과 부드럽고 가벼운 질감의 천은 샘플조차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브는 한 글자라도 잊을까 열심히 앤시아의 주문을 받아 적었다.

싫은 기색은커녕 눈까지 빛내며 주문서를 마지막 줄까지 꽉꽉 채워 가는 이브에게선 사명감마저 느껴졌다. 앤시아는 살짝 미안한 기색을 섞어 약간 풀 죽은 티를 냈다.

“너무 많이 주문했나……. 구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대부분 동부 쪽에서 들일 수 있을 듯하니 발주를 넣으면 한 달 정도면 모두 준비할 수 있을 듯합니다.”

“좋네요.”

앤시아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이브 덕에 주문서 작성은 순식간에 끝났다.

망설임 없이 종업원이 내민 계산서에 사인했고 이브는 감격한 듯 연신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러운 큰돈이 들어온 것에 대한 기쁨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앤시아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들뜨게 한 듯 보였다.

의상실 주인의 반응을 보니 웬만하면 앤시아에게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북부에서도 구할 수 있을 듯했다.

예상보다 일찍 의상실을 나선 앤시아는 이제 어디로 가서 돈을 쓸지 고민에 빠졌다.

첫 방문에 백 골드 넘는 지출을 했음에도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다니. 허공에 돈을 뿌린 것처럼 큰일을 해냈기에 뿌듯해졌다.

“그럼 이제 뭘 할까나.”

성공적인 돈지랄의 시작이었다.

죽죽 달릴 의욕이 샘솟았다.

약간 출출하기도 하니 식당에 가서 메뉴판에 있는 걸 전부 달라고 해 볼까 고민하는 사이, 골목 사이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북부에 아는 얼굴이 있을 리 없다 생각하는데, 불현듯 며칠 전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얼마 전 외출했을 때 마주쳤던 아이들이었다. 그때는 마르고 어디 아픈 게 아닌가 싶더니 며칠 사이 뺨이며 작은 손에 약간 살이 오른 듯 보였다.

역시 아이들은 통통해야지.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처음 봤을 때 돌보는 부모조차 없어 보였던 비루한 행색 대신 깨끗하고 살이 오른 얼굴이 보기 좋았다.

“그때 그 애들인가? 살이 좀 오르니 보기 좋…….”

평범하게 감상을 말하려던 앤시아는 자신에게 향해진 줄리의 흐뭇해하는 시선에 재빨리 말을 바꿨다.

“보기 좋…… 긴 무슨! 아직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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