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42화.
일단 긍정적인 표현이 아닌 다른 말을 내뱉기는 했는데 이게 패악 같지도 않고 애매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트집을 잡자니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어차피 돈을 쓰러 나온 게 목적이니 그에 맞춰 행동하고자 마음먹었다.
“정말이지 이거밖에 못 하니?
이리해서는 공작가 금고 벽도 못긁겠어.”
“금고 벽을 왜…….”
“돈 좀 쓰라고 했더니 이게 뭐니? 풀떼기만 사서 먹이는 거 아냐? 고기를 사야지.”
“아, 아닙니다. 충분히 고기도 먹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채소를 먹지 않으려 해서 섞어서 주고 있습니다.”
“설마 애들도 그 질긴 걸 그냥 먹니?”
앗, 이건 너무 신경 쓰는 티를 내 버린 거려나?
“알아서 해. 난 관심 없으니까.”
“안 그래도 지금 아이들 식사시간인데 마님도 함께하시겠습니까?”
“저기, 나 방금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니?”
줄리의 시선이 어째서인지 더 부드러워졌다. 엘리까지 나서서 안내하듯 앞서가니 살짝 궁금하기도 하고, 돈을 어떻게 쓴 건지구경도 좀 할 겸 뒤를 따랐다.
얼마 가지 않아 제법 넓은 마당이 딸린 여관 앞에 도착했다. 중심가 주변으로 반듯하게 서 있던 온통 회색뿐인 건물들과 달리 벽돌과 진흙, 나무가 섞여 제멋대로 지어진 여관은 보기에도 참 위태로워 보였다.
이걸 삼 층으로 짓다니. 안전 불감증은 어디든 존재하는구나 싶으면서도, 그래도 마당에 자리 잡은 커다란 솥과 그 앞에 놓인 낡은 테이블은 나름 구색을 갖춘 듯 보였다.
긴 테이블에 줄줄이 앉아 수프를 먹고 있는 아이들을 지켜보니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앤시아가 의도치 않은 장면임에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작은 아이들이 커다란 그릇에 얼굴을 파묻을 기세로 열심히 스푼을 움직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귀여워 보여 가슴 안에서부터 푸근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아이들을 구박하고 돌아왔던 날, 실은 계속 신경 쓰였다.
굳이 평민들에게까지 악녀라 들을 필요는 없었는데 괜히 오버했던 건 아닌가 마음이 좋지 않았었다. 이렇게 하녀들이 제멋대로 해석해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는 현장을 확인하니 오히려 잘됐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어차피 애들 먹이는 돈은 푼돈이기도 했고 이 정도 작은 선행정도야 앤시아가 열심히 쌓을 악행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애들한테는 그냥 잘해 주자 마음을 결정하니 고소한 수프 냄새가 신경 쓰였다.
‘북부 고기가 들었을 텐데 잘먹네. 애들 거라 다른 고기를 써서 부드럽나?’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앤시아가 아직 수프가 반 이상 남아 있는 커다란 솥을 유심히 바라보자 눈치 빠른 줄리는 새로 뜬 수프 한 그릇을 가져왔다.
“입맛에 맞지 않으시겠지만, 조금 드셔 보시겠어요?”
“그래. 조금이라면.”
줄리가 들고 있는 그릇에 그대로 손을 뻗었다. 투박한 그릇에 담겨 있는 나무 스푼의 위생 상태는 굳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망설임 없이 한 입 떠먹었다.
아무리 맛보기라도 서서 떠먹는 행동은 귀족답지 않았으나 앤시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켜보는 두 하녀 역시 천진한 소녀를 바라보듯 푸근한 눈이었다. 아이들 역시 인형처럼 차려 입은 귀족 소녀 앤시아가 자신들이 먹는 수프를 먹자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시선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정말 부드러우면 무슨 고기인지 물어볼 생각으로 입 안에 들어온 고기를 가볍게 씹던 앤시아는 그대로 멈춰 버렸다.
굳어 버린 앤시아의 반응에 줄리는 재빨리 그릇을 내려놓고 손수건을 꺼냈다.
“뱉으셔도 됩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마님의 아름다운 마음은 모두 알고 있으니까요.”
“입맛에 안 맞으시죠? 죄송해요. 그래도 마님께서 도와주신 덕에 아이들이 매일 푸짐하게 고기를 먹고 기운을 낼 수 있게 됐어요.”
줄리와 엘리는 번갈아 가며 앤시아의 말 한마디 덕에 아이들의 환경이 좋아진 걸 알리려 했다.
정작 미담의 주인공이자 당사자인 앤시아는 이가 욱신거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간신히 줄리의 손에 들린 손수 건에 질긴 고기를 뱉은 앤시아는 턱을 살살 만지며 맛있게 수프를 떠먹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 이 나가는 줄 알았네. 이걸 어떻게 씹어 먹는 거지?’
전투적으로 수프에 든 건더기를 떠먹는 아이들이 소문으로만 들어온 강인한 마수로 보일 지경이었다.
저거 봐, 저거. 방금 내가 뱉은 것보다 세 배는 큰 고기인데 막 뜯어 먹잖아.”
한 번 씹은 것만으로도 잇몸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저걸 어떻게 뜯는 거야? 북부는 유치부터 강인하게 나나?’
북부에서 살아가려면 어린아이라도 이 정도 고깃덩어리는 씹고 뜯을 줄 알아야 한다는 건가.
고기의 출처나 종류에 대해 굳이 캐물을 것도 없이 앤시아는 뒤돌아섰다.
아이들 모두 새 옷을 입고 있었고 며칠 사이 살이 오를 만큼 넉넉한 식사가 유지되고 있으니 앤시아가 참견할 이유는 없었다.
줄리와 엘리 역시 그런 앤시아를 쫓아 아이들에게 등을 돌렸다. 익숙한 두 하녀가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갑자기 돌아가자 의아해하던 아이들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피리 부는 남자도 아니고 아이들을 줄줄 달고 가자니 이건 아니다 싶어 뒤를 돌아보던 앤시아는 아이들이 속살거리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우리 꽃 따러 갈까?”
“응. 길도 다 메꿔서 할 것도 없으니까.”
“나도 갈래. 심심하단 말이야.”
심심해서 꽃을 따러 간다고? 아마 아무도 안 사 갈 그 꽃을?
“팔리긴 하니? 그 꽃들, 하루에 한 번은 팔려?”
기가 막힌 소리에 앤시아는 참지 못하고 아이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아이들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껏 새 옷을 입고도 무릎이나 소매에 흙이나 풀물이 잔뜩 배어 있다싶더니 이유가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줄리와 엘리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애들한테 장난감이라도 사서 쥐여 줘.”
“네? 그런 데까지 돈을 써도 될까요?”
“응. 그런 거니까 막 써도 돼.
장난감 가게 하나를 털어도 오늘 내가 주문한 천 한 필 값도 안될걸.”
“그건 아닙니다, 마님.”
“생각보다 고급품이 많아서요.”
앤시아의 예상과 달리 중심가라 그런지 장난감인데도 고가품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는데 막상 두 사람은 앤시아의 허락에도 좀처럼 나서지 못했다.
답답해진 앤시아는 아이들을 향해 여관으로 돌아가라는 듯 손짓했다.
“너희들, 여관에 돌아가 있으면 여기 언니랑 누나가 장난감 사서를 선물로 준다니 그냥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나무토막에 고무줄을 묶은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좀 고급스러운 걸 보고 싶은데.”
오늘의 난 과소비가 목적이라서.
뒷말하지 않았음에도 눈치 빠른 두 하녀는 다시 중심가로 앤시아를 이끌었다.
조금 다리가 피곤해지겠다 싶을 때 도착한 새로운 가게는 생각보다 화려했다.
오히려 의상실을 이렇게 꾸며야 했던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외부에서 볼 수 있는 유리창과 다양한 장난감들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진열돼 있었다. 그러면서도 대로변보다는 약간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 오가는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아이를 데리고 나온 어른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도 계획은 좋았으나 현지와 맞지 않은 판매 방식인 듯 보였다. 그렇다 한들 중심가에 가깝게 가게를 낸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재력가의 가게였다.
앤시아는 안으로 들어가기 전이 돈 많은 가게 주인이 거금을 투자했음이 분명한 유리창을 차분히 둘러보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장난감 외에도 오르골이나 보석함 같은 여성이 좋아할 만한 물품도 제법 보였다.
“아, 오르골 하면 안 좋은 추억이 있는데. 아니, 아직 안 생겼으니 추억은 아니고 예정이라고 해야 하려나.”
“마님, 오르골은 추억을 보관하기에 좋습니다.”
“안 좋은 추억이라면 태워 버리면 돼요.”
앤시아의 뜻 모를 말에도 하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이렇게 아이쇼핑을 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유리창 너머의 물건 구경에 푹 빠졌다.
“저건 아이들에게 사다 주고 이건 백작 부인에게 선물로 보내고, 아, 그냥 다 사 버릴까.”
앤시아가 고민에 빠진 사이 뒤에서 지켜보던 두 하녀 중 엘리 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줄리를 잡아당겼다.
“줄리, 잠깐만.”
앤시아를 조용히 지켜보던 줄리는 갑작스러운 엘리의 부름에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엘리의 손가락이 한쪽을 가리키며 발을 동동 구르기에 줄리는 의아해하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보게 된 뜻밖의 장면에 줄리는 황급히 엘리의 등을 밀며 앤시아의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혹여나 앤시아가 뒤돌더라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하려는 듯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응? 왜? 너희도 가지고 싶은 게 있니? 골라 보렴. 재밌는 가게에 데려와 준 보답이니.”
“앗, 그럼 전 보석함 안에 놓인 브로치……. 아, 아니에요. 마님, 더 구경하셔야죠. 더 꼼꼼히 보세요.”
“마님, 감사합니다. 이런 귀한 기회를 주신다니 저희 역시 꼼꼼히 보고 싶습니다.”
분명 줄리의 손이 빠르게 엘리의 옆구리를 찌르고 빠져나가는 걸 앤시아가 봤는데도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다른 소리를 했다.
새싹을 품은 듯한 앤시아의 녹안이 가늘어진 눈꺼풀 사이로 집어졌다.
“흐음. 뭐야? 너무 대놓고 수상하니까 모른 척할 수가 없잖아.”
“마님, 저는 저 안쪽에 있는 물건이 좋아 보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져가기 전에 어서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항상 침착하기만 하던 줄리에게서 다급하면서도 애써 침착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몇 걸음 떨어져 선 호위 기사를 힐끗 확인하니 그는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으로 주변을 차분히 살피고 있었다. 딱히 위험 요소가 주변에 있는 건 아니라는 뜻.
하녀들의 필사적인 행동이 기특하기는 하나 호기심이 앞섰다.
“비켜서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