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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43화 (43/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43화.

이곳이 백작가였다면 앤시아는 순수함을 가득 담은 천진한 눈으로 살짝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그 윈티드 공작가의 영지였고 앤시아가 온 힘을 다해 사랑받아야 하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앤시아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은 채 몸을 쓰기보다 가볍게 지시했다.

머뭇거리던 줄리와 엘리는 앤시아가 한 걸음 다가서자 어쩔 수 없이 양옆으로 비켜섰다.

환하게 트인 곳에는 이렇다 할 특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거리에 낯선 얼굴의 사람들이 각자 제 갈 길을 가고 있었기에 앤시아는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가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줄리와 엘리,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작게 흘렸다.

“대체 뭘 봤길래 그런 거야?”

앤시아가 대놓고 물어볼 줄 몰랐는지 엘리는 놀라 딸꾹질을 했다. 엘리가 저렇게까지 놀라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공작과 단둘이 어딘가로 가야 한다고 착각했을 때. 그리고 두 번 째인 지금.

어째서 저렇게 놀라는 걸까.

“마, 마님!”

어째서 앤시아를 다급히 부르면서도 목소리를 죽이는 걸까.

두 사람이 막아섰던 방향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 나가는 앤시아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금세다다른 골목길 끝은 양 갈래로 나뉘었으나 헤맬 일은 없었다.

시야가 닿는 곳에 어째서 지금 이 타이밍에 이곳에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존재, 리샤르그윈티드가 낯선 여인과 함께 서 있었다.

지금쯤이면 숲에서 마수의 피를 뒤집어쓴 채 광인처럼 날뛰고 있어야 했다. 하루 만에 마수 토벌을 끝내고 돌아왔을 린 없었다.

얼핏 보기에도 그럴싸한 옷차림으로 골목길 안쪽에서 여인과 찰싹 달라붙어 있는 공작과 묘령의 여인이라니. 흔한 갈색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흔들리며 뒷모습만 보이는데도 미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여인의 손을 감싼 채 유심히 들여다보는 새파란 눈이 신중했다.

저런 다정한 모습이라면 하녀들이 필사적으로 앤시아의 눈을 가린 게 이해가 됐다.

기사들을 이끌고 떠났으니 분명 토벌을 간 건 맞을 것이다. 예상보다 일찍 돌아왔다 한들 어째서 여인과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실은 마수 토벌은 기사들에게 맡기고 리샤르는 늘 이런 식으로 다른 여인을 만나고 다녔던 걸까.

‘아니, 대체 마수 사냥은 언제하고! 어! 영지 자금은 언제 벌건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으나 앤시아의 행동이나 얼굴에는 조급함 대신 가볍고 사랑스러운 웃음만이 보였다. 상냥한 웃음을 머금은 채 리샤르와 마주 선 여인을 꼼꼼히 살폈다.

여인의 옷차림은 허름하니 평민여성이 주로 입는 간단한 드레스였다. 온통 평범한 뒷모습일 뿐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끌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포실해 보이는 밝은 갈색 머리였다.

보기 좋은 정도로 구불구불한 곱슬머리는 리샤르를 향해 움직일 때마다 고데기로 멋을 낸 것처럼 풍성하게 흔들렸다.

마치 지나가는 모든 이들을 엑스트라로 만들어 버릴 듯한 존재감에 앤시아는 합리적인 의심을 떠올렸다.

뒷모습만으로도 저 정도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 존재라면 딱 한 명뿐이리라.

“공작님.”

앤시아의 가벼우면서도 밝은 목소리가 흔들림 없이 골목길 안에 퍼져 나갔다.

“부인?”

리샤르의 부름에 앤시아는 기쁨과 반가움이 드러난 얼굴로 웃음을 보였다.

그와 동시에 뒷모습만 보이던 갈색 머리의 여인도 고개를 돌리며 뒤돌아섰다.

예상대로 리샤르와 함께 서 있던 여인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었다. 앤시아와 닮은 녹안은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반짝였고 햇볕에 탄 듯한 건강한 팔과 달리 얼굴은 하얀 편이었다.

“앗, 이분이 공작 부인이시군요! 미천한 이가 그윈티드 공작부인께 인사드립니다.”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발랄함과 하얀 이가 드러날 만큼 밝은 웃음은 첫눈에 호감을 느낄만큼 예뻤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 저렇게 예쁘다니.

낡은 드레스조차 그녀의 풍부한 몸매를 감추지 못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명랑한 성격을 가진 여인은 앤시아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이름을 떠오르게 했다.

“비앙카입니다. 평민이라 성은 없어요.”

원작의 진짜 여주인공이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앤시아는 가슴 안쪽이 벅차오를 만큼 감동했다. 첫 만남의 장소가 바뀐 점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원작대로 진행되는 듯해 기뻤다.

앤시아의 환한 웃음에 비앙카역시 마주 웃었다.

정작 리샤르는 앤시아가 자신이 아닌 여인에게 집중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자신을 비앙카라 소개한 여인이 앤시아에게 살랑거리며 다가가는 행동 역시 언짢게 느껴졌다.

리샤르는 저택을 떠나는 순간부터 이상할 정도로 불안한 마음에 잠시도 쉬지 못했다.

지난밤, 마수의 숲에 도착하자마자 밤낮없이 내달리며 마수가 보이는 족족 검을 찔러 넣었다.

덕분에 죽어나는 건 밤이면 효율을 생각해 쉬어야 한다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낮이나 밤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정확하게 마수의 심장을 꿰뚫는 공작의 뒤를 쫓으며 불만 한마디 꺼낼 수 없었다.

그렇게 만 하루가 지나고 난 뒤 의뢰된 마수 절반을 해치웠음을 확인했다. 일주일 이상 걸릴 일을 하루 만에 해치운 리샤르는 남은 절반은 기사들에게 맡기고 곧장 그윈티드 영지로 돌아왔다.

멀리 저택이 눈에 들어오자 리샤르는 밤새 한시도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게 한 정체를 알 수 없던 불안한 감정이 사그라지는 걸 느꼈다.

영문 모를 불안감이 가시자 그제야 역한 비린내가 나는 마수의 피를 뒤집어쓴 제 몰골이 신경쓰였다. 피 냄새를 풍기며 귀가 하는 일은 그윈티드 공작이라면 익숙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오늘은 유달리 신경 쓰였다.

리샤르가 옷을 갈아입은 건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가까운 상점에 들러 옷을 파는 곳에서 찬물을 뒤집어써 피를 닦아 내고 적당히 몸에 맞는 옷을 샀다.

깨끗해졌으니 놀라지 않을 것이다.

평소와 다른 리샤르의 행동은 자각하지 못했을 뿐 다 한 사람만을 위해서였다.

빠르게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리샤르의 눈에 유리창 안의 잡동사니들이 들어왔다. 평소라면 관심조차 두지 않을 자질구레한 것들인데 며칠 전 나단이 산더미처럼 가져온 혼수품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소백작이 가져온 물품 중 큼직한 선물도 많았으나 가게에 놓인 것처럼 소소하고 반짝거리는 작은 것들도 여럿 보였다.

새로 꾸며진 앤시아의 방에도장난감처럼 보이는 자잘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아내는 자신과 닮은 걸 좋아하는 건가.’

작고 귀여운 생물이 저와 닮은 걸 모으는 건 응원하고 싶어질만큼 사랑스러웠다. 비록 그게 예쁘기만 하고 쓸모없는 잡동사니라고 해도. 이 모순적인 마음이 어느새 리샤르의 걸음을 가게 안으로 이끌었다.

“어서 오세요, 꿈과 환상의 세계로 모시겠…… 고, 고, 공작님!”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던 가게 주인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놀라며 허둥지둥 허리를 숙였다. 이런 반응은 앞서 옷을 사기 위해 들렀던 가게 주인과 비슷했다. 어딜 가든 이러기에 리샤르는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나단을 흉내 내는 것 같아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아내를 위한 선물 하나 정도는 챙겨 가자 싶었다. 뭐든 사 갈 생각으로 가게 안을 빠르게 확인했으나 대부분이 비슷하게 약하고 쓸모없어 보였다.

직접 물건을 사러 나선 기억이라고 해 봤자 까마득하게 어린 시절 충동적으로 무기점에 들렀을 때 정도였다. 그때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걸 고르면 그만이었다.

그에 비해 이곳에 있는 자잘한 물건들은 손으로 쥐면 죄다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영 고를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아 도로 나가려던 리샤르는 한쪽 구석에 망부석처럼 서 있는 여인을 보고 멈춰섰다.

들어올 때부터 작은 상자 두 개를 들고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리샤르가 나가는 순간까지도 꼼짝하지 않을 만큼 깊게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내인 앤시아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기에 리샤르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곁으로 다가섰다.

“손에 든 걸 사지 않겠다면 내가 가져가지.”

이토록 한참 들여다볼 만큼 여인이 탐낼 물건이라면 아내도 좋아하겠지.

그것이 리샤르의 단순한 사고방식이었다.

복장을 보아 평민이었고 모르긴 몰라도 진품 보석이 붙어 있는 오르골을 두 개나 살 만큼 넉넉한 형편일 리 없었다.

리샤르가 하나를 집자 미동도 없던 여인이 냉큼 입을 열었다.

“그건 오르골 아래 보석함이 달렸어요. 하나를 사도 두 가지 효과가 있는 거죠. 제가 들고 있는 건 장식 인형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라 보는 재미가 있고요.”

리샤르만 보면 허둥지둥하는 가게 주인들과 달리 갈색 머리의 여인은 눈이 마주치고도 태연하게 오르골에 대해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더니 작은 도자기 인형이 천천히 돌고 있는 오르골을 리샤르에게 내밀었다.

“공작님이 선물하시려는 분은 귀족이시겠죠? 그럼 가성비보다 보기 좋은 걸 택하시는 게 나아요. 이쪽이 더 좋을 거예요.”

재잘재잘 말을 걸어오는 여인을 보고 있자니 그녀의 눈동자가 아내와 비슷한 색임을 알아챘다.

리샤르가 떠올린 앤시아의 녹안은 무척 부드러웠다. 막 피어난 새싹처럼 여린 녹색 눈은 서늘하고 무섭다는 리샤르의 파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앤시아를 떠올리니 또다시 조급한 마음이 들어 초조해졌다. 중요한 걸 두고 온 것처럼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직접 두 눈으로 보면 안심할 수 있으리라. 그것이 무엇이든.

리샤르는 여인이 들고 있던 오르골 두 개를 모두 계산했다.

“앗, 그거 제가 고른 건데요.”

당황했음에도 살짝 억울함이 담긴 여인의 말투에 리샤르는 계산한 오르골 중에서 가성비가 좋다고 평가된 쪽을 건네주었다.

“조언해 준 값은 치르지.”

“네?”

순식간에 가게 밖으로 나가 버린 리샤르를 쫓아 갈색 머리의 여인이 뛰어나갔다. 리샤르는 멀찌감치 골목 사이로 사라지려던 차였다.

“잠깐만요! 고작 몇 마디 한 거로 이런 비싼 걸 받을 순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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