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44화 (44/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44화.

“발이 제법 빠르군.”

“저희 마을이 산 중턱에 있다 보니 체력 하나는 자신 있어요.

앗, 그보다 이건 받을 수 없어요.”

“아내를 위한 선물을 고르는 데 도움을 준 대가다.”

“어머, 아내라면 공작 부인께드릴 선물이었던 거예요? 우와, 로맨틱하세요!”

감탄하면서도 여인은 손에 쥐여 준 오르골을 리샤르의 팔에 얹었다.

“가져가세요. 공작님이 계산하신 거니 둘 다 선물로 주시면 되죠.”

앤시아에게 줄 오르골은 하나로 충분했다. 이것 말고도 아내에게 줄 것들은 저택에 차고 넘쳤다.

지금처럼 공작인 자신이 가게에 방문하지 않아도 말 한마디면 가게 안의 모든 오르골을 저택 안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귀찮군.”

거절하기만 하는 평민 여인의 태도에 리샤르는 다소 귀찮아졌다.

자신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태연하게 말을 걸어오는 평민이기에 신선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아내에게 돌아가는 길이 지체되는 것에 짜증이 일 뿐이었다.

팔에 얹어진 다른 오르골을 떨쳐 낼 듯이 팔을 내리자 여인이 놀라 오르골과 팔을 붙잡았다.

참으로 귀찮구나 싶으면서도 여인의 손에서 미끄러지는 오르골을 잡아 주던 리샤르는 멀찍이서 제게 향해진 시선을 느끼고 눈만 움직여 상대를 확인했다.

당황한 하녀와 공작가 문양이 새겨진 검집에 망토를 두른 호위기사의 존재보다도 그들에게 가려져 머리꼭지만 살짝 보이는 앤시아의 존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하녀들이 다급히 앤시아를 가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불쾌했다. 아내를 감춘 이들의 행동에 리샤르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오르골에 금이 갔다.

여전히 리샤르의 팔과 오르골에 손을 대고 있던 여인이 아깝다며 작게 투덜거렸다. 용케도 앤시아에게 선물할 오르골을 든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별개로 어느새 자신을 향해 오롯이 서 있는 자그마한 여인, 앤시아와 마주선 리샤르는 조금 전까지 걸음을 재촉하던 초조함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공작님.”

앤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리샤르를 부르는 소리는 가벼우면서도 청량했다.

순수한 반가움이라기보다 약간의 의아함이 담겨 있는 앤시아의 부름에 리샤르는 기분 좋은 감각과 함께 어딘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그 불편함이 무언지 고민하는 사이 갈색 머리 여인이 앤시아를 향해 인사를 하고 자신의 이름이 비앙카라며 겁 없이 친근감을 드러냈다.

“비앙카입니다. 평민이라 성은 없어요.”

갈색 머리 미인, 비앙카를 보는 앤시아의 머릿속은 단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왜 네가 벌써 나와?’

공작의 첫사랑이 될 여인.

제 존재감을 연신 뿜어내는 여주인공의 등장에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반문할 뻔했다.

리샤르와 비앙카가 함께하는 자리를 목격하게 된 게 혼란스러웠다.

원작 여주인공인 비앙카는 최소한 두세 달 후에 등장해야 했다.

공작 부인이 된 앤시아에 대해 공작가 사용인들의 불만이 쌓일대로 쌓인 후 밝고 선량한 비앙카의 존재에 모두 호감을 느끼는 게 앞으로의 흐름이었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마수 토벌로 정신없어야 할 시기에 남주인공인 공작이 영지에 나타난 것도 당황스러운데 여주인공인 비앙카마저 일찍 등장해 버렸다.

잠시나마 당황했던 앤시아는 일단 웃음을 보였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원작대로였다면 틀어박힌 앤시아를 위해 외부에서 들여온 새로운 하녀, 비앙카가 공작가 저택에 머무는 식이었다. 같은 집에 있어야 공작과도 자주 부딪히고 친밀도가 높아질 수 있었다.

그래야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더라도 이혼을 요구할 만큼 공작과 비앙카의 사이가 가까워질 것이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만큼 앤시아가 백작가로 돌아갈 날도 빨라질 터.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싶지만.’

마음 같아서는 ‘웰컴 투’를 외치며 비앙카를 공작가로 모셔 가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가까이 붙어 서 있는 게 꽤나 자연스러워 보여서, 마치 공작 부인이 공작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듯한 현 상황에서 앤시아가 취할 행동으로는 부적절했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평민 여성과 지나치게 친밀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는 공작. 두 사람을 마주한 공작 부인으로서 적당한 처신을 떠올리기 위해 일단 미소부터 띄운 채 머리를 굴렸다.

하녀들이 숨을 삼킨 채 미동도 못 하는 사이 앤시아는 아무렇지 않게 리샤르와 비앙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인사를 나눠야 할까요?”

순진함을 섞은 귀족적인 행동이었다.

비앙카를 향해 다가서던 앤시아의 시선이 리샤르에게로 향했다.

여기서 비앙카를 정식으로 부인인 앤시아에게 소개해 줄 의향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뻔뻔하게 비앙카를 정부라고 소개한다면 앤시아는 눈물을 흘리거나 비앙카를 향해 경계심을 드러내며 점수를 깎아 먹을 생각이었다. 본디 사랑이란 방해하는 이가 있으면 불타오르는 법. 그 방해가 미미하면 적당한 자극 정도가 될 것이다.

나름대로 계산을 끝내고 차분히 질문한 앤시아와 달리 리샤르의 푸른 눈은 미약하게 흔들릴 뿐, 답을 하지 못했다. 정작 앞으로 나선 건 발랄함으로 무장한 비앙카였다.

“미천한 저에게 인사라니요. 정말 기뻐요.”

고작 인사 한 번에 보이기엔 과한 반응이었다.

애써 칭찬하려 드는 느낌인 건, 착각일까?

앤시아의 의문 섞인 눈을 마주하고 생긋 웃은 비앙카는 리샤르를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공작 부인께서 이렇게 사랑스러우시니 공작님은 정말 행복하시겠어요.”

대화는 비앙카와 앤시아가 하고 있는데 정작 가장 신경 쓰는 건 뒤쪽에 서 있는 리샤르의 반응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리샤르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에 앤시아는 비앙카를 향해 상냥하고 화사한 웃음을 보였다.

“칭찬 고마워요.”

“앗, 말씀 낮춰 주세요.”

“그럴게, 비앙카.”

“공작 부인께서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이에요.”

앤시아에게 이름이 불린 비앙카는 살짝 뺨까지 붉히며 기뻐했다.

전혀 꾸미지 않았기에 순수해 보이면서도 선명한 이목구비의미인이 수줍어하자 앤시아의 등뒤에 서 있던 하녀와 기사에게서 미약하나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저 웃음 하나로 호의를 얻어내는 건 앤시아의 특기였다. 그러나 그 특기를 갈고 닦아 무기로 만들어 낸 앤시아와 달리, 비앙카는 너무도 쉽게 무의식적으로 그 일을 해냈다. 역시 여주인공이구나 싶어 절로 감탄이 나올것 같아, 앤시아는 최선을 다해 마주 웃었다.

비앙카를 향해 눈웃음을 지은 후 곧장 리샤르를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아무래도 공작은 비앙카를 정식으로 소개해 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기에 직접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공작님, 제가 공작 부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비앙카 양을 위해 방을 준비하는 걸까요?”

“네? 저를 위한 방이요?”

환한 웃음을 머금은 앤시아의상냥한 말에 비앙카는 깜짝 놀란듯 눈을 깜박거렸다.

역시 여주라 그런지 놀란 얼굴도 예뻤다.

리샤르 역시 의아함을 담은 눈으로 앤시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새파란 리샤르의 눈을 마주한 앤시아는 순수함이 듬뿍 담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한산하다고는 하나 골목길에서 애인을 만나시면 소문이 돈답니다. 선물까지 주고받으실 정도로 친밀하시다면…… 비앙카 양을 저택에 들이셔서 가까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명백히 비앙카를 리샤르의 정부나 외도 상대로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에 리샤르와 비앙카는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냐는 듯 앤시아만 쳐다봤다.

선남선녀인 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기만 해도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이 두 사람은 운명이었다.

리샤르의 팔을 붙잡고 오르골을 손에 쥐고 있던 비앙카를 본 순간 앤시아는 원작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우울 속에 빠져 방에 틀어박혀 있던 어느 날. 비앙카는 앤시아를 싫어하는 하녀들을 대신해 밝은 웃음으로 그녀를 보살피려 했다. 항상 웃어 주는 비앙카에게 어쩌면 앤시아는 마음을 조금 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리샤르와 함께 있는 모습을 창밖으로 몇 번이고 목격하지 않았다면.

의심과 질투로 기어코 비앙카를 향해 집어 던졌던 오르골. 그 오르골은 공작에게 선물 받은 유일한 것이었다. 이혼의 방아쇠가 된 작은 사건이기도 했다.

원작에서는 앤시아의 거부와 우울함을 이유로 리샤르가 비앙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는 이미 일찍부터 두 사람은 만나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결혼 전부터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정략혼이었다.

이혼을 염두에 둔 결혼이었기에 기대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혼을 위해 이쪽에서 한발 더 양보해 주리라.

“오르골이 두 개군요. 연인뿐아니라 부인인 제 선물까지 챙겨 주시다니. 친절하시네요, 공작님은.”

리샤르의 푸른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부인, 지금 무슨 오해를…”

“어머나! 공작 부인께서 제게 방을 내어 주신다고요? 정말이세요?”

앤시아의 말도 안 되는 오해에 할 말을 잃었던 리샤르가 간신히 한마디 내뱉는 순간 비앙카 쪽에서 앞으로 나섰다.

기쁨과 설렘이 듬뿍 묻어나는 아름다운 목소리였음에도 리샤르는 순간 비앙카의 가는 목을 움켜쥘 뻔했다. 앤시아의 순하디순한 녹안이 리샤르를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움찔대던 손끝이 어디를 향했을지 확신할 수 있었다.

정작 제 목숨이 방금 촛불 끄듯 훅 하니 사라질 뻔한 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비앙카는 해맑기만 했다.

“세상에, 추천서도 없는 저를 공작가의 하녀로 들여 주시는 거예요? 안 그래도 살던 곳을 무작정 떠나온 터라 일자리 찾기가 막막했는데 정말 기뻐요.”

비앙카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연신 감사 인사를 해 왔다.

굳어 있는 리샤르와 달리 연신 재잘거리며 친근감을 보이는 비앙카의 행동에 앤시아의 침묵이길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