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45화.
이건 무슨 상황일까.
분명 앤시아는 의도적으로 비앙카를 리샤르의 숨겨 둔 애인이라는 가정하에 떠보던 중이었다.
리샤르 쪽에서는 일단 부정하는 듯했으나 비앙카는 눈치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헛다리만 짚었다. 앤시아의 의도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한 채 공작저에 자신의 방이 생긴다며 마냥 신나 했다.
“앞으로 주인마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원작에서도 비앙카는 공작가 하녀로 머물렀다. 지금처럼 앤시아가 개입하지 않아도 결론은 마찬가지일 터.
그렇다 한들 이 자리에서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사람을 두고 멋대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곤란했다.
“그건 공작 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인 것 같은데.”
비앙카에게 머물러 있던 앤시아의 시선이 리샤르에게로 옮겨 가고,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리샤르에게서 곧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하녀를 들인다면 그건 부인의 권한이지만, 지금 이 상황은 오해…….”
“꺅! 제게 이런 행운이 오다니!
정말 감사해요! 공작 부인, 아니, 주인마님은 천사세요!”
리샤르가 다시금 오해라고 말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 들뜬 비앙카가 좋아 죽겠다는 양 격렬하게 날뛰었다.
덕분에 말허리가 잘린 리샤르는 심기가 언짢아져 비앙카의 등 뒤에서 흉흉한 기운을 뿜어냈다.
지켜보는 앤시아의 미소가 흔들렸다.
‘저기, 여주야. 너 그러다 흑곰앞발에 맞을 거 같아. 너희 진짜 사랑하는 사이 맞니?’
문득 앤시아는 지금은 겨우 소설 초반이니 어쩌면 이 두 사람의 감정이 아직 시작되기 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이른 시기였다면 조금 전 리샤르를 떠보듯 비앙카를 애인 취급한 건 섣부른 행동이었다.
그렇다 한들 굳이 리샤르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앤시아는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금 환한 웃음을 보였다.
“비앙카 양, 혹시 오해라면 안한데 공작님과 언제부터 만났는지 물어봐도 될까?”
“공작님이요? 방금 여기 장난감가게에서…… 앗, 이거 비밀일텐데 제가 먼저 말하면 안 될 거 같아요.”
조금 전까지 눈치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안 보이던 비앙카답지 않게 윙크까지 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오해를 불러일으키려는 듯한 태도였으나 그 덕에 드디어 리샤르는 말할 틈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여인을 처음 만난 건 이 가게 안이었소. 이름조차 지금 처음 듣는군. 이런 걸 구구절절 말해야 한다니.”
구구절절치고는 무척 짧은 변명이었다.
와중에 비앙카는 저 짧은 말조차 할 틈을 주지 않고 대귀족인 공작의 말을 툭툭 끊은 셈이었다. 평민 신분으로서 무척이나 위험한 행동이었다.
앤시아야 원작을 통해 공작과 비앙카의 사이가 가까워질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데다, 비앙카의 여주 버프를 믿었기에 아무렇지 않았으나 사용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비앙카를 향해 날 선시선을 보내고 리샤르와 앤시아의 눈치를 보느라 바짝 긴장했다. 조마조마해 하며 숨 쉬는 것조차 조심했다.
정작 앤시아는 길어야 반년이면 깨질 부부의 꺼림칙한 상황에 다른 이들이 마음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상황을 넘기기로 했다.
“우연이 인연이 되기도 하는 거”
식구인지 공작의 숨겨 둔 애인인지 헷갈리는 이를 경계하듯 어정쩡하게 거리를 벌렸다.
어수선한 분위기도 정리할 겸 앤시아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앗, 그럼 저희는 따로 마차를 구해 볼게요.”
“괜찮아. 마차가 그리 좁은 것도 아니고 괜히 시간만 걸리잖니.”
엘리의 말대로 따로 마차를 대여할 수는 있었다.
정체불명의 평민과 함께 마차를 타고 싶어 하는 귀족은 없었기에 눈치가 있는 하녀라면 올바른 제안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그러할 테지만, 앤시아는 오히려 비앙카와 함께 돌아갈 일이 나름 기대 되었다. 활자로만 접해 왔던 여주인공의 등장이었기에 마치 연예인을 만난 것 같은 신기한 기분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심심한 것보다 조금 좁은 편이 나아.”
“그럼 저희가 먼저 마차를 살펴두겠습니다.”
“마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게요.”
줄리와 엘리는 앤시아에게 인사후 곧장 비앙카의 팔과 등에 손을 얹고 빠르게 걸어가 버렸다.
마차 확인은 호위가 할 일이 아닌가 싶었으나, 그 짧은 사이에 저만치 멀어진 두 사람은 비앙카에게 쉴 새 없이 주의를 시키는 듯 보였다.
어차피 마차를 여기로 끌고 올게 아닌 이상 앤시아 역시 움직여야 했다. 호위와 함께 하녀들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한 걸음 내딛던 앤시아는, 머리꼭지에서 들려오는 동굴 곰 울림에 그대로 멈춰 섰다.
“부인.”
기척조차 없이 뒤통수에 달라붙다니. 과연 북부의 최강자답다.
근데, 그 최강자다운 능력을 굳이 마수도 아닌 이쪽한테 발휘할 필요는 없을 텐데.
앤시아는 놀란 마음에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한 걸음 더 내디딘 후 돌아섰다. 곧바로 돌아섰다면 분명 공작의 탄탄한 가슴에 얼굴을 부딪혔으리라.
“네, 공작님.”
“마차가 지루하다면 말을 타지.”
“제가 승마에 익숙지 않아서요.”
앤시아의 답에도 리샤르는 물러 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바로 뒤쪽에 흑마와 고삐를 잡고 서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리샤르 혼자인 줄 알았더니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나 보다.
기사가 붙들고 선 흑마는 군사용으로 선별해 키워져서 그런지 몸집도 어마어마한 데다 기세가 흉흉했다.
주인인 리샤르가 돌아보지 않자 어찌나 숨을 거칠게 푹푹 쉬어 대는지, 감정 표현이 참 명확했다. 말 거죽을 뒤집어쓴 사람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였다. 게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푸르릉거리기까지했다.
백작가에서 가끔 타고 놀았던 조랑말은 순하기 이를 데 없었는 데, 눈앞에 흑마는 전혀 달랐다.
백작가의 조랑말은 눈망울이 흑요석같이 예쁘고 반짝거렸는데, 공작가의 흑마는 눈이 진한 먹물을 그대로 부어 놓은 듯 묵직하고 짙었다.
같은 까만색인데 어쩜 이리 느낌이 다를까.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동물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 이대로 있어 봤자 다리만 아프기에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려 했다.
“공작님?”
앤시아는 딱 좋은 높이에 내민리샤르의 손바닥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얹으라는 걸까, 잡으라는 걸까.
아니, 그보다 어울리지 않게 웬에스코트?
마차까지 바래다주려는 신사적인 행동이라니. 피를 뒤집어쓴 냉혈 공작에게도 기본적인 매너는 존재했구나, 순수한 감탄이 일었다.
살포시 손끝을 얹는 순간.
앤시아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꺅!”
짧은 비명을 지르고 나니 눈높이가 달라져 있었다.
손끝만 얹었을 뿐인데 어떻게 제 몸이 허공에 떠오를 수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허리를 붙든 커다란 손의 감촉을 알아채고 나서야 앤시아는 자신이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옮겨졌음을 깨달았다.
이런 재주는 마수 잡을 때나 쓸 것이지, 사람을 말에 얹을 때 쓰고 난리냐고.
이런 게 바로 소 잡는 칼을 닭잡는 데 쓰는 거겠지.
똑똑해 보이던 흑마조차도 리샤르의 동작이 워낙에 빨랐던 터라, 제 등에 주인 외 한 사람이 더 올랐다는 걸 늦게 자각했다.
흑마가 불만스레 푸르릉거리자, 리샤르가 그런 흑마의 목을 가볍게 툭툭 두드려 달랬다.
흑마는 언제 불만을 품었냐는 듯 금세 얌전해졌다.
‘잠깐. 지금 거절하자마자 무시하고 말에 태운 거야?’
공작에 대한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재정립된다.
겉모습만 흑곰처럼 커다랗고 짐승 같다 뿐이지, 실상은 말이 통하고 제법 다정하며 냉정해 보이는 파란 눈과 무표정 탓에 오해 받는 거라고 여겼다.
함께 산책할 때마다 새파란 눈과 커다란 덩치 때문에 오해와 편견을 받았던 순대처럼.
그랬기에 리샤르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갖고 있었다. 대할 때 역시 편견 없이 대하려 의식적으로 노력했고, 그러나 이는 그녀의 오판이었다.
순둥이 강아지와 달리 그는 성인인 데다 귀족, 그것도 공작이었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부분이 있을 거라는 걸 간과해선 안 됐다.
승마에 익숙지 않다는 앤시아를 대뜸 말에 태워 버릴 만큼 리샤르는 거침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리샤르는 기본적으로 몸 쓰는 일은 기막히게 잘했다. 앤시아의 손이 뭘 잡아야 할지 더듬거리다 말갈기를 움켜쥐려 하자 자연스레 양쪽으로 제 팔을 내밀어 주었다.
병 주고 약 주냐 싶어 반감이 들었지만, 점점 빨라지는 말의 속도에 맞춰 허리가 튕겨 나갈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해 생명 줄이라도 되는 양 꽉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부인. 필요한 게 있다면 저택으로 사람을 부르면 될 일이지.”
“바, 바람도 쐬고 싶, 시퍼, 윽!”
“아직 저택도 다 돌아보지 못한 거로 알고 있는데.”
“영, 윽! 영지, 구경도, 아!”
혀 깨물었다.
“영지 구경이라면 지금 봐 두는 것도 좋겠군. 조금 돌아서 가도록 하지.”
“네? 아뇨. 바로 집에, 꺅!”
갑자기 고삐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말이 방향을 틀며 앤시아의 몸도 크게 기울었다. 빈틈없이 붙잡아 주는 리샤르의 손과 팔에 매달리면서도 또다시 혀를 씹어 피 맛이 느껴졌다.
차라리 입을 다물자.
길이 잘 나 있는 중심가를 적당한 속도로 달리던 때와 달리 외곽으로 방향을 틀며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마차 안이었다면 조금 빠르다 싶은 정도의 속도였으나 말 위에서 직접 피부로 느끼는 체감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익숙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무서워진 탓에 앤시아는 입도 다물고 눈도 감아 버렸다.
“고개를 들지 않으면 볼 수가 없을 텐데.”
리샤르는 고급 승용차에 탄 것처럼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 가는 데, 앤시아는 짧은 답을 하는 것조차 혀를 씹어 댈 만큼 몸이 요동쳤다. 그저 떨어지지 않으려 리샤르의 팔을 있는 힘껏 움켜쥔채 식은땀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부인의 몸은 약하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면 그렇지도 않은 거 같군.”
와, 나 욕해도 되지 않나?
앤시아는 입만 열 수 있으면 비록 몇 개밖에 모르는 욕이라도 반복해서 해 주고 싶었다.
안 그래도 조금 전부터 식은땀이 흐르고 슬슬 어지러운 게 상태가 심상치 않은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