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46화 (46/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46화.

공작저에 도착했는지 말 달리는 속도가 느려졌다.

저택까지는 아직 좀 더 달려야 했으나 앤시아는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공작님, 멈춰 주세요.”

앤시아의 요청에 리샤르는 곧장 말을 세웠다.

무례하다 싶을 만큼 멋대로 말에 태울 때와는 달리 순순한 태도였다. 앤시아가 몸을 틀어 말에서 내리려 하자, 그보다 빠르게 내려선 리샤르가 능숙하게 그녀를 안아 내려 주었다.

다소 거칠기는 했어도 강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창백해진 앤시아와 마주하자 리샤르의 파란 눈이 예상하지 못했단 듯 흔들렸다.

아, 뭐야. 그냥 주인이랑 산책 나온 게 너무 신나서 폭주한 대형견 같잖아.

우리 순대도 그랬다.

장마철에 장대비를 뚫고 나갈 수 없어 눈치작전 끝에 이슬비로 바뀐 틈을 노려 일주일 만에 나간 산책에서 순대는 폭주했다.

흙탕물이고 물에 푹 젖은 화단이고 할 것 없이 정신없이 몸을 내던지듯 달려들고 파고 뒹굴었다. 엉망진창이 돼서도 더 달려야 한다며 버둥거리다 주인인 그녀까지 넘어지게 했었다.

그때 장렬하게 긁힌 무릎 상처는 결국 흉터로 남을 만큼 깊었다. 지금은 상처 하나 없는 새하얀 무릎이지만.

참다못해 순대의 이름을 크게 불렀을 때 신나서 돌아보던 순대의 맑은 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화가 나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분위기가 이상하단 걸 알아채고 눈치 보던 게 어찌나 속상하던지.

하지만 지금 앤시아의 앞에 있는 건 혼자선 산책도 못 하는 안쓰러운 순대가 아니었다.

제 뜻대로 마수 사냥을 나가 놓고 뜬금없이 돌아와서는 승마를 거절하자마자 짐짝처럼 신고 신나게 내달린 철없는 남편일 뿐이었다.

현실 남편이었다면 여기서 단단히 혼을 냈겠지만, 그는 앞으로 저택에 머무는 여주인공과 미래를 쌓아 갈 임시 남편이었다. 감정 소모를 해 봤자 앤시아의 손해였다.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단단한 땅을 밟고 서 있는데도 여전히 달리는 말 위에 있는 것처럼 불안했다.

심호흡하고, 또 하면 괜찮아져야 하는데.

“하아…….”

“부인!”

아. 오늘 너무 무리했나 봐.

비틀거리는 앤시아를 곧바로 안아 든 리샤르는 창백한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품에 안은 작은 몸이 차가웠다. 곧장 망토와 재킷을 벗어 흐느적거리는 앤시아를 둘둘 말듯이 감싸 단단히 끌어안고 곧장 말을 몰았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던 듯 숨쉬는 것조차 힘들 만큼 격렬한 움직임에 앤시아는 눈앞이 새까 맣게 점멸하다 새하얗게 변하는 듯했다.

이대로 기절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을 만큼 머릿속까지 울려 왔다. 속까지 울렁거리는 게 아까 여관에 들렀을 때 고기 한 점이라도 삼켰다면 추한 꼴을 보일 뻔했다. 아무리 빈속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계속 흔들리면 기절이는 구토는 하나는 해 버리고 말 것이다. 둘 중 하나 골라야 한다면 기절 쪽이 좋겠다.

순식간에 정문을 통과해 저택입구까지 내달린 리샤르는 사용 인들이 나오기도 전에 도착해 버렸다. 청소 중이던 몇몇 사용인 이 리샤르를 발견하고 놀라 서둘러 다가왔다.

“각하? 토벌 중 문제라도 생기 신 겁니까?”

***

“주인님, 품에 안으신 건…

주, 주인마님?!”

“주치의를 불러라. 아내가 곧 기절할 것 같으니.”

리샤르의 확언에 앤시아는 엄지 손가락이라도 치켜들고 싶었으나 말에서 내리자마자 안심한 탓에 그대로 의식이 날아갔다.

위태위태하던 앤시아의 굳어 있던 몸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손안에서 축 늘어지는 감각은 등뒤로 마수가 덮쳐 올 때보다 더 소름 끼쳤다.

“당장. 데려와라.”

마침 산책하러 나가려던 주치의가 곧장 부름에 응하지 않았더라면 갈 곳 없는 분노가 어떻게 됐을지 리샤르조차 짐작하기 힘들었다.

주치의는 의식 없는 창백한 공작 부인을 발견하고 이게 벌써 몇 번째인가 생각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흉흉한 기운을 뿌려 대는 공작 앞에서 티를 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체력이 무척 약하신 분입니다.”

“말에 탄 것만으로 의식을 잃을 만큼?”

“예. 세상에는 아름답게 기절할 줄 아는 연약한 귀부인도 많지만, 공작 부인께서는 진실로 몸이 약하십니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리샤르가 믿지 못하는 건가 싶어 주치의는 다른 귀부인의 의도적인 행위와 다른 진실임을 강조했다.

“잠깐 말에 탄 것만으로 기절한다면 외출도 자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온실 정원 산책 정도는 권해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온실 정원이라면 값비싼 유리와 마석으로 꾸며진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규모였다.

물론 이 크기에 대한 체감은 리샤르 기준이었으나 워낙 넓은 공작가를 생각하면 작기는 했다.

“그 정도로 약하다는 건가?”

“공작가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하녀들이 몇 번이고 절 찾아왔습니다. 남들에게는 일상인 행보가 이분에게는 무리일수 있습니다.”

주치의가 따로 알려 주지 않아도 앤시아가 몸이 약하다는 건 보고서를 통해 알고 있었다.

직접 만져 본 팔이 얼마나 가늘고 쉽게 멍드는지 체험을 통해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토끼를 가지고 악력 연습까지 하지 않았던가.

“정말 연약하군.”

“올해 열 살이 된 제 딸아이보다 약하시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

리샤르는 푹신한 이불에 둘러싸여 곤히 잠든 앤시아가 새삼 얼마나 연약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

공작가의 밤은 상당수의 기사와 사용인이 깨어 있음에도 고요했다.

그들은 여느 때와 같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각자 맡은 일에 충실했으나 평소와 달리 작은 소곤거림이 이어졌다.

마수 토벌을 위해 보름에서 한 달 가까이 저택을 비우던 공작이 일찍 귀가한 것은 물론 리샤르의 품에 안겨 돌아온 공작 부인에 관한 이야기가 사용인의 입을 통해 쉼 없이 퍼져 나갔다.

무뚝뚝하고 차갑기만 한 줄 알았던 공작마저 녹인 주인마님 덕에 다들 공작가 안에 새로운 바람이 불 것이라며 기뻐했다.

공작가의 주치의가 다녀간 후에도 리샤르는 한참 동안 앤시아를 지켜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작고 가늘기만 하던 여린 육체는 보이는 그대로 연약했다.

고작 승마한 것만으로 의식을 잃을 만큼 허약한 육체는 여태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마차를 능하다면 몇 번이고 다시 만져 보고 싶었다.

이런 감정 하나하나가 리샤르는 낯설기만 했다.

직접 말을 몬 것도 아니고 함께 탄 것뿐인데도 기절할 만큼 연약한 몸이다. 앤시아가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키고 싶었다.

효율을 떠올리면 미련한 짓이었다. 어릴 적 열이 올라 훈련을 나가지 못할 만큼 힘겨웠던 밤.

어머니가 곁을 지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의사도 아니고 리샤르는 약을 먹고 잠들어 있었기에 비효율적이라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주치의가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눈을 뜨는 걸 보고 싶었다.

잠든 것뿐임을 알면서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손을 가만히 둘 수 없을 만큼 불안감이 커졌다. 앤시아를 흔들어 깨우고 싶은 마음을 참아 내기 힘들었다.

초조해진 리샤르와 달리 하녀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제 할 일을 이어 갔다. 능숙하게 앤시아의 식은땀을 닦아 주고 거의 다 타들어 간 향초를 새것으로 바꿨다.

이대로 지켜보다간 손을 댈 것 같아 리샤르는 한참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소리도 없이 리샤르가 방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앤시아는 살며시 눈을 떴다.

실은 한참 전부터 의식이 있었다. 리샤르가 기다리는 이유가 비앙카의 이야기를 하기 위함인 것 같아 잠든 척했다. 혹여 아직 두 사람이 가깝지 않은 사이라, 리샤르가 비앙카를 내보내잔 식으로 말할까 걱정된 탓이었다.

비앙카를 내보내다니. 그녀의 계획에 가장 큰 도움이 될 존재를 잃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건 좀 곤란했다.

다행히 리샤르는 앤시아를 억지로 깨우지 않았다. 매복이 특기인 마수의 작은 숨결 하나 놓치지 않기로 유명한 북부의 학살자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게 앤시아의 죽은 척, 아니, 자는 척을 끝끝내 알아채지 못하고 돌아갔다.

눈을 뜬 앤시아를 발견한 엘리가 호들갑스럽게 다가왔다.

“앗, 마님. 방금까지 주인님께서 곁을 지키셨어요.”

“마님께서 깨어나셨다고 주인님께 전하겠습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을 향해 앤시아가 느릿하게 손짓했다.

“내일 뵈면 되지. 그보다 비앙카에게 머물 곳은 알려 줬니?”

“아, 그게…….”

당연히 그렇다는 가벼운 답을 기대했으나 머뭇거리는 태도에 앤시아의 고개가 기울었다.

“응? 설마 너희들, 비앙카를 따돌리는 거야?”

“아니에요, 마님. 저희는 일단하녀 숙소로 데려가려고 했어요.”

하녀 숙소라면 네댓 명이 함께 쓰는 방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여주인공인데 혼자 쓸 수 있는 방을 내어 주라고 해야겠다 생각하는데, 이어진 하녀들의 말이 좀 이상했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일이니 집사장님과 시녀장님께 먼저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시녀장님께서 비앙카에게 혼자 쓸 수 있는 방을 내주시는 거 있죠.”

“응? 시녀장이?”

로사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친절하게 대해 줄 이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이 궁금증을 내일 아침으로 미룰 앤시아였으나 지금은 달랐다.

“로사를 불러 주겠니?”

“시녀장님을요? 저기…… 밤이 깊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공작 부인인 앤시아에게도 거침없이 제 할 말을 하는 로사임을 알기에 줄리와 엘리는 걱정스러워했다. 하지만 정작 앤시아는 생글거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왕이면 시녀장이 타 주는 밀크티도 마시고 싶다고 전해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