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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47화 (47/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47화.

엘리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보니 약간 미안해졌다.

엘리는 한참 만에 돌아와 로사를 찾지 못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밤이 깊었는데 시녀장이 자리를 비우다니 수상했다.

혹시나 로사가 불편해 거짓말하는 건 아닌지 잠깐 엘리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어 돌아온 줄리마저 시녀장의 방이 비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아무리 바쁘게 저택을 누비고 다니는 시녀장이라고 할지라도 지금은 무척 늦은 시간이었다.

앤시아가 고민하는 모습을 언짢아한다고 오해한 두 사람은 자고 있을 집사장에게까지 물어보고 오겠다며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런 두 사람을 말린 앤시아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기절한 앤시아를 보살피기 위해 곁을 지켰던 두 하녀는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졸리지 않는다고 너희를 계속 붙잡아 놨구나. 미안해. 인제 그만 쉬어.”

“네, 마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설렁줄을 당겨 주세요.”

“웬만하면 부를 일 없을 거야.

푹 자.”

두 사람을 내보내고 혼자가 된 앤시아는 낮에 보았던 비앙카를 생각했다.

자신을 향해 호감 어린 웃음을 보이던 비앙카를 떠올리며 앤시아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눌렀다.

“드디어 등장했어, 여주인공 비앙카가.”

몇 년간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침대를 데굴데굴 구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앤시아는 머리맡에 놓인 인형을 붙잡았다.

“비앙카 정말 예쁘더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실실 올라갔다. 인형을 말벗 삼아 담아 뒀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앤시아도 예쁘긴 한데 카테고리가 다르달까? 큐티 귀염뽀짝소녀가 내가 가야 할 노선이면 비앙카는 아름다운 아가씨라는 말이 딱 어울려.”

칙칙하고 낡은 평민 복장인데도 어찌나 예쁜지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소설로 읽었을 때는 차분한 미인이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어찌나 싱그러운지 주변 공기까지 청량해지는 듯했다.

“성격도 엄청 시원시원해 보이고, 친해지면 좋겠다~가 아니지!”

앤시아는 손에 쥔 인형을 꽉 움켜쥐었다.

“구박, 구박해야지! 아니, 최소한 무시하든가.”

원작에서 결정적으로 리샤르가 앤시아를 놓게 되는 이유.

비앙카를 리샤르가 보는 앞에서 상처 입히는 순간이었다.

“아, 맞다. 오르골.”

다행히 화장대 위에 보란 듯이 올려 둔 오르골을 발견하고 안도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앤시아는 비앙카를 상처 입혀야 했다.

이왕이면 원작의 흐름에 맞춰 오르골을 내던지는 게 변수를 줄일 수 있었다.

“아, 적당히 잘 던져야 할 텐데.

잘못 던져서 다치면 어떡해. 살짝 팔만 스치게 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언제쯤 오르골을 던져야 적절할지 고민에 빠졌다.

남주와 여주가 친밀해진 다음이어야 할 테니 시기를 잘 봐야 했다.

***

한참을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던 앤시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치장을 끝냈다.

이른 시간부터 리샤르의 식사권유를 전하고자 찾아온 사용인에게 아침 생각이 없다 말한 후, 돌려보냈다.

반드시 함께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리샤르와 마주하는 건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지난밤 생각해 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앤시아는 쿠키와 차 한 잔으로 빈속을 달랜 후 의욕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나, 뭔가를 좀 던져야겠어.”

“역시 스트레스 푸는 데는 접시던지기가 최고죠.”

“마님께서 던지기 좋은 작은 항아리들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놈의 접시. 그놈의 항아리.

“아니. 이 정도 되는 나무토막을 구해 줘.”

대충 오르골 크기를 알려 주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재정비하느라 비어 있던 정원 한쪽에 나무토막과 표적이 될 다트판과 더미 인형이 놓였다.

연무장과는 비교할 수 없으나 그럭저럭 어설픈 훈련장이 만들어졌다.

“마님, 힘껏 던지세요.”

“부족하시면 더 가져오겠습니다. 힘내세요.”

줄리와 엘리의 진심 어린 응원을 받으며 앤시아는 나무토막 던지기 연습을 시작했다.

손에 쥐기 딱 좋은 크기의 나무 토막을 힘껏 집어 던지자 가까운 거리기는 했어도 표적으로 세워둔 인형을 정통으로 맞췄다.

와, 이거 안 했으면 큰일 날 뻔.

스스로도 몰랐던 제 재능에 새삼 눈 뜰 것 같다.

“마님. 단검 던져 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아니, 그런 무서운 권유는 하지 말아 줄래?”

오르골로 사람 치는 것도 무서운데 단검이라니. 끔찍한 소리였다.

앤시아는 이번엔 팔을 노려 던졌으나 또다시 목을 치고 떨어졌다.

다시 팔을 노리고 던지니 가슴에. 머리에. 복부에.

몰랐던 재능에 앤시아는 식은땀이 흘렀다.

“우와, 우리 마님 연약하신 줄 알았는데 굉장하세요.”

“멋지십니다, 마님.”

아니, 팔. 팔 좀 맞으라고!

이러다 여주인공 비명횡사하는 건 아닌지 앤시아는 덜컥 겁이 났다.

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정도로 나무토막을 던지고 있자니 지나가던 기사가 진지하게 짧은 목검을 내어 주기까지 했다.

어린 신입 기사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투척용 나무 단검이라나 뭐라나.

‘이게 뭐야. 이런 걸 왜 나한테주는데.’

괜히 연습했다가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 비앙카에게 오르골이 아닌 목단검이 박히게 생겼다.

팔에 상처 좀 났다고 이혼 프리 패스가 날아들 판에 과한 상해를 입히면 어떤 식으로 보복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반쯤 장난으로 시작했던 나무토막 던지기가 진지해지는 순간이었다.

“마님, 잠시 쉬었다 던지시면 어떨까요?”

앤시아가 무척 연약함을 며칠 사이 파악한 하녀의 제안이었다.

걱정 어린 줄리의 얼굴을 본 앤시아는 손에 든 나무토막을 내려놓았다.

얼마 던지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어깨가 뻐근하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음……. 그럼 좀 쉴까?” ”

“네, 마님. 마침 요리장께서 간식을 가져오셨어요.”

한쪽에 흰색 테이블과 의자가 왜 있나 했더니 휴식을 위해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손을 탈탈 털고 하몬이 가져온 간식에 손을 대려다 문득, 원래 이런 건 하녀들이 가져오는 거 아닌가 싶어 테이블 옆에 서 있는 요리장 하몬을 빤히 쳐다봤다.

요리하면 옷이 더러워질 텐데 하몬은 매번 깨끗한 옷을 입고 앤시아에게 간식을 가져왔다.

아무래도 음식과 관련해서는 공작보다 안사람인 공작 부인의 줄을 잡는 게 낫다 판단해 그런 듯 싶었다.

소용없는 짓을 하는 하몬이 안쓰럽게 느껴졌지만, 음식 투정이라는 정말 소소한 악행을 실행하려 했다.

접시마다 예쁘게 놓여 있는 디저트를 하나 집어 입에 무는 순간 미간만 조금 찌푸리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앗, 마님! 안녕하세요! 저 비앙카예요.”

그 쉬운 걸 방해하는 여주인공의 등장이었다.

양손으로 묵직해 보이는 빨래바구니를 든 비앙카가 저 멀리서 앤시아를 발견하고 큰 소리를 냈다. 아는 척해 주지 않으면 더 크게 자기소개 할 것 같아 앤시아는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네, 마님! 바로 갈게요!”

그걸 제멋대로 해석한 비앙카가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앤시아에게로 달려왔다. 저 무거운걸 들고 저리 빠르게 달려오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마님, 저택이 얼마나 넓은지 몰라요. 저희 마을보다 더 큰 거 같아요. 물론 저희 마을이 좀 작기는 한데 그래도 연못도 있고 우물도 있는데 이곳의 우물이랑 연못이 훨씬 더 큰 거 있죠?”

“지낼 만한가 보구나.”

묻기도 전에 우다다 쏟아져 나오는 비앙카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네, 제 방도 생겼어요. 집에선 가족끼리 다 한 방에서 잤는데 너무 좋아요. 아, 마님은 호수 가보셨어요? 거기 팔뚝만 한 물고기가 막 튀어 올라와요. 제가 조만간 잡아서 구워 드릴게요.”

그거 잡으면 안 될 거 같은데.

어차피 리샤르가 다 묵인할 테니 상관없을 것 같아 앤시아는 웃기만 했다.

“비앙카, 무거워 보이는데 괜찮니?”

하던 일 마저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정작 비앙카는 활짝 웃으며 빨래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팔을 흔들었다.

“마른 이불이라 들 만해요. 젖은 이불은 무거워서 가끔 바구니를 놓치기도 해요. 참, 마님이 바구니에 들어가시면 절대 안 놓칠 거예요.”

뜬금없는 비앙카의 발언에 줄리와 엘리의 시선이 사나워졌다.

“지금 그게 무슨 무례한 말입니까?”

“우리 마님을 바구니에 넣어서 납치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아니, 너희는 또 왜 그걸 곡해해. 물론 나도 저게 뭔 소린가 싶기는 하지만.

앤시아가 나서기도 전에 비앙카가 오히려 순진한 예쁜 눈을 깜박이며 되물어 왔다.

“제 동생들은 붕붕을 좋아하거든요. 아, 붕붕은 바구니에 애들이 들어가면 그걸 어른들이 흔들어 줄 때 나는 소리예요. 마님은 몸이 작으셔서 바구니에 충분히 들어가실 수 있으니까 제가 재밌게 해 드릴 수 있어요.” ”

태연하다 못해 자신만만한 비앙카의 태도에 사용인들 모두가 할말을 잃었다.

아무리 앤시아가 가볍다고 해도 날씬한 몸을 가진 비앙카가 훌렁들어 빙빙 돌릴 수 있을 무게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팔을 두드리며 저만 믿으라는 비앙카의 해맑음에 다들 기가 막혔는지 트집조차 잡지 못했다.

이 와중에 앤시아는 여주인공을 만난 기쁨이 골치 아픔으로 변해 감을 느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여주가 사차원인 줄 몰랐는데.’ 원작에선 주로 비앙카는 살갑게 굴고 앤시아는 등 돌린 채 묵묵부답으로 있었다. 자연히 분위기가 무거웠기에 이런 깨 발랄한 비앙카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실제로 만난 비앙카는 무척이나 밝고 귀족에 대한 무서움도 딱히 없어 보였다. 앤시아를 향해 마치 이웃집 동생을 만난 듯 마냥 반가워만 하는 비앙카의 태도는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오죽하면 사용인들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입을 쉬이 열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공작 부인은 가만히 있는데, 아랫것으로서 먼저 함부로 나서기 그런 것 또한 이유 중 하나인 듯했다. 때문에 그들은 비앙카의 행동을 무언으로 질책했다.

하지만 정작 비앙카는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한 듯 앤시아 앞에 놓인 디저트를 보며 해맑게 눈을 반짝일 뿐이었다.

‘이 싸늘한 분위기를 정말 못느끼는 거니, 여주야?’

“마님, 혹시 이 과자 안 드시면 제가 먹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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