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48화 (48/148)

정말 못 느끼나 보다.

않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래, 그러렴.”

“와, 역시 천사세요. 잘 먹겠습니다.”

비앙카의 긴 손가락이 주저 없이 타르트와 쿠키로 향했다.

비앙카가 한입에 넣기 커 보이는 쿠키를 입 안으로 쏙 밀어 넣었다. 타르트도 한 입 반이면 충분했다. 순식간에 비워지는 접시들을 보니 식탐이 제법 많은 듯 싶다. 그런데도 여주 버프 탓인지 그저 복스럽고 예쁘게 먹는구나 싶어 좋게 보였다.

“우와, 너무 맛있어요. 귀족은 이런 걸 매일 먹는 거예요?”

“아마도.”

비앙카는 망설임 없이 포크로 케이크 반을 갈라 절반씩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단 두 입 만에 케이크 한 조각이 사라졌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던 간식이 순식간에 줄어들자 지켜보는 하녀와 요리장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공작 부인인 앤시아를 위해 준비했던 간식이 한낱 하녀의 입으로 다 사라져 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잘 먹네.”

“이렇게 맛있는데 하나도 안 드시다니. 주인마님은 매일 드셔서 질리신 거예요?”

그럴 리가. 아침으로 차 한 잔과 쿠키 몇 조각 먹은 게 다였다. 안 그래도 먹으려던 참에 비앙카가 나타나 포크를 들 틈이 없었을 뿐이었다.

“아니, 네가 와서…”

“정말 맛있어요! 전 레몬이 이렇게 달콤한 줄 몰랐어요.”

레모네이드까지 시원하게 들이켜는 비앙카의 행동에 앤시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리샤르는 어쩌면 내숭 떨지 않는 비앙카가 좋아졌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더욱더 이런 비앙카의 행동을 지지해 줘야지.

좀 멀리 놓인 디저트 접시를 비앙카 쪽으로 살짝 밀어 주었다.

결국 하몬이 차마 더 이상 이상황을 지켜볼 수 없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하녀들 또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앤시아를 생각해 주는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앙카는 앤시아에게 아주 좋은 빌미를 줄 패였다.

모두의 시선이 테이블에서 비껴갔을 때 비앙카의 손이 앤시아가 밀어 준 접시와 부딪혔다. 잡을 틈도 없이 바닥으로 추락한 접시가 청아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고급스러운 접시라 그런지 소리도 듣기 좋구나, 하는 속 편한 생각을 하는 사이 비앙카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어요, 마님. 제가 주제넘게 식탐을 부렸어요.”

응? 방금 접시 건든 건 여주였는데? 난 이미 손 뗐는데?

비앙카는 불쌍해 보일 정도로 온몸을 바닥에 납작하게 붙이며 애원했다.

“마님이 화내시는 게 당연해요.

평민 주제에 감히 귀족인 마님만 드실 수 있는 귀한 과자에 손을 댔어요. 더럽다고 느끼시는 게 당연해요. 제가 손댄 접시 따위다시 쓰고 싶지 않으셔도 이해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앙카는 행복 바이러스라도 먹은 듯 깨발랄 여주인공 분위기 팍팍 풍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접시를 밀치고 바닥에 주저앉아 구박데기 하녀라도 되는 양 자기 비하를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분명 앤시아가 밀어 준 접시는 아무 문제 없었다. 그걸 비앙카가 손을 내밀며 우연히 밀어 떨어트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비앙카의 저런 말들은 앤시아를 접시나 떨어트린 속 좁은 귀족처럼 보이게 했다.

‘어머. 얘가 날 아주 쓰레기로 만들려고 하네.’

의도적인 행동? 아니면 보이는 대로 반응을 보이는 것뿐일까.

‘뭐 어느 쪽이든 나야 상관없지.’

공작가에 들어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아름다운 평민이 눈물을 보이며 애원하는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예뻤다. 미인이 저리 울먹이니 비앙카에게 동정표가 갈 만한 상황 전개였다. 하지만 덕분에 앤시아는 힘들이지 않고 깐깐하고 못된 공작 부인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더없이 반가운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저 맛있는 디저트를 입에 무는 순간 억지로 얼굴을 찌푸리며 맛없는 척할 자신이 없었는데, 고마울 따름이었다.

“흐음. 그렇구나.”

울먹이는 비앙카에게 수긍하려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하녀들 사이로 요리장 하몬이 튀어나왔다.

“감히 주인마님이 건드리지도 않은 간식을 죄다 헤집어 놓다니!”

“응? 내가 허락했으니까 괜찮지…… 않나?”

“마님은 너무 천사 같으셔서 괜찮으실지 몰라도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신입이라고 해도 기본조차 모르는 하녀가 공작가 안을 마구 돌아다니게 둔 책임을 물어야 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책임을 공작 부인인 앤시아가 져야 하는 거 아닌가?

순진한 눈으로 요리장을 올려다 보니 곁에 있던 엘리 역시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비앙카 너, 빨랫감을 가지고 다니는 거 보니 네 교육을 담당한 하녀가 있겠지? 당장네 교육을 처음부터 다시 하자고 해야겠어.”

“마님, 저희가 책임지고 확인해야 했는데 기본도 모른 채 일을 시작했나 봅니다. 벌을 내리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갑자기 반성회 분위기가 되더니 하녀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아름다운 앙카를 아무렇지 않게 양쪽에서 붙잡아 일으켰다.

“일어나세요. 주인마님 앞에서 무슨 추태입니까?”

“뭘 잘했다고 우는 거야, 넌.”

아니, 얘들아. 지금 너희는 같은하녀인 비앙카 편을 들어야 하는거 아니니?

그러기엔 아직 친해지질 못했나보다. 오히려 하녀를 구박한-진 실은 아니지만 비앙카의 발언상공작 부인의 편을 드는 걸 보니.

앤시아는 스푼을 집어 가볍게 잔을 두드렸다. 작지만 선명한 소리에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비앙카. 맛있었니?”

“네, 마님. 죄송해요. 처음 먹어보는 맛에 눈이 멀어 마님을 불편하게 만들었어요.”

“비앙카처럼 맛있게 잘 먹는 하녀는 못 본 것 같구나.”

“마님, 죽을죄를 지었어요. 제발 용서를.”

앤시아 딴에는 칭찬의 말이었는데 비앙카는 무조건 잘못했다며 빌었다.

그러면 안 되지. 누구도 아닌 공작의 연인이 되어 줄 중요한 사람인데.

“그런 네게 딱 맞는 일이 있단다. 작은 심부름인데 들어주겠지?”

상냥한 앤시아의 질문에 비앙카가 겁에 질린 눈을 깜박이며 고여 있던 눈물을 떨어트렸다.

아, 저거 내 주특기인데.

몇 년을 갈고 닦아서야 원하는 타이밍에 맞출 수 있게 된 걸 비앙카는 숨 쉬듯 손쉽게 해냈다.

“내쫓지만 않으신다면, 매질을 하신다 해도 참아 낼게요.”

심부름이라는데 굳이 또 매질을 언급한다. 마치 그게 앤시아의 뜻이라는 듯.

이런 과도한 반응은 여주인공에게 장착된 기본 옵션인 걸까. 아니면 앤시아에게만 저런 식인 걸까. 궁금하지만 알아보는 건 차차 하면 될 일.

“비앙카가 그렇게 맛있다고 하니 공작님께서도 맛보셨으면 좋겠구나. 주방에 아직 디저트가 남아 있겠지?”

“예, 마님. 하지만 공작님께서 좋아하실지는…….”

“그러니 다 맛을 본 비앙카에게 심부름을 보내야지. 비앙카, 공작님께 디저트를 가져다드리고 맛을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뜻밖의 제안에 비앙카는 두어 번 눈을 연달아 깜박인 뒤 활짝웃었다.

“네, 네. 공작님이 꼭 드실 수 있도록 열심히 설명할게요.”

“그래. 잘 부탁할게.”

쓸데없이 앤시아와 엮이며 시간 낭비하기보다 비앙카를 공작에게 보내는 편이 원작의 흐름에 도움이 되리라.

비앙카는 슬그머니 양팔을 하녀들에게서 빼내며 조심스럽게 제할 말을 했다.

“저기, 가기 전에 세수 좀 해도 될까요?”

어서

따라오기나

“후우…….해.”

“네. 가는 길에 잠깐만 들를게요. 어차피 공작님 집무실 가는 길에 제 방이 있으니까 잠깐 들르면 돼요.”

공작가에 온 지 하루 만에 공작님의 집무실 위치까지 파악하고 있는 하녀에 대해 성실하다고 해야 할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봐야 할지 하녀들의 시선이 좋지 않았다.

“주인마님께서 처음으로 제게 맡기신 일이니 꼭 잘 해낼게요.” ”

“넌 진짜 따로 교육 좀 받아야겠다. 조용히 하고 가자, 좀.”

언제 울었냐는 듯 들떠 보이는 비앙카를 요리장과 함께 온 하녀가 데리고 나갔다.

한바탕 소란스러움이 지나가자 하몬이 빈 접시를 살짝 들어 앤시아의 앞에 내려놓았다.

마치 비싼 접시지만 마님이 원한다면 던지라는 듯.

앤시아가 항아리 파괴자라는 소문이 요리장에게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앤시아는 빈 접시를 오히려 안쪽으로 안전하게 밀어 놓았다.

하몬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새로이 챙겨 온 디저트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공작 부인에게 잘하는 건 당연할지 몰라도 매번 하몬은 과했다. 앤시아에게 뭐라도 하나 더 먹이려는 듯 많은 종류의 과자와 케이크 등을 늘어놓았다.

‘나한테 잘 보여 봤자 딱히 좋을 거 없는데 너무 애쓰잖아. 어차피 반년 뒤면 사라질 거라 애쓸 필요 없는데.’

하몬의 노력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몇 달 뒤면 사라질 공작 부인에게 아무리 잘해 줘 봤자 허무해질 뿐이었다.

하몬에게 충고를 해야 하나 망설이던 앤시아는 자신의 목표를 떠올리며 마음을 독하게 먹기로 했다.

‘크든 작든 악행을 쌓아야지. 악녀가 되겠다며 자꾸 무른 생각만 하기야? 내가 뭐, 혀를 자른대?

팔을 꺾는대? 못되게 굴고 겸사겸사 맛난 음식 좀 먹으면 좋지.’

호의 가득한 요리장을 향해 제멋대로 굴며 평판을 깎아야 했다.

“하몬.”

“헉, 제, 제, 제 이름을 기억해 주셨습니까?”

햄 이름이랑 비슷해서 기억하기 쉬웠지만.

“화채 알아?”

“모릅니다. 하지만 마수를 잡아 채를 쳐서라도 만들어 내겠습니다.”

이 동네는 죄다 마수랑 연관시키는 거야?

그보다 잘못된 정보가 전해져 마수 육회를 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혹시 오라버니가 주고 간 레시피 같은 건 없어?”

“있습니다. 찾아보고 즉각 대령하겠습니다. 애들아, 가자!”

“네!”

무슨 출정 준비도 아니고 너무도 비장하게 돌아서는 요리장과 하녀들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동부에서는 수박이나 복숭아를 구하기 쉬웠으나 북부에서는 구할 수 있을지 걱정되면서도 이런 식으로 심술을 부리는 게 쁘띠악녀다운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호위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앤시아는 덩그러니 남아 버린 빨래바구니를 보고 비앙카를 떠올렸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뻔뻔할 정도로 해맑던 비앙카가 순식간에 돌변하여 여린 새처럼 가냘프게 울먹이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고작 오늘 일 하나로는 확신하기 힘들었다.

‘비앙카가 천연인지 의도적인지두고 보면 알겠지.’

어느 쪽이든 득이 될 것 같아 앤시아는 가볍게 손을 털고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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