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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49화 (49/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49화.

그리고 그날 오후.

다행히 나단이 남기고 간 레시피에 화채도 있었는지 기사단이 과일 수급을 위해 비장한 기세로 출정 준비를 마치고 영지를 빠져나갔다. 마수 사냥도 아니고 고작 과일을 구하러 나가는 길인데 그렇게까지 비장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앤시아의 생각과 달리 과일을 구하는 일은 결코 그렇게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화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과일을 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며칠을 밤낮없이 말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항구였다. 하지만 이는 숲을 돌아가는 안전한 길일 경우였고 마수가 득실거리는 산맥을 가로지르는 위험을 무릅쓰면 하루로 단축할 수 있었다. 때문에 공작가 기사단이 비장하게 출정한 것이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앤시아는 뒷목이 뻐근해져 왔다.

공작가의 기사단이 고작 과일심부름을 하러 우르르 몰려 나가는 모습을 누가 볼까 두려웠다.

아무리 공작 부인을 위해서라지만, 과한 반응이었다.

“잠깐. 리샤르…… 아니, 공작님 지금 집에 있지 않아? 이 상황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는 거야?”

“예, 마님. 요리장 하몬이 직접 주인님께 과일 수급을 요청드렸습니다.”

“주인님께서 승마에 능하고 몸이 가벼운 기사들 위주로 보내 주셨으니 금방 돌아올 거예요.”

게다가 아무나 대충 뽑아 보낸 것도 아니었다. 적절한 기사를 선별하기까지 했단다.

줄리와 엘리가 뿌듯해하는 얼굴을 보니 앤시아가 욕먹을 일은 없을 듯했다.

요리장이 화채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할 줄 알았는데 기사단까지 나설 줄이야.

소소하게 악행을 쌓고자, 불합리한 떼를 쓴 것뿐이었는데 일이 커졌다.

“아니, 이건 정말 악덕 고용 주…… 아, 맞네. 악녀 맞네. 악녀인데……. 왜 내 속이 이렇게 쓰린 거니.”

혼잣말로 죄책감을 덜어 보려 했으나 마음만 무거워졌다. 가성비를 따지면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앤시아는 보이지 않는 금화가 바닥에 뿌려져 사라지는 것 같았다. 결국, 불안한 마음에 쉬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렇게 저택 안을 돌아다니던 중 로사와 비앙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웃으며 대화 중인 두 사람을 보며 앤시아는 진심으로 놀랐다.

“로사가 저렇게 웃을 수도 있었어?”

호의 가득한 로사의 웃음이 낯설었다. 비앙카 역시 그런 로사에게 겁먹을 이유가 없기에 해맑은 웃음을 보였다.

저걸 여주 버프라고 해야 할지 로사와 비앙카 사이의 모종의 무언가가 있다고 봐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로사가 무언가를 꾸몄다고 생각하기에는 비앙카가 저택에 들어온 건 앤시아의 권유 탓이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여주인공.

마성의 여주 비앙카.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당장 뒤에서 있는 줄리와 엘리의 못마땅한 한숨이 선명했다.

“앗, 주인마님?!”

잠시 지켜보는 사이 비앙카가 앤시아의 시선을 알아채고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왔다. 로사는 그 모습을 못마땅하다는 듯 힐끗 보고는 앤시아를 향해 마지못해 목만 살짝 움직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앤시아가 또 쫓아올까 걱정되는 듯 재빨리 뒤돌아섰다.

뒤이어 앤시아를 발견한 비앙카가 해맑은 웃음을 보이며 빠르게 다가왔다.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는 비앙카를 향해 앤시아는 적당히 말을 걸어 주었다.

“로사를 어려워하지 않는구나.

아는 사이니?”

“로사 님께서 공작가에 대한 일을 많이 알려 주셨어요.”

아는 사이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앤시아는 그리 크게 중요치 않은 사항을 다시 묻기보다는 비앙카와 만난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줄리, 비앙카와 함께 창고에 다녀오겠니? 이번에 오라버니가 가져오신 물품 중 붉은색 상자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를 비앙카에게 주렴.”

“예? 비앙카에게 선물을 주시는 건가요?”

평소라면 앤시아의 지시에 토를 달지 않았을 엘리에게서 서운함섞인 질문이 돌아왔다. 비앙카가 어지간히 밉보였구나 싶어 앤시아는 옅게 웃었다.

“아니. 공작님께 드릴 선물인데 비앙카가 가져다주면 좋을 거 같아서.”

그걸 왜 비앙카에게 심부름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올리는 엘리에게 앤시아는 생긋 웃어 보였다.

“엘리가 하고 싶니? 그럼 네가 가져다드려도 돼.”

“아, 아니에요, 마님.”

“저요! 제가 꼭 가져다드리고 싶어요, 주인마님.”

혹여나 엘리에게 시킬까 걱정됐는지 비앙카가 대뜸 끼어들었다.

이렇게나 선명한 감정을 드러내는 여주인공의 반응이 앤시아는 만족스러웠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감추지 않았다.

“그래. 꼭 비앙카가 해 줬으면 해.”

“네, 마님. 감사해요.”

이게 감사할 일이 아닐 텐데 비앙카는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엘리가 비앙카를 데리고 창고로 향하자 줄리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었다.

“마님, 아직 결혼하신 지 한 달도 되지 않으셨습니다. 벌써 관대한 안주인이 되고자 노력하시지 않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나 관대해 보여?”

“예. 너무 애쓰시다 또 쓰러지시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별로 애쓰는 거 없어. 그보다 자꾸 틀어져서 문제지.”

앤시아는 작은 악행 하나 보태려다 갑자기 마수의 숲을 뚫고 가게 된 기사단이 떠올라 다시 우울해졌다.

종일 기사단이 돌아오기를 전전긍긍하다가 다음 날 오후가 돼서야 흙먼지를 날리며 돌아온 기사들을 보니 위통이 몰려왔다.

상처투성이로 돌아온 기사들과 그들이 바리바리 소중히 들고 온 과일들.

흙먼지에 핏자국까지 가득한 기사들 소식에 놀란 앤시아는 곧장 달려 나왔다. 상처투성이의 기사들은 밖으로 나온 앤시아를 보자마자 승전보를 들고 온 것처럼 과일 꾸러미를 들어 보였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해 왔습니다.”

“가게 주인이 저희를 보고 도적인 줄 알고 도망치는 바람에 값을 치르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요.”

“그러게 곰 가죽은 벗고 들어가라니까.”

저마다 할 말이 많은지 시끌벅적 웃음을 터트리는데 그때마다 팔의 상처나 뺨의 상처에서 핏물이 픽픽 새어 나왔다.

‘와, 나 진짜 악녀 짓도 정도껏하지. 이건 아니지. 스케일이 너무 커졌잖아.’

그냥 접시나 던질 걸 그랬다.

반년 뒤, 어쩌면 지금처럼 비앙카를 리샤르에게 자주 보내다 보면 더 빨리 이혼할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기사들은 고작 반년도 채 가지 못할 공작 부인을 위해 제 몸 다쳐 가면서도 기꺼이 다시 가겠노라 웃고 있었다.

“미안해요. 내가 괜한 소릴 해서…….”

그들을 향해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안 그래도 자그맣고 빛 가루를 뿌린 것처럼 환한 앤시아가 그린 것같이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흘려 내자 한 폭의 그림처럼 사랑스러웠다.

기사들은 저마다 품에 안은 과일 꾸러미를 사용인에게 넘기고 앤시아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만한 기사의 예는 아니었으나 울고 있는 작은 주인마님을 달래고자 그 단단하다던 흑의 기사단의 무릎이 흙바닥에 푹푹 박혀 들었다.

“다음번에는 이깟 상처 따위 입지 않고 더 빠르게 다녀오겠습니다.”

“주인마님께서 반겨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희 모두 충분합니다.”

“날이 차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 십시오. 요리장이 요리를 금방 완성할 겁니다.”

기사들 모두 어린아이를 달래듯, 아름다운 여인을 대하듯 다정하면서도 상냥했다.

흑곰들이 우르르 주저앉은 듯한 광경에 앤시아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면서도 환하게 웃는 앤시아에게 기사들은 저마다 손수건을 내밀고자 품을 뒤졌으나 죄다 피가 튀었거나 흙먼지가 가득했다.

“부인.”

기척도 없이 다가온 리샤르가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앤시아의 뺨을 가볍게 눌렀다.

앤시아는 종일 식사를 같이하자는 말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피해 왔으나 이번만큼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

무의식중에 리샤르의 가벼운 접촉을 저도 모르게 받아들였다.

“저들의 흉측한 모습에 놀란 건가?”

자기 기사들을 보고 흉측하다고?

앤시아는 모두에게 보이도록 크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저 없이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무서워서가 아니고 미안해서 우는 거예요.”

“미안할 이유가 있나? 저들은 공작가의 기사단. 부인, 그대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아.”

사람을 향해 ‘사용해도 좋다’는 표현을 당연하다는 듯 사용하는 리샤르에게 앤시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정작 리샤르의 발언에 상처투성이의 기사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곰 가죽을 두른 데다 상처투성이라 전부 어른이라 생각했는데 저 빛나는 눈을 보니 앳된 흔적이 드러났다.

‘설마 나보다 어린 거 아냐?’

앤시아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중요한 기사 분들을 고작 이런 일로 부를 수 없어요.”

“이들은 아직 흑의 기사단이 되기에 수련이 부족해. 마수 토벌에도 동원되지 않는 햇병아리들이지. 부인이 원한다면 몇 번이든 숲을 지날 것이오.”

“예! 각하와 마님을 위해서라면 밤이든 낮이든 숲을 달릴 겁니다!”

“마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들뜬 기사들을 보니 진짜 애들이었나 보다.

“전 정말로 괜찮아요.”

저택의 모든 항아리를 깨는 한이 있어도 화채 타령은 절대 두번 다시 하지 않으리라.

앤시아의 각오를 느꼈는지 리샤르는 오히려 부복한 기사들을 향해 덤덤하게 명령했다.

“미숙한 꼴을 보이니 부인이 놀라지 않는가.”

“정진하겠습니다!”

“곧바로 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치료도 안 하고 곧장 연무장으로 달려가려는 기사단을 향해 앤시아가 급하게 만류했다.

“훈련이라니, 다들 치료부터 하셔야죠.”

“괜찮습니다. 마님을 위한 상처는 명예의 훈장이니까요.”

“눈토끼가 긁고 간 게 영광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크흠,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다들 연무장으로 가자!”

“와아아!”

앤시아가 더 말릴 틈도 없었다.

절도 있는 자세로 빠르게 멀어지는 기사단을 보며 앤시아는 얼떨떨했다.

고작 공작 부인의 간식을 위해 공작가 기사단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저들이 어떤 이유로든 정진해서 마수 토벌에 합류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또한 공작가에는 좋은 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앤시아는 문득 아직도 저택에 머무는 리샤르의 존재가 의아했다.

지금쯤 마수 토벌에 열을 올리고 있을 공작이 공작가에 머무는 이유가 수상했다. 혹시 비앙카가 예정보다 일찍 등장한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공작님, 마수 사냥하러 안 가시나요?”

“날 보내고 싶은가 보군.”

정곡을 찔린 앤시아는 당황했으나, 침착하게 오히려 생긋 웃음을 보였다.

매일 앤시아를 보는 하녀들조차 가슴에 손을 얹고 진정해야 할 만큼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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