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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51화 (51/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51화.

리샤르가 굳이 사용인을 통해 말을 전할 땐 언제고, 그새를 못참고 찾아왔다. 이런 걸 보고 채 신머리 없다고 하는 건가. 앤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그가 직접 온 덕에 이쪽이 애써 힘들게 찾아갈 일은 어져서 좋았다.

“공작님. 제가 많이 피곤해서 지금 자려던 참인데 그래도 될까요?”

“부인이 원한다면.”

“네, 감사해요. 그럼 공작님도안녕히 주무윽?”

고개를 까딱하며 가볍게 인사하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들렸다. 최근 자주 겪는 일이라서 놀라진 않았다.

앤시아를 덜렁 안아 든 리샤르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단단한 품에 안긴 앤시아는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공작님, 저는 제 방에서 자면 되는데요.”

“전에 보니 추위를 많이 타더군. 내 아내가 공작가에서 웅크리고 자게 둘 수는 없지.”

방금까지도 훈훈한 방 안에서 뒹굴뒹굴하던 앤시아는 곧바로 반박했다.

“아닌데요. 벽난로 있어서 하나도 안 추워요.”

“오늘부터 추워질 거요.”

리샤르의 영문 모를 소리에 앤시아는 당황했다.

“설마 공작가에 땔감이 떨어진건 아니죠?”

“필요하다면 그렇다고 해 두지.”

땔감 한 트럭보다도 비싼 마석을 가루로 만들어 불쏘시개로 쓰던 충격적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무엇보다 벽난로 옆에 예쁘게 차곡차곡 쌓인 나무 장작은 뭐란 말인가.

리샤르는 제대로 된 핑곗거리도 없이 무작정 앤시아를 데리고 부부 침실로 향했다. 막무가내인 리샤르의 행동에 앤시아의 머릿속은 의문투성이였다.

‘아니 왜? 원래대로라면 소 닭보듯 해야 할 사람이 왜 이러는 건데?’

비앙카까지 등장했는데도 앤시아를 찾아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주변이 휙휙 지나갈 만큼 빠른 걸음에도 안겨 있는 앤시아는 편안했다. 리샤르는 매번 놀라울 정도로 앤시아를 흔들림 하나 없이 안정적으로 안았다.

그러나 앤시아는 공작 부인이었다. 부부 사이라고는 하나 고위귀족인 공작이 이런 식으로 여인을 훌렁 안아서 이동한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앤시아의 몸이 불편하더라도 하녀들이 부축하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호위에게 부탁해도 될 일이었다.

‘이 친밀한 행동은 뭘까.’

앤시아의 발로 오갈 때는 상당히 멀게 느껴졌던 부부 침실에 순식간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와 마석이 만들어 낸 훈훈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복도를 빠르게 지나오느라 살짝 한기가 들었던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거 소모성으로 알고 있는데 벽난로랑 같이 사용하다니. 공작가는 역시 다르네.’

하긴 공작가에 넘쳐 나는 마석을 생각하면 못 쓸 것도 없었다.

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한 최상품마석은 모조리 황족이 쓸어 가지만 이런 소모품은 얼마든지 사용 할 수 있었다. 남아도는 마석 일부를 챙겨 백작가에 보내면 겨울 철 마차 안에서 쓰기 딱 좋지 않을까.

작은 마석의 가치를 가늠하느라 골똘히 생각에 잠긴 앤시아를 빤히 바라보던 리샤르가 손을 뻗었다.

“코끝이 빨개졌군.”

리샤르는 앤시아의 작은 변화를 발견하고 그걸 또 지나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리샤르가 원작과 달라졌다. 그의 행동이나 반응 모두 물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앤시아에게 지나치게 가까웠다.

앤시아는 대놓고 침대 구석으로 물러나 이불로 온몸을 돌돌 말며 거리를 벌렸다. 예전이라면 약한 척, 착한 척하느라 천사의 미소를 흉내 냈을 앤시아였다. 하지만 여주인공인 비앙카가 등장한 이상 굳이 리샤르의 호감을 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제 방이랑 별로 차이도 안 나는데 굳이 옮기느라 몸만 식었어요.”

“다행이군. 조금 식는 편이 안을 핑계가 될 테니까.”

정면으로 리샤르를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제 귀를 의심할 뻔했다. 야릇한 의미가 아닐지라도 리샤르에게서 앤시아를 향한 호의가 확연히 드러났다.

무뚝뚝해야 할 리샤르답지 않은 발언과 행동에 앤시아는 혼란스러웠다.

‘얘 왜 이래. 왜 이렇게 들이대 는데?’

“공작님. 정말 피곤해서 그러는데 먼저 자도 될까요?”

“기꺼이.”

대답과 동시에 리샤르의 셔츠가 무슨 마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추를 저렇게 빨리 풀 수 있는 것도 검술 능력이랑 관계가 있는 걸까?’

앤시아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다가오는 리샤르를 쳐다봤다. 그의 단련된 육체는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훌륭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앤시아의 시선을 잡아끈건 점점 가까워질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상흔들이었다.

누구보다도 마수 토벌에 진심이며 그만큼의 실력을 갖춘 그윈티드 공작. 그랬기에 저리 많은 상처를 입어 왔다는 걸 알지 못했다.

‘굉장히 강해 보이지만, 순탄한 삶은 아니었나 보네.’

무수히 많은 상흔에 놀라고 있는 사이 리샤르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잠깐 방심한 사이 이마와 콧등에 뜨끈하면서도 탄탄한 피부의 감촉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침대 속으로 들어온 리샤르가 앤시아를 능숙하게 끌어안았다.

뜨거운 체온과 찰진 근육이 얼굴에 닿자 앤시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젖히면서도 태연하게 요구했다.

“저기요, 공작님. 진짜 피곤해서 푹신한 베개를 베고 싶은데요.”

언제 들어왔는지 앤시아의 목 아래를 단단하게 받친 탄탄한 팔뚝 같은 거 말고.

“부인이 내 말을 들어준다면.”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 앤시아는 살짝 몸을 뒤로 움직여 거리를 벌렸다. 그래봤자 주먹 두 개 정도의 거리였지만 그나마 눈을 떴을 때 리샤르의 가슴이 아닌 얼굴을 마주볼 수 있었다.

앤시아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리샤르의 눈에 호의가 엿보였다.

목 아래와 허리를 받치고 끌어안은 양팔이 단단해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플정도로 힘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 불편하진 않았다.

적극적이다 못해 불도저같이 들이대는 리샤르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원작 속 리샤르는 앤시아가 요구하면 선선히 물러나 주었다.

실제 첫날밤에서도 리샤르는 앤시아가 거부하자 곧장 몸을 물려 줬었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샤르는 방심한 사이 어느 순간 훌쩍 다가와 버렸다.

‘원작과 달라진 이유가 뭘까.’

생각할 수 있는 변수는 역시 비앙카였다. 반년을 기다려 준다고 약속을 했음에도 이런 식으로 얽히려는 이유를 명확히 해야 했다.

“공작님. 제게 신경 써 주시는 이유가 비앙카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부인은 그녀가 나와 관계있다 여긴다면 어째서 그리 태연할 수 있지? 저택에 머물게 하고 방까지 내주다 못해 자꾸만 내게 보내다니. 부인은 그 평민이 내 정부라도 괜찮다는 건가?”

당연하지. 여주인공의 존재야말로 내가 악행이 어설프더라도 확실한 이혼 하이패스가 돼 줄 거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패였다.

“네, 괜찮아요. 오히려 나중에 끼어든 제가 미안하죠.”

여주인공의 존재를 떠올리자 진심이 섞여 평소보다 환한 웃음을 내비쳤다. 이에 리샤르의 안색은 오히려 어두워졌다.

“공작님께 연인이 있다면 전 이해할 수 있어요. 아니, 전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후……. 처음부터 말했지만, 그 평민과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뿐더러 그날 본 게 처음이오.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이 끔찍한 오해를 풀 수 있는 건지 모르겠군.”

리샤르가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걸 보니 역시 예상보다 조금른 시기였나 보다.

“그렇군요. 오해해서 죄송해요.”

앤시아가 순순히 사과하자 리샤르는 오히려 당황한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처음 세 사람이 만났던 그날에도 분명 오해라고 말했으나 앤시아는 계속해서 비앙카를 리샤르에게 심부름을 이유로 보내왔다.

지금도 웃는 얼굴로 리샤르에게 사과해 오는 앤시아는 귀족 여인 답게 남편의 외도를 이해하고 있음을 돌려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리샤르는 이참에 확실히 결론짓기로 했다.

“오해가 풀렸다면 그 평민은 내보내도록 하지.”

“그건 안 돼요.”

비앙카를 내보내는 건 안 될 일이었다. 리샤르가 괜히 앤시아의 눈치 보느라 여주인공을 멀리하다 틀어지면 큰일이었다. 지금은 감정이 여물지 않았을지 몰라도 분명 비앙카와 계속 마주치게 된다면 리샤르 역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앤시아는 필사적으로 리샤르와 눈을 마주치며 애원했다.

“오해가 풀렸다면 오히려 내보낼 이유가 없어요.”

“내보내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지.”

리샤르의 단호한 태도에 앤시아는 다급해졌다. 지금 비앙카를 내보냈다가 리샤르와 접점이 사라지면 곤란했다.

“비앙카는 공작가에 하녀로 들어오게 되어 정말 기쁘다고 했어요. 밝은 성격이라 공작님께 심부름 보낼 때 기죽지 않고 기꺼이 가 주는 좋은 아이예요.”

“아이? 그 평민은 부인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

현실 나이로 치면 비앙카가 어리다 보니 말실수를 했다. 이곳에서의 나이 차라고 해 봤자 한 살 차이 정도. 앤시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빙긋 웃었다.

“공작가의 사용인은 전부 제가 책임져야 할 아이들과 같다고 생각해요. 전 한번 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여간해선 놓지 않아요.

그러니 비앙카도 놓지 않을 거예요.”

딱히 앤시아는 비앙카를 책임질 생각은 없었다. 단지 비앙카를 가까이 두기 위해 그럴싸하게 말을 꾸며 내니 리샤르는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용인에 대해서는 부인에게 맡긴다고 했으니 뜻대로 하시오.”

“감사해요, 공작님.”

“단, 오해하지 말고.”

“물론이죠.”

앞으로 두 사람이 가까워지더라도 앤시아는 눈치 못 챈 척하기로 다짐했다.

리샤르가 오해를 풀고자 부부 침실로 자신을 데려온 것임을 알게 된 앤시아는 일이 해결되니 곧바로 잠이 쏟아졌다. 슬금슬금 리샤르가 품으로 끌어당기기에 앤시아는 자리가 불편하다는 듯 몸을 뒤척여 등을 보였다.

‘비앙카와 둘이 꽁냥 댈 것이지 왜 나한테 달라붙을까. 아, 맞다.

꽁냥 대기에 아직 좀 이른 시기였지. 아우, 골치 아프게.’

등 돌린 앤시아의 허리를 끌어 당겨 완전히 품 안에 가둔 리샤르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느긋하게 속삭였다.

“부인, 화채를 준비해 두었는데 정말 먹지 않을 건가?”

그놈의 화채.

물론 맛은 좋았다.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얼음 동동 뜬 화채를 먹는 사치를 부린다니 상상만으로도 입맛이 돌았다. 하지만 당장은 긴장이 풀리며 몰려든 수마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네. 내일 먹을게요.”

“그럼 다른 먹고 싶은 건? 저녁에 보니 음식이 영 입에 안 맞는 것 같더군.”

“괜찮아요. 원래 조금 먹거든요.”

졸음이 몰려온 앤시아는 적당히 대답했으나 리샤르는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계속 말을 걸어왔다.

“레슬리 소백작이 요리장에게 부탁해 만든 음식은 모조리 맛을 봤다고 들었는데.”

갑작스레 나단을 언급한 리샤르탓에 앤시아는 잠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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