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52화.
“레슬리 소백작이 요리장에게 부탁해 만든 음식은 모조리 맛을 봤다고 들었는데.”
갑작스레 나단을 언급한 리샤르탓에 앤시아는 잠이 달아났다.
이걸 핑계로 또 무슨 소릴 하려는 건가 의심스러워 눈을 굴리자 느릿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괜찮으니 원하는 걸 말해 봐, 부인.”
자꾸 뭐 먹고 싶냐고 묻지 말라고, 무서우니까.”
앤시아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아직 상처의 피도 마르지 않은 기사단이 또다시 재료를 수급하겠다며 위험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아예 북부에서 나는 식자재 리스트를 받아 본 후에 메뉴를 말해야겠다 싶어 앤시아는 적당히 대답했다.
“생각해 볼게요.”
“뭐든 말해. 그대의 이 홀쭉한 배를 채울 수 있도록.”
앤시아의 납작한 배 위를 뭉근하게 쓰다듬는 리샤르의 커다란 손이 뜨거웠다.
“꺅!”
찰싹.
리샤르가 남편이라는 걸 깜박하고 손등을 때릴 만큼 앤시아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랐다. 이걸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앤시아가 머뭇거리는 사이 어깨와 목 사이로 짧은 숨이 와 닿았다.
“고양이가 할퀴어도 이보단 느낌이 오겠군.”
고양이가 할퀴면 더 아픈 게 당연하지.
차마 말은 못 하고 앤시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다행히 손등을 맞은 리샤르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낮게 웃으며 앤시아를 온몸으로 끌어 안았다.
손등 좀 때렸다고 사람을 압박해서 골로 보내려는 건가 의심스러울 만큼 빈틈없는 포옹이었으나 뜻밖에 답답하지는 않았다.
“부인은 참으로 연약해. 가볍게 만지는데도 눌리고 흔적이 남지.”
“그럼 좀 조심해 주시면 좋을 텐데요.”
앤시아의 본심이 쑥 튀어나왔다. 앤시아는 자꾸만 리샤르에게 내숭 떠는 걸 까먹는 제 입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그 어떤 때보다도 조심하고 있소. 부인에게는 내 노력이 전해 지지 않는 것 같아 아쉽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리샤르는 이렇게까지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앤시아를 편하게 여기는 게 대화를 하면서 느껴졌다. 단지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쫓아가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책을 통해 내적 친근감이 어느 정도 형성돼 있는 앤시아보다도 더 빠른 감정 변화였다.
떠올려 보면 단단한 침대 헤드에도 손자국이 남을 만큼 악력이 강한 남자였다. 그런 리샤르가 앤시아의 팔이며 손을 쓰다듬거나 매만지는데도 아프기는커녕 간지러워 잠이 솔솔 몰려왔다.
그만큼 그의 손길은 전과 달리 몰라보게 섬세해졌다.
“노력…… 해 주시는 건 알아요.
그런데 손은 좀 놔주시면 …….”
“체온도 낮아. 이러니 추위를 타지.”
“아, 네. 인간 난로가 돼 주셔서 감사드려요.”
앤시아의 작은 손이 손끝까지 완벽하게 리샤르의 커다란 손안에 감춰졌다. 등 뒤에 달라붙은 리샤르의 체온으로 온몸이 후끈후끈해졌다.
어색함과 불편함은 시간이 지나자 줄어들고, 곧 앤시아는 등 뒤에 붙은 리샤르가 익숙해졌다.
실제로 따뜻해지기도 했고 종일 피로했던 몸은 수마를 이기기 힘들었다. 이내 굳어 있던 앤시아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닿는 곳마다 체온이 옮겨 가는 게 재밌군.”
“그런가요……. 하암…….”
“부인, 아직 드레스를 벗지 않았군. 불편할 테니 도와주지.”
점점 감겨드는 눈꺼풀에 저항하기를 포기하려는데, 리샤르가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거머쥐며 속삭였다. 언제 졸음이 왔냐는 듯 눈이 번쩍 뜨였다.
“네? 아뇨. 완전 편한데요. 추우니까 벗기지 말아 주실래요?”
리샤르의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마술처럼 사라질 옷이라는 걸 알기에 앤시아는 드레스를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첫날밤에는 더 얇은 차림도 했었으니, 이제 와새삼스러울 수 있으나 이상하리만치 달라붙는 리샤르를 앞에 두고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앤시아는 데굴데굴 굴러 온몸에 이불을 휘감으며 침대 끝으로 도망쳤다. 그런 앤시아의 모습에 리샤르의 눈가가 조금이지만 둥글게 휘어졌다.
언제나 그렇듯 눈빛에 담긴 감정은 다채로웠으나 표정만은 항상 무뚝뚝한 리샤르였다. 훤히 드러난 리샤르의 선명한 감정에 앤시아의 머릿속에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공작에게서 최초의 웃음을 끌어낸 이는 비앙카였다.」
여주인공이 해야 할 일을 앤시아가 해내 버렸다. 큰일 났구나 싶어 앤시아는 사고가 정지했다.
‘와, 이건 위험하겠는데.’
중요 이벤트가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일단 못 본 거로 치자. 없었던 일로 치는 거야.’
어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원작은 정해져 있고 최대한 그에 맞춰 가면 예정대로 이혼 땅땅. 안전하고 평화로운 솔로 라이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앤시아는 마치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얼른 등을 돌렸다.
이불을 돌돌 말고 등 돌린 앤시아의 행동은 리샤르에겐 추위를 타는 듯 보였다. 리샤르는 그녀를 위해 난로로 향했다. 추위를 핑계로 끌어안는 것도 좋지만 앤시아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리샤르는 앤시아가 지나치게 연약하다는 걸 잊지 않았다.
리샤르가 멀어지는 기척에 앤시아는 이불 밖으로 눈만 내놓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장작을 집어 난로에 넣는 일련의 동작만으로도 리샤르의 성난 등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졸음이 몰려와도 참아야 했다.
여기는 호랑이 굴이다. 방심하면 잡아먹힐 수 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리샤르의 커다란 등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리만치 안심이 되었다.
장작을 하나 더 던진 리샤르가 되도는 짧은 시간 동안 앤시아의 눈은 거의 감겨 있었다. 그새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앤시아의 모습에 리샤르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보였다.
동부에서 온 작은 신부는 겁이 많아 보이는데도 때때로 대범했다.
앤시아는 리샤르가 아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그간 리샤르는 자신의 눈을 피하거나 숨는 이들을 익히 봐 왔다. 그들은 리샤르에게 명백한 공포, 불쾌감,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냈고 그건 리샤르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앤시아는 달랐다. 앤시아의 행동에서는 미약한 호의마저 느껴졌다.
돌돌 만 이불을 꼭 쥔 채 꾸벅꾸벅 졸다 리샤르와 눈이 마주치자 오히려 편안히 눈을 감는 앤시아에게선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찾을 수 없었다.
앤시아의 이런 반응은 리샤르에게 새로운 감정을 불러왔다. 마치 심장 부근을 간질이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리샤르는 제 안면 근육이 의지와 상관 없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앤시아는 리샤르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흔들어 놓는지 그녀는 알까.
조금 전만 해도 앤시아는 리샤르가 끌어안으면 불편해할지언정 진심으로 피하지는 않았다. 가볍게 밀어내거나 투덜거릴 때조차 앤시아가 내보인 감정은 공포나 불쾌감이 아닌 친근감이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여인. 같은 성을 가진, 함께 살아갈 존재.
리샤르는 커다란 침대 귀퉁이에 동그랗게 이불과 뭉쳐 한 덩어리가가 된 앤시아가 퍽 사랑스러웠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리샤르에게 이런 식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다 문득 리샤르는 낯선 무언가가 창가에 비치는 것을 보았다.
그건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었다.
기쁨? 행복? 제 얼굴에 선명하게 드러난 감정이 보였다. 좀처럼 그에게 모습을 보인 적 없는 낯설고 어색한 감정이 그의 얼굴 위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내가 웃고 있다고?’
내가 이토록 쉽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 행복해지렴. 너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단다.
어머니가 아버지인 선대 공작의 요양을 위해 함께 떠나던 날, 제게 마지막으로 남긴 부탁이었다.
어머니가 원한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웃음이라니, 검을 잡은 이후 리샤르가 가져 보지 못한 것이었기에 보여 줄 수 없었다. 그때는 그토록 어렵기만 했던 감정 하나가 어느새 리샤르 안에 들어와 있었다.
손이 닿지 않는 가슴 안쪽이 간지럽고, 자꾸만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는 이상한 감각이 싫지 않았다.
한참을 리샤르가 다가오지 않자 기분 좋게 잠들어 가던 앤시아는 이상함을 느꼈다.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눈꺼풀을 억지로 뜨려 했다.
앤시아의 부드러운 녹안이 살며시 비치는 것만으로도 기묘한 감각은 점점 더 퍼져 가 리샤르의 손끝까지 간지럽혔다.
이 손에 부드럽고 말랑한 앤시아를 쥐고 싶었다.
쥐고 싶으면 쥐면 될 일이었다.
다치지 않도록 충분히 연습했다.
적당한 힘으로 아프지 않게 손에 쥐면 되는 단순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불을 돌돌 말고 침대 끄트머리에 작게 웅크린 앤시아의 행동에서 리샤르와 닿고 싶어 하지 않음을 읽을 수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앤시아가 불편해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끌어안았었다. 앤시아의 소소한 감정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랬던 자신이 새로운 감정을 자각하자 생각이 많아졌다.
앤시아의 마음을 짐작하려 했고 그녀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아니 왜 저러고 서 있는 건데?
지금 노려보는 거 맞지?’
좀처럼 리샤르가 침대로 돌아오지 않자 앤시아는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잠은 이미 다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들러붙을 때는 언제고 장작 던지는 소리가 나더니 그 후로 죽침묵이었다. 찔리는 게 있는 상황에서 침묵만큼 사람 불편하게 하는 게 있을까.
‘아니지. 내가 찔릴 게 뭐가 있어? 그냥 남주 웃는 얼굴 좀 여주보다 먼저 본 것뿐인데.’
신경 쓰이는 게 침묵이면 깨면 된다.
“공작님?”
가볍게 불린 호칭에 리샤르의 풀어졌던 얼굴이 오히려 굳었다.
웃었다 찡그렸다. 오늘따라 바쁜 리샤르의 안면 근육이 힘들어 보였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앤시아는 여전히 말없이 눈만 마주하고 있는 리샤르에게 무해한 웃음을 보이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뭐가 지뢰인지 이제는 모르겠다 싶어 대충 말을 이어 갔다.
“저기, 장작 좀 더 넣어 주시겠어요?”
인간 핫팩 수준이던 리샤르가 등 뒤에서 멀어지자 오슬오슬 한기가 들었다. 어차피 잘 거라면 그냥 빨리 와서 뜨끈한 인간 난로가 돼 주든지 밀린 업무를 보러 가든지 해 줬으면 했다.
“유혹하는 건가?”
“……장작 좀 더 넣어 달라는 말이 그렇게 들릴 줄은 몰랐는데요.”
설령 앤시아가 리샤르를 유혹한다 한들 지금 보이는 그의 굳은 얼굴을 보면 대실패였다. 벽난로 앞에 서 있는 리샤르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앤시아와 눈을 마주치고 있을 뿐이었다.
어색한 공기에 앤시아가 다시 등을 돌리고 이불을 끌어 올리자 나무 장작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게 무슨 심술이냐 싶어 황당했다.
여전히 멀찌감치 서 있는 리샤르가 침대로 오든 말든 앤시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리샤르는 그런 앤시아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과 이런 식으로 몇 번이고 눈을 마주치고 편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던가.
부모와 검술 선생 외에 딱히 생각나는 이가 없었다. 그들마저도 리샤르의 덩치가 커지고 마수의 피를 뒤집어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더 이상 곁에 없었다.
부모조차 공작가를 떠난 지금, 리샤르를 온전히 한 사람으로서 따뜻하게 바라봐 주는 이는 앤시아가 유일했다.
리샤르를 공작으로서만 보고 무언가 바라는 이들과 달리 앤시아는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게 리샤르와 눈을 마주치고 제 할 말을 해 왔다. 그를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대했다.
‘그래서 특별해진 건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리샤르는 앤시아를 바라보며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