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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53화 (53/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53화.

스토커다.

그것도 대놓고 따라다니고 쳐다보는 대범하다 못해 공인된 스토커.

허우대가 멀쩡하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존재감의 그윈티드 공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최대한 멀찌감치 앉는 아내의 모습을 한 시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답답함에 앤시아가 찻잔에 손도 대지 않고 몸을 일으키자 곧장 따라 일어서며 한걸음에 다가섰다.

“어디를 가는 거지?”

너님 없는 곳이면 어디든지요.

속마음 대신 부드러운 웃음으로 적당히 답했다.

“답답해서 좀 움직일까 해서요.”

“오늘도 표적 맞히기를 할 거라면 같이 가지. 옆에서 자세를 봐줄 테니.”

눈빛만으로 앤시아를 뚫어 버릴 기세인 리샤르는 목소리만큼은 평온했다. 오히려 평소의 무뚝뚝함과 달리 느긋함마저 느껴졌다.

게다가 본 적도 없는 앤시아의 일과를 알고 있음을 드러내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아뇨. 팔이 뻐근해서 오늘은 힘들 것 같아요.”

“수프와 풀만 먹어 놓고 소화할게 배 속에 들어 있긴 한 건가?

그러고 보니 아직 먹고 싶은 음식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

다정한 음색을 내기엔 어색한,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말투였으나 그 속에 담긴 진심은 분명했다.

앤시아에게 오롯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리샤르의 행동에 동상처럼 서 있던 사용인들의 시선이 흔들렸다.

“공작님, 허리에서 손 좀.”

“부인을 혼자 내버려 두면 쓰러질 것 같아 그러지.”

앤시아는 지난밤 리샤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짐작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알기 힘들었다.

어제는 앤시아가 잠들 때까지 멀찌감치 서서 쳐다만 보더니 아침에 눈뜰 때는 품 안에서 깨어 날 만큼 밀접했다.

그러더니 아침부터 훤한 대낮인 지금까지 씻을 때 빼고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난밤 리샤르의 웃음을 본 이후로 앤시아는 계속 생각했다.

원작에서 최초의 웃음은 비앙카로 인한 것. 그러니 앤시아가 본것은 이미 비앙카에게 한 꺼풀속내를 비친 후의 리샤르일 것이라고.

앤시아가 모르는 새 이미 리샤르가 비앙카 앞에서 미소 지은 적 있을지도 몰랐다.

‘여주인공이 가져야 할 빅 이벤트를 한낱 조연인 앤시아가 차지했을 리 없지.’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된다. 리샤르와 비앙카,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란 감정이 여물지는 않았을 뿐 분명 호의를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저번처럼 비앙카에게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리샤르와 자주 부딪치게 하면 분명 더 많은 감정이 생겨날 것이다.

앤시아가 노력하자고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정작 리샤르는 그런 앤시아의 초조한 맘도 모른 채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러다 비앙카가 보겠다. 여주에게 아내에게 들러붙는 남주를 보여 주는 건 곤란했다.

“놔주세요, 공작님, 좀 쉬어야겠어요.”

“역시 내 아내는 몸이 약해서 자주 쉬어야 하는가 보군. 자리에 앉지.”

“아뇨, 전 이만 제 방으로 돌아갈게요.”

“충분히 쉬면 돌려보내 줄 테니 앉지 그래.”

종일 품에 안고 있으려는 리샤르와 버티는 앤시아 사이에 체력이 달리는 건 당연히 앤시아뿐이었다.

앤시아가 버티다 지쳐 끌려가니 리샤르는 주저 없이 앤시아를 끌어안은 그대로 소파에 앉았다.

리샤르는 소파에, 앤시아는 소파의 폭신함과는 거리가 먼 단단한 돌덩이 같은 남편의 허벅지 위에.

애정이 철철 넘치다 못해 불타 오르는 연인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기가 막혀서 빤히 쳐다보자 리샤르가 아무렇지 않게 입 끝을 올려 웃음을 만들어 냈다. 밤새웃는 연습이라도 한 것인지 제법 능숙한 웃음이었다.

물론 앤시아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을 뿐, 사용인들이 보기엔 일그러진 비소 수준이라 오히려 새로운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일단 비앙카를 데려오기 위해 리샤르를 잠시라도 떼어 놓아야 했다.

“공작님. 바쁘시지 않으세요?

마수 토벌도 하다 말고 오신 거 아니에요? 아니면 영지에 관한 서류 같은 거 안 보셔도 돼요?”

“유능한 집사장과 부관들이 있으니 저녁에 올라올 보고서만 확인하면 돼. 그보다 부인, 점심은 제대로 먹는 걸 보고 싶군.”

왜 자꾸 못 먹여서 난리인지 모르겠다.

앤시아의 손목이며 허리를 손으로 재어 보듯 잡아 본 리샤르는 앤시아를 어떻게 살찌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먹지 않으니 몸이 이리 가늘고 쉽게 쓰러지는 게 아닌가. 주치의 역시 부인의 체력을 늘려야 한다 하더군.”

“흠, 공작님. 저에 대한 보고서에 제 몸 상태에 관한 내용도 있었을 텐데요.”

앤시아는 끈덕지게 달라붙는 리샤르를 떼어 내는 데 실패하자 내숭을 포기했다. 오히려 불편한 속내를 툭 하니 꺼내 보였다.

“공작님께서 제 뒷조사를 하시곤 벌써 잊으신 건가요?”

어떻게든 피하려고만 하던 앤시아가 날 선 반응을 보이는데도 리샤르는 지켜볼 뿐이었다.

“제 몸이 약한 건 약으로도 낫지 않아요. 약을 먹어야 운신이 가능한 정도죠. 허약한 몸에 이것저것 먹어 봤자 몸만 축납니다. 꼭 기억해 주실 필요는 없지 만요.”

뾰족한 앤시아의 반응에도 리샤르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정작 공작이 공작 부인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과 그걸 앤시아가 언급한 상황에 어찌할 줄 모르는 건 방 안에 있던 사용인들이었다.

앤시아는 집요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리샤르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렸다가 벽 쪽에 서 있는 하녀들의 반응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네, 네. 그러시면 과일 타르트는 어떠신가요?”

“응, 맛있을 거 같네.”

뻔한 답이었지만 앤시아는 천진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앤시아의 호의적인 반응에 사용인들 역시 굳었던 얼굴을 풀며 살며시 웃음을 보였다.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리샤르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앤시아를 끌어당겼다.

“요리장에게 준비하라 이르지.

그럼 부인, 아직 피로해 보이니 준비될 때까지 침실로 들어가 쉬는 건 어떤가?”

문 하나만 지나면 부부 침실이었기에 리샤르의 무덤덤한 말투가 오히려 은근하게 느껴졌다.

앤시아는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울 정도로 피곤한 건 아니에요.”

“내가 받은 보고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던데.”

앤시아가 비꼬기 위해 언급한 보고서를 리샤르 쪽에서 대놓고 언급했다. 간신히 풀리려던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기 전 앤시아는 순순히 인정했다.

“공작님께서 집무실이나 연무장에 가신다면 누울게요.”

“이런. 그럼 부인은 계속 불편하게 앉아 있어야겠군.”

능청스럽다. 이 능구렁이는 대체 어디서 뚝 떨어진 걸까.

앤시아가 불편해하는 걸 알면서도 굳이 어린아이 대하듯 무릎에 앉혀 둔 행태가 어이없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리샤르와 앤시아는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었다. 물론 리샤르가 종종 앤시아를 들어 나르기는 했지만, 전부 이유가 있었다.

원작과 다르게 앤시아의 곁을 떠나지 않는 리샤르의 행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바뀐 거라면 비앙카의 이른 등장과 방에 틀어박히는 대신 쇼핑을 나간 앤시아의 행동이었다.

여기에 리샤르의 행동이 바뀐 원인이 있을 터.

속으로 짐작만 하느니 대놓고 묻자 싶어 앤시아는 과감해지기로 했다.

“공작님.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시려고 해요?”

왜 이렇게 달라붙냐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돌려 말했더니 리샤르의 입술 끝이 살짝 움찔거리며 미소 비슷한 걸 만들어 냈다.

이번에도 벽 쪽에 서 있던 사용 인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걸 보니 제대로 된 웃음으로 보이지 않는 듯했다.

리샤르는 허리를 끌어안은 손끝을 긴장한 듯 몇 번 움찔거리던 것과 달리 무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부인이 걱정돼.”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다.

부인이 걱정된다니.

게다가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리샤르에게 나올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안 그래도 성우 뺨치는 좋은 목소리인데, 감정까지 실리니 괜히 부끄러워져 얼굴에 열이 확올랐다.

“부인?”

앤시아가 당황한 사이, 리샤르가 전보다 더욱 낮고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와, 진심 순간 설레서 리샤르에게 넘어갈 뻔했어.’

리샤르는 마치 진심으로 앤시아를 걱정하고 있는 듯 보였다.

걱정이라는 건 무릇 대상에게 애정이든 호감이든 하다못해 관심이라도 있어야 생기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앤시아는 리샤르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이 있으리라고 여기기 힘들었다.

물론 나단이 공작가에 방문하고, 마수 토벌에 나섰던 리샤르가 중간에 돌아왔던 날. 리샤르는 차마 듣기 민망한 험한 말을 하며 마치 질투하는 남편처럼 굴기도 했었다.

‘아. 거기서부터 구나.’

여주인공 비앙카의 이른 등장.

그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원작대로였다면 리샤르는 앤시아의 거부 이후 무심함으로 거리를 두어야 했다. 그러나 원작이었다면 등장하지 않았을 나단이 앤시아를 위해 공작가에 방문했다.

또한 앤시아에게 악의를 가진 시녀장의 편지로 인해 리샤르에게 앤시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 냈다. 사랑은 없어도 소유욕은 생겼을지 모른다.

어쨌건 그런 일련의 일들로 인해 리샤르의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황제의 명을 거부할 이유가 없기에 받아들인 수준 낮은 귀족여인. 그저 형식상의 부인으로 마음 줄 일 없었던 앤시아의 존재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앤시아는 비앙카와 리샤르의 사이를 오해하고 열심히 두 사람이 만날 기회를 만들어 주는 이해심 넘치는 공작 부인 역할을 성실히 해냈다.

어두운 방에 틀어박힌 채 세상이 자기를 버렸다며 우울해하던 원작과는 전혀 달랐다. 앤시아의 행동이 바뀌니 리샤르의 행동도 달라진 것이다.

‘행동이 달라져서 감정이 생겼을 수 있어.’

문제는 그게 비단 리샤르만이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앤시아가 붉어진 제 얼굴을 감싸려는 찰나, 리샤르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한발 빠르게 먼저 앤시아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덕분에 눈에 보일 만큼 열이 더 올랐다.

“주치의를 부르지.”

“아뇨! 부르면 제가 수치사 할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뜻이지?”

“그냥, 공작님이 너무 뜨거워서 그래요. 체온이 어지간히 높으셔야죠.”

“그런 거라면 차가운 디저트를 준비하라고 하지.”

툴툴거리는 앤시아의 태도에도 리샤르는 여전히 다정하게 굴었다. 마음이 흔들릴 만큼 상냥했다.

여러 부분에서 원작과 다르게 행동했으니 예상하려면 충분히 미리 예상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앤시아가 그렇지 못했던건 원작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여주인공 비앙카와 남주인공 리샤르가 만나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건 당연하다고 여겨서였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앤시아를 무릎에 앉히고 허리를 끌어안은 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리샤르는, 분명 앤시아를 향한 시선에 온기를 담고 있었다.

그러면 안 돼, 남주야. 넌 비앙카와 사랑에 빠져야 한다고. 나는 무생물 보듯 봐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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