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54화.
앤시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앤시아는 원작과 다른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었음에도 공작가에서 날아온 청혼서를 보며 원작의 흐름을 믿었고 방심했다.
‘나단을 살렸을 때부터 원작이 바뀔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앤시아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다시금 리샤르와 마주했다. 리샤르는 대화가 끊기자 여느 때와 같은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앤시아가 빤히 바라보다 생긋 웃어 보이자 리샤르의 입꼬리가 경련하듯 미미하게 반응했다.
리샤르에게서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자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살짝 기뻐졌다가 불안해졌다.
공작과 공작 부인의 관계는 황제의 명령으로 인해 정해진 부부일 뿐이었다. 감정이라곤 조금도 없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리샤르는 앤시아에게 지나친 친밀감을 보였다. 불과 며칠 전, 아니 고작 하루 전만 해도 리샤르는 이렇게까지 앤시아에게 달라붙지 않았다.
대체 어제 하룻밤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고민해 봐도, 제가 한 거라곤 등 뒤의 리샤르가 신경쓰여 뒤척이다 느지막이 잠든 게 전부였다.
원인이 무엇이든 공작과 공작부인의 관계가 친밀해지는 건 좋지 않았다. 앤시아에게 필요한건 이혼이었지 원만한 부부 관계가 아니었다.
‘리샤르가 더 변하기 전에 빨리 원작의 흐름을 찾아야 해.’
무엇보다 급한 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 굴며 달라붙는 리샤르를 떼어 내는 일이었다.
*
오후가 돼서야 공작을 기다리다 지친 보좌관이 부부 침실 옆 응접실로 찾아왔다.
산더미 같은 보고서를 들고 리샤르를 찾아온 보좌관 덕에 앤시아는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떠나가며 저녁때 데리러 온다고 한 걸 보면, 급한 일이 끝나고 나면 다시 또 달라붙을 모양이었다.
이러다 원작처럼 비앙카와 리샤르가 단둘이 만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기는 할지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그래도 앤시아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버릴 수 없었다.
혹여나 원작에서처럼 비앙카와 리샤르가 다정하게 붙어 있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을까 하고, 앤시아는 공작 부인 방에서 창밖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종일 창밖만 내다본 게 무색하게 리샤르는 예정대로 집 무실에 틀어박혔는지 보이지 않았고 비앙카조차 머리카락 한 올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날이 아닌 듯 두 사람 중 누구도 볼 수 없었다. 이건 시간 낭비였다.
어쩌면 틀어졌을지도 모를 상황들을 어떻게든 기회로 만들어야 했다.
더 기다릴 것 없이 앤시아는 즉각 실행하기로 했다.
“오늘부터 비앙카를 전담 하녀로 들일까 해.”
앤시아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지금까지 머리를 만져 주며 재잘거리던 하녀들은 폭탄이라도 맞닥뜨린 듯 조용해졌다.
앤시아는 조용해진 줄리와 엘리를 돌아보며 상냥한 미소를 보였다.
“어차피 전담 시녀도 없는데 전 담 하녀가 많아지면 너희들도 편하고 좋을 거고.”
앤시아의 배려에 두 사람에게 잠시 기뻐하는 기색이 살짝 비쳤으나 금세 사그라들었다. 두 사람은 진중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마님, 저희가 부족했다면 더 노력하겠습니다.”
“공작가에 들어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정체 모를 비앙카보다 숙련된 하녀를 들이시는 건 어떠세요?”
줄리와 엘리는 비앙카가 함께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건 외부인에 대한 불안감이면서 동시에 공작의 숨겨 둔 애인일 수도 있는 여자에 대한 반발감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평민 하녀이면서도 공작 부인에게 솔직한 의견을 내놓는 걸 보니 며칠 사이 많이 편해진 듯했다.
앤시아는 이왕이면 주인을 위해 노력하는 사용인의 편을 들어 주고 싶었으나 비앙카 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내가 곁에 두고 싶어. 비앙카를 불러오렴.”
“네, 마님.”
줄리는 즉각 수긍하며 허리를 숙였으나 엘리는 눈썹이 처질 만큼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녀들이 탐탁지 않아 했기에 비앙카를 데려오는 사이 오해가 생기진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아니, 내가 직접 말할게.”
고작 하녀 한 명 데리러 가는 일을 직접 하겠다는 공작 부인의 행동에 줄리와 엘리는 눈이 동그래졌다.
대체 비앙카의 무엇이 공작 부인의 마음에 든 것인지 의아했다.
사용인 숙소와 가까운 빨래터에 도착하니 비앙카와 몇몇 하녀들이 빨래하느라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리라는 머릿결이 정말 좋은 거 같아. 부러워.”
“그래 봤자 일하는 동안은 꼭꼭숨겨 놔서 보일 일도 없는걸. 비앙카, 넌 머릿수건 안 해도 시녀장님이 뭐라고 안 하시더라?”
“난 쓸데없이 숱이 많아서 틀어 올리면 너무 무거워서. 시녀장님이 이곳에 익숙해질 때까진 풀고 다녀도 된다고 하셨어.”
“쓸데없다니. 비앙카 넌 자연스러운 반 곱슬머리라 풍성하고 예쁘잖아.”
“맞아. 오죽하면 그 독한 시녀장님이 복장 불량이라고 혼내기 는커녕 칭찬하고 가셨잖아.”
앤시아가 다가가는 동안에도 하녀들은 열심히 손과 발을 움직이며 끊임없는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비앙카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 이따 쉬는 시간에 옆에만 살짝 땋아서 꽃이랑 엮어 볼까?”
“고마워, 샤샤. 넌 손가락이 너무 가늘고 예뻐. 손빨래하기엔 너무 아까운 손이야.”
“어머, 무슨 소리야. 네 손가락은 가는 데다 길기까지 하잖아.”
“맞아. 비앙카 너야말로 산을 타고 다녔다면서 피부도 별로 안타고 살결도 너무 고운걸. 옷만 바꿔 입어도 평민으로 안 보일정도야.”
옆에서 보기에는 상냥한 칭찬릴레이에, 참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비앙카에 대해 탐탁지 않아 하는 줄리와 엘리조차 굳은 표정이 약간 풀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과 달리 앤시아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비앙카에 대한 평가가 조금 달라졌다.
‘저 화법은 좀 의도적인 거 같은데.’
상대방을 칭찬하고 있으나 그 대상이 전부 비앙카 본인이 가진 것보다 못한 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칭찬을 들은 쪽에서 기분 좋게 웃으며 다시 비앙카의 장점을 더욱 칭찬했다.
비앙카는 주변 사람을 보며 예쁘다고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몇 배의 칭찬이었다. 그때마다 비앙카는 풍성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릴 만큼 고개를 가로 저으며 웃는 얼굴로 아니라고 부정했다. 여기가 부엌이나 청소중인 홀이었다면 머리카락이 떨어질까 걱정스러울 만큼 화려한 움직임이었다.
원작에서는 주변 사람들의 작은 특징까지 칭찬하는 착한 여주인공으로 비쳤던 모습이 실제로 목격하니 다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비앙카가 상대를 칭찬하는 행동이 겸손한 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아 보이는 건 앤시아한테 뿐인 듯싶다. 하녀들의 얼굴엔 웃음만이 가득했다.
앤시아가 말을 걸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사이 비앙카가 제일 먼저 앤시아가 왔음을 알아챘다.
“앗, 마님!”
“마님이라니? 여기에 왜 그분이 계시겠……. 헉, 주, 주인마님께서 여길 왜?!”
당황하는 다른 하녀들과 달리 비앙카는 앤시아를 보고 순수하게 환한 웃음을 보였다.
호칭만 마님일 뿐 억양이나 반가워하는 기세가 거의 동네 친구 대하는 수준이었다. 조금의 불편함이나 거리낌도 없이 오로지 반가움과 기쁨만 가득 담은 비앙카가 손등에 비누 거품을 잔뜩 묻힌 채 앤시아를 향해 달려왔다.
“마님, 혹시 저 보러 오셨어요?”
농담처럼 말을 걸어오는 비앙카의 천연덕스러움에 앤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친구를 사귄 것 같아 다행이구나.”
“네, 다들 너무 친절해요. 찬물에도 거품 잘 나게 하는 방법도 알려 주고 손끝이 꽁꽁 얼어 동상 걸리지 않는 요령도 알려 줬어요.”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빨래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은근히 어필하는 비앙카의 말을 들으며 앤시아는 줄리에게 맡겨 둔 손수건을 받아 넘겨주었다.
“닦으렴.”
“어머, 이거 너무 귀해서 감히 천한 제가 써도 될지…….”
하얀 천에 밋밋해 보일 정도로 작은 이니셜만 새겨진 손수건은 그리 귀해 보이지는 않았다. 비앙카에게 쓸모가 있을 것 같아 따로 챙겨 둔 것일 뿐.
그렇기에 앤시아의 설명이 필요했다.
“괜찮아. 어차피 공작님은 손수건 같은 거 아끼시는 분은 아니 시니.”
“공작님의…… 손수건인가요?”
“그래. 아, 마침 잘됐어. 그 손수건은 비앙카가 세탁해서 공작님께 가져다드리면 어떨까? 가지고 싶다면 공작님을 직접 뵙고 부탁드려도 좋아.”
비앙카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보이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깨끗하게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다른 하녀였다면 극구 사양하거나 놀라서 뒤로 물러설 일이었다.
비앙카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기대감에 찬 얼굴로 손수건을 고이 접어 품에 넣었다. 젖은 손은 슬쩍 앞치마에 닦고 생글거리는 얼굴은 천진해 보였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공작을 향한 호의가 묻어났다. 리샤르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으나 비앙카의 태도를 보면 두 사람 사이에 앤시아가 모르는 일이 있는 듯 보였다.
앤시아 앞에서 조차 비앙카는 제 감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범하게 보일 만큼 솔직했다. 역시 두 사람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했다.
“비앙카, 내일부터 내 방으로 오렴.”
“네? 마님, 그게 무슨 뜻인지…….”
천진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는 비앙카와 달리 여전히 세탁물을 붙잡고 있던 하녀들은 거품 묻은 손으로 입을 가릴 만큼 파격적인 제안에 매우 놀랐다.
“마님, 설마 지금 제게…… 설마…….”
비앙카는 끝끝내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 마치 앤시아의 입으로 말해 달라는 듯 양손을 모아 크게 부푼 가슴 위에 얹은 채 숨을 들이켜며 기다렸다.
그리 원한다면 못 해 줄 말도 아니었다.
“그래. 내 전담 하녀가 되어 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