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56화.
어쩌면 원작에서는 시녀장을 통해 저택에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비앙카가 어떤 루트로 저택에 들어왔는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뭐,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나 앤시아는 이혼을 위한 과정에 그들이 큰 도움이 될 것 같단 점만 알면 그만이었다.
당장 급한 건 남주와 여주 사이의 징검다리나 오작교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앤시아는 수상쩍은 비앙카의 - 시녀장에게 직접 차 내는 법을 배웠다는-대답에 예민하게 반응하려는 줄리와 엘리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아니나 다를까 방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줄리와 엘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앤시아에게 호소했다.
“마님께서 비앙카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건 알지만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주인님께서 곧 오실 텐데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이러다 비앙카 혼자 공작님을 맞이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에요.”
바로 그걸 바라는 거란다.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웃음으로 답했다.
“금방 돌아오면 돼. 걱정되면 엘리가 함께 있어 줄래?”
“시, 시키신다면 따르겠습니다.”
엘리의 풀 죽은 대답에 앤시아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솔직하고 착한 하녀들이 있어 든든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곤란하기도 했다. 악녀 노릇을 위해선 이 아이들을 괴롭혀야 하는 데, 괴롭힐 마음이 들지 않아 문제였다.
지금 당장은 악녀 노릇보다 여주와 남주의 친밀도를 올리는 게 먼저라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앤시아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두 사람이 자주 마주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애썼다.
두 사람만 남겨질 상황을 만들기 위해, 약속이 잡히면 몇 번이고 공작을 피해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리샤르의 오기 역시 만만치 않았다. 리샤르는 약속이 틀어지면 비앙카를 통해 앤시아에게 또 다른 약속을 보내왔다.
창과 방패처럼 리샤르는 끝없이 약속을, 앤시아는 도망을 반복했다.
리샤르가 비앙카를 통해 방에서 식사하자는 전언을 보내오면.
“저녁 식사는 거른다고 전해 주렴.”
산책을 제안하면.
“이미 산책을 다녀온 참이라……. 비앙카는 공작님께 가서 그렇게 전하면 돼.”
티타임을 함께하자 해 오면 비앙카에게 준비해 둔 간식 꾸러미를 넘기며.
“공작님께 드리려고 특별히 부탁한 간식이야. 식기 전에 가져가렴.”
이렇듯 앤시아는 여러 이유를 대며 리샤르를 만날 일을 피하고, 비앙카를 리샤르에게 보냈다.
앤시아는 벌써 몇 번이나 심부 름을 보냈는데도 여전히 기뻐하는 비앙카를 보며 리샤르는 아직인지 몰라도 비앙카는 리샤르에게 벌써 호감이 생겼음을 확신했다.
첫눈에 반했을지도 모르고 원작의 힘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앤시아의 지금과 같은 소소한 노력이 결실을 보기를 바랄 뿐이었다.
간식을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비앙카를 보며 앤시아는 작은 악행 거리가 없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잘 다듬어진 정원과 상냥한 미소를 띤 하녀들을 보니 도저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하루 정도는 건너뛰어도 괜찮겠지.’
앤시아는 가벼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
몇 시간 전.
리샤르는 보좌관의 소원대로 집 무실에 틀어박혔다.
한참 보고서를 확인하던 중 집 무실을 찾은 이는 비앙카였다.
비앙카는 앤시아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며 한참을 기웃거리며 떠나지 않아 리샤르의 신경을 거슬렀다. 돌아가라며 내쫓다시피 한 후에야 비앙카는 집무실을 떠났다.
앤시아와 정해 둔 약속 시각이 되어 앤시아의 방에 갔더니, 비앙카 홀로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로 갔는지 물으니 기다리시면 된다며 리샤르의 곁을 지켰다. 옆에 앉아서는 한참을 자기 과거사며 공작가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몇 번이고 앤시아와의 만남이 무산되고 그때마다 비앙카가 대신 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저녁 식사까지 거절당해 직접 찾아가려던 리샤르에게 비앙카는 앤시아가 보낸 간식을 가지고 다시 방문했다. 간식 같은 건 두고 가면 될 것을 하나하나 펼쳐 보여 주려 했다.
커다란 테이블을 가득 채운 종이들 사이로 머핀과 쿠키 따위가 줄지어 놓였을 땐 보좌관마저 헛기침까지 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 평민은 어디까지가 제 목숨줄인지 확인하고 싶은 걸까.
정말로 이 모든 것들이 앤시아가 시킨 일이긴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비앙카의 당당함을 보면 어느 정도까지는 앤시아가 용인한 부분일 터.
리샤르는 그게 더 마음에 안 들었다.
“돌아가라. 가서 아내에게 잠들기 전 찾아가겠다고 전해.”
“지금 가도 마님은 안 계세요.
게다가 공작님이 간식 드시는 걸 꼭 보라고 하셨는걸요.”
“아내에게는 따로 말해 두도록 하지. 앞으로 그대가 날 찾아올 일이 없도록.”
“앗, 너무 무섭게 보지 마세요.
전 마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니까요.”
“내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기 전에 돌아가.”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전 그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제게 선물을 준 공작님과 저택으로 불러 준 마님께 잘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혼자라서 너무 외롭거든요.”
외롭다고 말하며 살며시 눈을 내리뜨는 비앙카는 측은해 보이면서도 아름다웠다.
방 안에 있던 사용인들은 물론 일을 방해하는 비앙카를 향해 헛기침까지 해 대던 보좌관마저 구겼던 미간을 씰룩거리며 필 정도였다.
리샤르가 빤히 쳐다보자 비앙카는 용기를 얻은 듯 슬그머니 책상 옆으로 다가섰다.
“전 다 알아요. 공작님도 외로운 분이시잖아요.”
뜬금없는 비앙카의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손이 멈췄다.
“가장 가까워야 할 공작 부인조차 스스로 선택한 분이 아니고요. 그러니 외로움은 더 커지기만 하셨을 거예요.”
강제된 공작가의 결혼.
비밀은 아니었지만, 저택에서 누구도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 불편한 진실을, 한낱 평민 출신 하녀가 감히 겁도 없이 너무도 쉽게 입에 담았다.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차갑게 구시지만, 혼자 외로우셨을 거예요. 저 역시 외로움을 알기에 공작님을 내버려 둘 수가 없어요.”
공작님이 외로워?
비앙카에게서 리샤르에게로 옮겨진 보좌관과 집사장의 시선에 의아함만이 가득했다.
“게다가 공작님은 무척 멋진 분이신걸요. 키도 크시고 얼굴도 잘생기셨죠. 이런 멋진 남자가 외로워하는 걸 그 어떤 여자도 그냥 두고 보진 못할 거예요.”
이쯤 되니 비앙카의 선량해 보이는 어투와 표정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단지 다른 여자들은 모를 뿐이에요. 공작님이 무섭게 구셔도 그게 외로움을 감추려는 가면 이 라는걸요. 제가 공작님께 특별한 사람이 되어 드릴 수 있어요.”
명백한 유혹이었다.
그간은 단지, 그녀 특유의 천진 하고 사랑스러운 말투 때문에 언뜻 순수한 호의로 착각한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마님께서는 공작님에 대한 진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하신 거 같아요. 그분이야 워낙 몸이 약하시고 사랑스러운 분이니 주변에서 항상 챙김을 받으셨겠죠. 그러니 공작님의 외로움을 알 턱이 없죠.”
공작 부인을 대화에 끌어들이는 건 선을 넘었다.
잠시 자신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위로하는 비앙카의 속내를 파악하고자 짜증스럽지만, 묵묵히 듣고 있던 리샤르는 자각할 틈도 없이 책상 아래 단검에 손을 뻗었다.
“말 조심하세요.”
지금까지 주인인 리샤르 앞이라 나서지 않던 집사장이 사람 좋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목소리를 높였다.
“하녀가 주인님께 할 말이 아닙니다. 주인마님을 깎아내리다니.
그것도 집사장인 저와 보좌관까지 있는 자리에서 선을 넘는 발언을 하다니요.”
“앗, 죄송해요. 공작님의 외로움을 저만 알아챈 거 같아서, 가까 우신 분들께서도 아셔야 할 거 같아 주제넘게 굴었어요.”
비앙카가 얼른 허리까지 깊게 숙이며 사과했다. 집사장은 탐탁지 않은 듯 충고를 이어 갔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는 하나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용인의 입은 무거워야 합니다.”
“죄송해요…….”
금세 풀이 죽어 눈물까지 글썽이는 비앙카는 안쓰러우면서도 아름다웠다. 방금까지 화를 내던 집사장마저 괜찮다는 말을 뱉을 뻔할 만큼.
안 그래도 마음 약한 집사장은 신입 하녀를 더 혼내야 할지, 자리를 피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 안절부절 못하며 리샤르의 눈치를 봤다.
리샤르는 몇 번이고 그녀를 향해 날릴 뻔한 단검 손잡이를 놓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간신히 단검에서 손을 뗀 리샤르는 지금까지 이런 헛소리를 듣고 있던게 어이없다는 듯 불쾌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당장 내쫓아야 함에도 그러지 않는 건 그대를 안타깝게 여기는 아내 때문이지. 그런 아내를 기만한다면 저 문턱을 넘기도 전에 숨이 끊어질 것이다.”
“마님을 기만하다니요? 전 단지 진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외로운 남자.
리샤르 그윈티드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많은 수식어 중 제일 윗자리에 두어도 될 말이었다.
더는 참아 주기 힘들다는 듯 호흡을 가다듬은 리샤르는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내가 아내를 찾기 전에 또다시 그대가 보인다면 누가 뭐라 해도 저택에서 내쫓을 테니 알아서 처신하도록.”
“네, 주인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마님께 전할게요.”
저 평민은 얼마나 귀족이 우스워 보이는지 머리 뚜껑을 열어보고 싶었다. 손만 조금 움직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리샤르는 그 충동을 참기 위해 숨을 삼켜야 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리샤르의 불쾌해하는 기색에도 비앙카는 문을 닫기 직전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생긋 웃어 보였다.
정작 시선도 주지 않는 리샤르와 달리 문서를 분류하던 보좌관과 집사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받아 줄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비앙카가 완전히 사라진 이후 드물게도 집사장과 보좌관이 일과 관련 없는 실없는 대화를 나눴다.
“참 밝고 예쁜 아가씨군. 미모도 상당하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하녀 입니다. 지나치게 속내를 감출 줄 모르는 게 흠이지만…… 공작님을 걱정하는 마음은 기특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 미모도 미모지만, 각하께 이리 겁 없이 구는 여인은 처음 보는 것 같네.”
리샤르는 두 사람의 대화에 기가 막혔다. 공작 부인이 모욕당했다는 것과 공작인 자신을 유혹하려 한 평민에 대한 반응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호의적이었다.
저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외모때문이라면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미인이기는 하지만 사리 분별도 못 하게 만들 만큼은 아니었다. 오히려 판단을 흐리게 하는 쪽은 그의 아내 앤시아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