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57화.
앤시아를 떠올린 리샤르는 여전히 비앙카를 칭찬하는 두 사람을 향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내 아내도 그래.”
“예?”
외로움을 많이 탄다? 겁 없이 군다? 어느 쪽인지 몰라 대답을 망설이던 보좌관은 말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밀린 서류를 찾아오느라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했군요. 보좌관인데도 아직 공작 부인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럼 보러 가지.”
비앙카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리샤르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저 영악한 평민이 돌아가서 쓸데없는 헛소리를 지껄이기 전에 직접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예? 아직 보셔야 할 건이 한참 쌓였습니다.”
“아내를 기다리며 보면 되지 않는가. 가지고 오게.”
“아, 그러시다면 얼마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보좌관은 성인 남자가 들기에 버거워 보일 만큼의 산처럼 높은 보고서를 챙겼다.
방으로 돌아가던 앤시아는 간이 개인 훈련장에 들렀다.
비앙카를 리샤르와 자주 만나게 해 두었으니 이제 결전을 위한 준비를 해 둬야 했다.
“마님, 오늘도 전부 명중이십니다.”
“던지는 모습도 너무 우아하세요.”
짧은 시간이기는 하나 앤시아는 오르골과 비슷한 크기의 나무토막 던지기에 열을 올렸다.
중요한 순간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앤시아의 뜬금없는 행동을 하녀들은 동부의 유행이려니 하고 짐작하며 응원했다.
약간 땀이 날 정도로 나무 던지기에 열을 올린 끝에 중앙만 맞던 나무토막이 처음으로 더미 인형의 어깨 쪽을 부딪치고 떨어졌다.
드디어!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허리를 죽 폈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할까 봐.”
“네, 마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은 쉬는 것도 좋습니다.”
“내일은 다 정중앙만 맞추실 수 있을 거예요. 힘내세요.”
안타까워하며 응원하는 하녀들과 달리 앤시아는 드디어 원하는 방향에 가까워진 컨트롤에 속으로 환호를 지르며 의연하게 물러 섰다.
방으로 가는 내내 하녀들은 앤시아를 위로하느라 애를 썼다.
앤시아가 일부러 어깨를 맞춘 거라 알려 주었는데도 하녀들은 어린아이 달래듯 상냥한 눈빛으로 손뼉까지 쳐 주었다.
앤시아가 아무리 말해도 엘리와 줄리는 그저 민망해서 하는 변명으로 치부하며 더욱더 달래는 데 열을 올렸다. 앤시아는 결국 설명하는 걸 포기한 채 묵묵히 방으로 향했다.
푹 쉴 생각으로 도착한 방 앞에서 앤시아는 잠시 망설였다.
반쯤 열린 문 옆에 공작님의 보좌관이 두꺼운 보고서를 든 채 벽만 보고 서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들려오는 비앙카의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공작님, 마님께서 오실 때까지 부족함 없이 모시는 게 제 역할 이에요. 어깨 좀 주물러 드릴까요? 제가 마을에서 손힘이 제일 좋았거든요.”
저렇게까지 하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앤시아를 핑계로 열성적으로 리샤르에게 들이대는 비앙카의 행동에 오히려 감탄했다.
‘열심히 어필하는 중이네.’
잘하고 있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앤시아는 비앙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여 놀라웠다.
공작 부인의 방에서 공작의 어깨를 주물러 주는 하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공작 부인인 앤시아의 입장에서는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저건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평민이라 해도 모를 리 없었다.
순진한 여주? 아니죠. 비앙카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거짓말 정도는 할 수 있는 영악한 여주였다.
‘원작이 틀어지지 않으려면 이런 노력이 필요한 걸지도.’
여주인공의 거짓말쯤이야 귀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단지 푹쉴 생각으로 왔던 걸음을 돌리려니 무척 피로해졌을 뿐이다.
눈도 뻑뻑하게 느껴져 양손으로 가볍게 눈두덩이를 누르는데, 머리 위에서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설마 문 옆에 서 있던 보좌관이 이렇게 지척까지 다가온 건가 싶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익숙한 품이 콧등을 스쳤다.
“숨바꼭질은 이제 끝인가, 부인?”
소리도 없이 다가온 리샤르를 올려다보려니 목까지 뻐근해졌다.
“숨은 적 없는데요. 그보다 너무 가까워서 놔주세요.”
“나 역시 붙잡지 않았는데.”
붙잡지는 않았다. 그저 벽과 리샤르 사이에 앤시아가 갇혔을뿐.
금방이라도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감이 불편했다. 살짝 눈을 올려 리샤르를 살폈다. 그의 입술 끝이 올라가 있는 듯했다.
또 웃는다고?
제대로 확인하고자 앤시아가 고개를 들려는 찰나, 리샤르가 그대로 앤시아를 끌어안았다.
답답하지 않을 만큼 가볍지만, 꼼짝할 수 없을 만큼 빈틈없는 포옹이었다.
단단한 품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안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며칠 사이 앤시아가 익숙해질만큼 리샤르는 몇 번이고 자그마한 부인을 품에 안았다. 악력 연습까지 해 가며 안전하게 끌어안은 가녀린 몸이 반가웠다.
정작 리샤르의 품에 안긴 앤시아는 익숙한 향을 맡으며 의아해 했다.
‘백작가에서 항상 맡던 그리운 향이 나.’
혼수품으로 두고 간 물건 중 공작의 선물은 한 줌이었을 텐데 그중 향수도 있었나 보다.
공작의 옷에 향수를 뿌린 건 사용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경로였는 백작가의 선물을 편견 없이 잘 써 주는 것 같아 기뻤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리운 향에 눈이 절로 감겼다.
흠뻑 향을 들이마시고 눈을 뜨자 백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우울해졌다. 당연한 건데도 들뜨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부인?”
리샤르는 얌전히 안겨 오던 앤시아가 한숨을 푹 내쉬자 상당히 신경 쓰였다.
앤시아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끌어안은 팔을 풀고 싶진 않아, 끌어안은 그대로 자연스럽게 무릎만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손쉽게 앤시아와 눈을 마주한 리샤르는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앤시아의 작고 올망졸망한 사랑스러운 얼굴에 옅은 새싹 같은 녹안이 선명한 슬픔을 머금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앤시아는 리샤르를 보고 조금 놀랐을 뿐 평온했다. 어째서 이런 감정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혹 제 탓일까 싶어 이유를 묻지 못했다. 앤시아가 허락할 때까지 오지 않았어야 했나 뒤늦은 후회를 했다.
그저 끌어안은 팔을 조심스럽게 풀고 한 걸음 물러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머, 마님, 왜 그리 슬퍼 보이세요?”
공작과 공작 부인이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 감히 끼어들 만큼 눈치 없는 사용인은 없었다. 그건 아는 게 없기에 겁도 없는 비앙카만이 유일했다.
“공작님이 괴롭히신 거예요?”
“아니야, 비앙카.”
앤시아의 대답에도 비앙카는 두 사람의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필연적으로 세 사람이 마주 보게 되었다.
“공작님의 힘은 일반적이지 않아요. 저처럼 튼튼한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연약하신 마님께 손대시는 건 조심해 주셔야죠.”
언뜻 평범해 보이는 비앙카의 말 속에 여러 방의 펀치가 숨어 있었다.
비앙카 자신에 대한 어필, 리샤르의 힘에 대한 경고, 앤시아를 위하는 척 깎아내리려는 의도가한데 섞여 있었다.
“흠, 아직 미숙한 건가.”
하지만 리샤르가 곧장 앤시아가 걱정되어 물러설 만큼 파급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그러고는 정작 저는 순수한 호의였단 듯 선한 얼굴을 꾸며 내며 앤시아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살며시 정리 해 주기까지 했다.
“마님, 피곤하시죠? 온종일 공작님 피해 다니느라 얼마나 지치셨을까. 제가 다 안타깝더라고요.”
아니, 여주야. 나랑 리샤르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한 노력은 가상하다만 남주를 화나게 할 필요는 없지 않니?
이 일로 대귀족인 리샤르가 모욕당했다. 여긴다면 여주인공인 넌 어떨지 몰라도 난 좀 위험하거든?
앤시아는 내뱉지 못한 말을 꾹눌러 담고 웃는 얼굴을 보였다.
“피했다기보다는 어긋난 거야.
그래서 비앙카 너를 보낸 게 아니겠니?”
“마님, 어서 들어가 쉬세요. 공작님은 제가 모셔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앤시아를 조금 곤란하게 한 비앙카의 발언은 아쉬웠지만, 따로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리샤르와의 접점을 만들며 착착 제 할 일을 해 주는 건 또 기특했다.
“그래. 난 좀 쉬어야겠어.”
비앙카가 이끄는 대로 앤시아가 자연스럽게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리샤르가 한발 빨리 앤시아를 막아섰다.
“부인, 부부 침실을 아주 뜨겁게 데워 놨으니 그곳에서 쉬도록 하지.”
다행히 리샤르는 앤시아가 조금 전 피해 다녔다는 말을 듣고도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무뚝뚝하면서도 다소 뻔뻔하게 앤시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앤시아는 그 손을 잡는 대신 살짝 물러서며 웃음으로 답했다.
“호의는 감사하나 오늘은 정말 푹 쉬고 싶어서요.”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테니 함께 자도록 해.”
“그럼 굳이 같이 잘 필요 없지 않나요?”
“필요해.”
“왜요?”
앤시아의 질문에 당연히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샤르에게 무슨 이유가 있을 리가. 있다고 한다면 비앙카의 존재를 오해하고 자꾸만 리샤르에게 보내는 앤시아의 행동이 신경 쓰여서 정도일 것이다.
오늘 하루만 해도 비앙카를 몇 번이나 보냈는지 모른다.
앤시아는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고 싶었다. 진심으로 편히 쉬고 싶었기에 리샤르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물러서려 했다.
“이유가 없다면 전 이만.”
“외로우니까.”
정적.
다급하게 튀어나온 리샤르의 핑계에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숨쉬는 것조차 잊을 만큼 모두의 움직임이 멈추자 소리마저 사라진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공작님. 지금 캐붕이세요. 이 백옥 같은 팔뚝에 소름 돋은 거 보이시나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을 속으로 삼켰다. 경악한 마음을 간신히 표출하지 않고 참아냈다.
반면 앤시아와 달리 보좌관은 들고 있던 서류를 놓쳤다.
수십 장의 종이가 팔랑거리며 복도 바닥에 흩어져 내렸다.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 모두 돌처럼 굳은 채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기회만 있으면 끼어들 기세던 비앙카마저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정작 좌중을 경악시킨 리샤르는 눈이 반달 모양이 될 정도로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그러고는 당연한 일인 듯 자연스레 앤시아를 향해 속삭였다.
“부인, 함께 가도록 하지.”
조금 전 집무실에서 비앙카가 리샤르를 향해 외로워 보인다는 둥, 외로운 남자는 혼자 둘 수 없다는 둥 말을 했을 땐 불쾌하기만 했었다. 그 말들이 훗날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평생 외롭다는 생각을 해 본 적없었지만, 저를 피하려고만 드는 아내를 붙잡을 수 있다면 외로운 남자쯤이야 얼마든지 될 수 있었다.
“외로워, 부인이 없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