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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58화 (58/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58화.

“아, 알겠어요. 잠깐만요.”

“부인.”

대체 저렇게 웃으면서 외롭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앤시아는 리샤르의 웃음에 면역이 없었다. 거기에 절대 그가 할 일 없을 것 같던 단어들을 연달아 뱉기까지 하니 정신이 없었다. 또다시 리샤르가 ‘외롭다.‘라고 할까 봐 초조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럼 일단 준비 좀 할게요.”

“가서 하지.”

리샤르가 안아 들 기세로 다가 서자 앤시아는 양손을 교차해 거부 의사를 보였다.

“아니, 갑자기 휙 안아 들지 말고요. 금방 준비하고 간다고요, 좀. 거 보좌관 아저씨가 흘린 종이도 좀 같이 줍고. 뭐, 왜요?

그, 공작은 손이 없어요, 발이 없어요?”

앤시아는 당황해서 막 나오는 대로 말을 내던졌다.

혹시나 리샤르가 또 막무가내로 그녀를 훌쩍 안아 들고 부부 침실로 향할까 봐 비앙카 뒤에 숨어 슬금슬금 방으로 향했다.

비앙카는 앤시아의 뜻을 알아채고 훌륭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역시 비앙카는 저한테 유리할 때만 눈치가 발휘되는 모양이다.

“공작님, 그럼 전 이만.”

내숭이고 뭐고 텄다.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앤시아는 본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방으로 들어왔다. 다행인 건 리샤르가 방까지 쫓아 들어오지 않았다는 정도였다.

앤시아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엘리와 줄리는 바빠졌다. 각각 목욕 준비와 여러 벌의 얇은 드레스를 들고 왔다.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방 한쪽에 드레스들이 늘어섰다.

“마님, 여기 있는 슈미즈 드레스 외에 원하시는 게 있다면 다른 것도 가져오겠습니다.”

“옷은 눈으로 고르시고 욕조에 몸부터 담그세요. 마님과 딱 어울리는 향을 피부에 흠뻑 머금으실 수 있게 해 드릴게요.”

엘리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목욕은 좋았다. 피로도 풀리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개운한 기분을 즐길 수 있다니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한 목욕이었다면 말이다.

“엘리, 고맙지만 욕조에 향유나 꽃잎 같은 건 띄우지 않아도 돼.

내 방에서 잘 거니까.”

“예? 하지만 주인님께서 기다리 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두 하녀가 리샤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앤시아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반면 비앙카는 마냥 생글거리며 문 옆에 서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비앙카를 한번 더 써먹을까 싶어 마지막 심부름을 보내기로 했다.

“비앙카, 공작님께 일단 돌아가 달라고 말을 전해 주겠니? 이왕이면 공작님이 제대로 집무실로 향하시는지 동행해 주면 더 좋고.”

“네, 마님. 꼭 끝까지 함께할게요.”

응, 그래. 아예 티를 팍팍 내면서 네 마음대로 하렴.

앤시아는 속으로만 대답해 주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비앙카는 앤시아가 채 욕실로 완전히 들어가기도 전에 냉큼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멀지 않은 거리에 보좌관과 보좌관보다 몇 발 앞서 걷는 리샤르의 등이 보였다.

“공작님, 기다려 주세요. 저도 같이 가요.”

본디 문 앞에서 앤시아를 기다리려던 리샤르는 비앙카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조금 전 막 가차없이 등을 돌려 부부 침실로 향하던 참이었다.

“공작님은 걸음이 무척 빠르시네요.”

“그대는 여벌 목숨이 있나 보지? 이리 겁 없이 내 경고를 무시하는 걸 보면.”

무시하고 가려던 리샤르는 비앙카의 친한 체하는 커다란 목소리가 앤시아에게 들렸을 것 같아 잠시 멈춰 섰다.

하지만 눈치 없는 비앙카는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기회를 얻은 양, 얼른 리샤르의 곁에 바짝 다가서 더욱더 재잘재잘 말을 붙였다.

“공작님. 마님께서 제게 공작님이 집무실로 가시는 걸 확인하라고 하셨어요.”

이 비앙카라는 평민 여인은 당최 눈치도 없고, 분위기 파악도 못 했다. 게다가 말귀도 못 알아먹고 귀찮기까지 했다.

리샤르는 불과 몇 시간 만에 비내버려 둬야 한다니, 속이 끊었다.

***

한참 달게 자던 앤시아는 약간 서늘해진 공기에 잠이 깼다. 약한 조명 덕에 익숙한 베개와 침대 장식을 보고 안심했다. 혹시나 눈을 떴을 때 다른 곳일까 봐걱정했었다.

다행히 리샤르는 잠든 앤시아를 굳이 부부 침실로 데려가지 않았다.

자기 전보다 식은 공기에 설렁줄을 당기려던 앤시아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자는 하녀를 깨우기보다 귀찮더라도 직접 움직여 장작을 넣는 게 마음이 편했다.

평소 이런 실수를 하지 않는 하녀들이 오죽 피곤했으면 그랬을까. 비앙카를 교육하겠다며 열을 올리던 엘리와 그 탓에 더욱 바빠 보였던 줄리를 떠올리니 미안해졌다.

따닥.

“응? 아직도 있었어?”

나무 부딪히는 소리에 앤시아는 눈을 비비며 벽난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밤에 혼자 있어도 된다니까.

줄리? 아니면 엘리니?”

“부인.”

몽롱하니 기분 좋던 잠기운이 싹 달아났다.

“공작님? 왜 제 방에 계시나요?”

“잠든 부인의 얼굴이 무척 행복해 보여서.”

질문에 대한 답이라기엔 애매했기에 앤시아는 다시 질문했다.

“아니, 제 말은 한밤중에 주무시지 않고 왜 제 방에 계시냐는 건데요.”

여전히 정복 차림으로 난로 옆에 앉아 있는 리샤르의 존재는 의문투성이였다.

“외로워서.”

“윽, 그거 진심 아니잖아요.”

앤시아는 확신하듯 팔짱까지 끼며 부정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리샤르의 시선이 앤시아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앤시아 역시 피할 이유가 없어 지지 않고 마주 보았다.

일렁이는 불빛에 비친 파란 눈이 종종 주홍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보였다.

앤시아는 그 눈이 참 예쁘다고 느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리샤르가 어두운 주위에도 서로의 눈동자 색이 선명히 보일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공작님, 은근슬쩍 너무 가까워 지셨는데요.”

“부인은 내가 많이 편해진 것 같군.”

“용맹하시면서도 배려심 깊은 공작님의 약속 덕에 한결 제 마음도 편해졌거든요.”

칭찬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거 느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리샤르가 어두운 주위에도 서로의 눈동자 색이 선명히 보일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공작님, 은근슬쩍 너무 가까워 지셨는데요.”

“부인은 내가 많이 편해진 것 같군.”

“용맹하시면서도 배려심 깊은 공작님의 약속 덕에 한결 제 마음도 편해졌거든요.”

칭찬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거기에 슬쩍 그가 첫 밤의 약속을 상기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까지 끼워 넣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바짝 다가온 리샤르가 앤시아를 향해 느릿하니 시선을 흘렸다.

“그 약속 말인데, 부인이 자꾸 이런 식으로 소소한 약속들을 깨는 걸 보니 지킬 필요가 있는지 고민되는군.”

“절대 지킬게요. 그러니 공작님도 무르기 없기예요.”

리샤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앤시아는 다급히 선수 쳤다. 마음 같아선 인장이라도 찍힌 계약서를 받고 싶었다.

구두 약속이라도 공작씩이나 되면 지켜 주리라 믿으며 앤시아는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선명한 리샤르의 푸른 눈이 가볍게 깜박였다. 앤시아 역시 안심하며 큰 눈을 깜박거리다, 턱을 쓸어 오는 까슬한 손끝에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손 넘어왔어요.”

무슨 소리냐는 듯 빤히 쳐다보는 리샤르에게 앤시아는 도리어 당당하게 굴었다.

“오늘 따로 자기로 했잖아요.

침대로 넘어오시면 안 되죠. 손이라도 마찬가지예요.”

그제야 리샤르는 앤시아에게서 손을 떼며 살짝 뒤로 물러섰다.

“부인은 약속을 중시하니 들어주는 게 남편 된 도리겠지.”

“그럼요. 아주아주 바람직한 남편이세요.”

신이 난 앤시아의 수긍에 리샤르는 짧은 한숨을 흘렸다.

“부인, 침대에 들어가지 않는 건 오늘뿐이오. 내일은 부부 침실에서 함께 자도록 하지.”

“그냥 각자 자는 게 편하지 않나요?”

서로 감정도 없는데 왜 굳이 같이 자려고 하는지 앤시아는 답답할 뿐이었다.

앤시아가 모르는 공작가의 규칙이라도 있나 싶어 리샤르를 흘겨보자, 리샤르가 앤시아를 물끄러미 마주 봤다.

“왜요?”

왜 저렇게 사람을 빤히 보는 걸까.

이래저래 죄 지은 게 많은 앤시아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괜히 찔려선 말을 삐딱하게 뱉었다.

‘이러다 나중에 결정적 순간 눈물의 호소가 안 먹히면 어쩌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리샤르가 무섭거나 어렵지 않게 느껴져서인지, 자꾸만 본성이 튀어나왔다.

“하실 말이라도 있으세요? 없으시면 전 잘게요. ”

“할 말이야 많지.”

“아, 네. 그럼 내일 맨정신으로 해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주무세요.”

“미리 약속하지. 내일은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싶군.”

“그럴게요. 내일 아침은 준비가 끝나는 대로 비앙카에게 …….”

“아니.”

리샤르가 단숨에 불쾌한 기색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당황한 앤시아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난 것인지 추리해 볼 틈도 없이, 여과 없이 이를 갈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부인이 아끼고 곁에 두겠다면 그것까지는 말리지 않겠지만 내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해.”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비앙카를 하녀로 들인 이상 제 책임이라고요.”

“내쫓으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 그녀를 내게 보내지는 마시오.

부탁이니까.”

부탁이라는 말까지 할 만큼 리샤르는 비앙카가 불편한 듯했다.

이건 좋은 징조였다. 마수 외에는 관심도 없는 리샤르에게 새로운 감정을 불어넣다니, 역시 여주인공다웠다.

좀 더 밀어붙여도 될지 가늠하기 위해 앤시아는 재차 물었다.

“비앙카를 보시는 게 불편하세요? 제게 부탁하실 정도로?”

“그래.”

“감정이 생기실 것 같아서 불편하신 거라면 전 괜찮……아니, 이건 제가 너무 주제넘었네요.

제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궁금함이 앞서 괜스레 이제 막 생겨난 감정에 초를 치는 게 아닌가 싶어 앤시아는 급히 말을 돌렸다. 이에 리샤르는 침대에 손을 짚으며 바싹 다가와 앤시아와 눈을 마주했다.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알려야겠군.”

“안 그러셔도 돼요. 전 다 이해 할 수 있어요.”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으나 리샤르는 오히려 단호했다.

“그 평민은 주제넘은 행동으로 날 화나게 해. 날 공작으로 보기나 하는지 모를 정도로. 그녀를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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