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59화.
와. 이거 그거 아냐? 그거, 입덕부정기.
앤시아의 초롱초롱한 눈을 본 리샤르는 이어 내뱉으려던 분노를 최대한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전부 변명 같아 설명을 축소했다.
“내가 외로워 보인다더군.”
아, 뜬금없는 외롭다 드립이 왜 터졌는지 그 원인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앤시아는 터지려는 웃음을 최대한 상냥한 미소로 보이도록 포장했다.
“어머, 비앙카는 정말 상냥하네.
요.”
리샤르는 이런 상황에서도 비앙카를 칭찬하는 앤시아를 보며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으리란 걸 깨달았다.
리샤르가 어떤 진실을 알리더라도 앤시아에게 비앙카는 착하고 상냥하고 포용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리샤르는 비앙카가 아닌 자신에 대한 앤시아의 반응에 집중하기로 했다.
“부인이 보기에도 내가 외롭게 느껴지나?”
“아뇨. 제 눈엔 그냥 공작님이세요. 힘세고 튼튼한 공작가의 기둥. 마수 많이 해치우고 영지 금도 착착 쌓으시는 훌륭한 공작님이시죠.”
“그렇군.”
“전 공작님의 외로움을 전혀 몰랐어요. 비앙카만이라도 알아줘서 다행이에요.”
앤시아는 자신은 리샤르의 외로움을 알아채지 못했다며 비앙카를 추켜세웠다.
이에 리샤르는 앤시아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손이 잡히고 거리가 가까워지는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알아챘을 땐 숨결이 느껴질 만큼 서로의 거리가 좁혀져 있었다.
당황한 앤시아가 몸을 뒤로 물리려 했으나 리샤르의 손안에 완벽하게 감싸인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알지 못해도 좋소.”
아니, 그러니까 모른대도.
“부인이 앞으로 알게 되는 모든 것이 진실이 될 테니.”
속삭이며 다가오는 리샤르의 나른하면서도 은근한 행동이 수상했다. 앤시아는 분위기를 깨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랄하게 굴었다.
“아, 네. 그렇죠. 공작님 진짜 세잖아요. 마수 같은 거 한칼에 댕강. 와, 우리 공작님 정말 세다. 그쵸?”
“그렇소.”
점점 더 깊어지는 동굴 곰 보이 스와 가까워지는 얼굴에 앤시아는 당황스러웠다.
“아니, 저기 지금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방금까지만 해도 비앙카에 관한 이야기에 불쾌해하던 리샤르였다.
앤시아의 손을 붙잡고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리샤르는 어느새 그녀를 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 아직은 몇 번 접하지 못해 낯선 그 미소였다.
앤시아가 말을 흐리며 당황하는 사이, 천천히 얼굴이 가까워졌다.
앤시아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릴 만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느릿하게 맞닿은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며 부드러운 숨이 흩어졌다. 입술이 여러 번, 다시금 맞닿고 천천히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리샤르는 마치 사랑스러운 대상을 향해 견디지 못할 만큼 애정이 넘쳐흘러 입을 맞추는 이처럼 한 번, 두 번.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부드러운 입맞춤을 이어갔다.
그 간질간질한 버드키스에 끝내 앤시아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리샤르를 움직였다.
앤시아의 등과 목을 끌어당겨 품에 가둔 채 살며시 닿기만 하던 입맞춤이 깊어졌다.
흩어지던 숨이 섞이고 뜨거운 열을 품은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리며 앤시아를 뒤흔들었다. 이대로 두 팔을 들어 리샤르를 끌어 안고 싶은 충동이 일 만큼 단 키스였다.
앤시아는 순간,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이 애정에 그대로 빠져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앤시아는 이 장면을 책을 통해 읽은 기억이 있었다. 비앙카와의 첫 키스, 혹은 두 번째 키스였을지 모른다.
사랑스러운 연인을 향해 몇 번이고 입 맞추던 공작은 마수를 토벌할 때와 달리 너무도 조심스럽고 부드럽기만 했다.
이건 비앙카와 해야 할 키스였다. 앤시아와 해서는 안 됐다.
그래, 인정하자. 어쩌면 지금 리샤르는 앤시아를 향해 감정이 생겼을 수 있었다.
원작을 아는 앤시아 또한 리샤르가 이런 식으로 다정하게 굴거나 자신을 향한 감정을 드러낼 때면 곧장 거부하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흔들렸다.
이혼 계획을 무산시키고 그대로 그에게 빠져들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리샤르의 감정이 어떻다 한들 앤시아는 원작을 알고 있었다. 리샤르는 앤시아와 첫날밤을 보내고도 비앙카를 선택했다.
‘어차피 날 버릴 거잖아. 원작에서처럼..’
결국 남주 리샤르는 앤시아를 버리고 여주 비앙카를 택할 것이다.
그러니 계획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냥, 원래 계획했던 대로 리샤르가 자신을 버리면 백작가로 돌아가면 된다.
그게 예정된 앤시아의 역할이었다. 현재 리샤르의 감정이 어떻든, 그건 한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날 그만 흔들어. 인제그만 원작대로 비앙카와 사랑에 빠지란 말이야.”
금방이라도 자신을 받아 줄 것처럼 온전히 기대 오던 앤시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자 리샤르는 지체 없이 거리를 벌렸다.
“부인?”
앤시아가 지친 웃음을 보이자리샤르는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천천히 물러섰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좀 피곤해서요.”
앤시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긋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런 앤시아의 행동을 지켜보는 리샤르의 푸른 눈이 혼란스러운 듯 흔들렸다.
리샤르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른 채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앤시아를 그저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
이후 앤시아는 더욱 열성적으로 비앙카를 리샤르와 만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에 지지 않고 리샤르는 수시로 다가오는 비앙카를 철저하게 밀어냈다. 비앙카에게 심부름을 시키기도 전에 먼저 나타나는 리샤르 측 전령이 그 증거였다.
루크라는 소년은 앤시아가 비앙카를 통해 리샤르에게 보내려 했던 전언이나 간식을 발 빠르게 부지런히 챙겨 날랐다. 그때마다 비앙카는 지지 않겠다는 듯 달려 갔으나 소년 보다 빠르지 못해 매번 허탕을 쳤다.
끝끝내 비앙카의 접근을 막아내는 리샤르 때문에 앤시아는 고민이 깊어졌다.
아무래도 리샤르는 아내인 앤시아에게 비앙카를 거절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듯했다.
이런 식이면 정말 곤란했다. 주인공 두 사람이 가까워지기는커녕 하루에 얼굴 한 번 못 보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결국 앤시아는 직접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비앙카는 피하지만 앤시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문을 열어 주는 리샤르를 찾아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날 밤 버드키스에 이어 깊어 지던 키스를 거절한 이후 얼굴 보기가 껄끄러웠으나 이대로라면 영영 두 주인공이 만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해 어쩔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앤시아는 리샤르와 만날 기회를 만들었다.
식사 시간이나 가벼운 산책을 할 때면 비앙카를 대동하고 리샤르를 찾아가 얼굴이라도 자주 보게 했다.
한편 리샤르는 자주 접하면 접할수록 마수에 미쳤다거나, 피에 절어 산다는 수식어와 어울리지 않는 우아함을 엿보였다.
그때마다 비앙카의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졌다. 마음이 깊어지고 있는 게 빤히 보였다.
비앙카와 다니기 시작하면서 시녀장과의 사소한 신경전도 사라졌다. 이전과 달리 앤시아와 마주칠 때마다 시비도 걸지 않고 적당히 인사만 하고 물러났다.
모든 게 원활하게 흘러갔다. 아직 리샤르의 마음엔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았지만, 이대로 두 사람을 자주 마주하게 하다 보면 그것 또한 문제없으리라 믿었다.
기사부단장 아서가 피투성이의 갑주를 벗지도 못한 채 집무실까지 한달음에 달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비앙카, 쿠키는 따로 챙겨 두었니?”
“네, 마님. 예쁜 상자에 담아 두었어요.”
“그래. 그럼 그걸 챙겨서 공작님께 가자꾸나.”
오늘도 앤시아는 두 사람이 마주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줄리와 엘리는 그런 앤시아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마님이 원하는 대로 조용히 뒤를 따랐다.
비앙카를 데리고 리샤르의 집무실에 도착한 앤시아는 평소와 달리 어수선한 분위기에 멈춰 섰다.
집무실 문까지 열려 있어 굳이 몰래 보려 하지 않아도 안쪽의상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평소 두세 명만 있던 집무실에 많은 이들이 모여 바쁘게 무언가를 적거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더그 영지에 흘러 들어간 마수숫자만 해도 삼십이 넘습니다.
거기에 어린 개체들도 상당수 섞여 있다고 합니다.”
“어린 마수 정도야 더그 백작가의 기사들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저희는 백작의 의뢰를 받고 작년과 똑같은 수준으로 마수를 처리 했습니다. 미처 처치하지 못한 마수가 영지로 흘러 들어가는 경우가 있지만, 어린 개체가 상당수 섞인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니까 그게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기사부단장의 보고에 자꾸만 의문을 표하는 보좌관으로 인해 리샤르가 한숨 섞인 답을 내주었다.
“가을이니까.”
“예. 지금이 가을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갑자기 무슨 계절 타령이냐는 듯 보좌관이 미간을 찡그렸다.
올해 새로 영입한 보좌관은 아직 북부에서의 마수 관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보였다.
기사부단장 아서 역시 답답하다는 듯 보좌관을 쏘아보다 시선을 돌려 리샤르를 바라보았다.
“고작 일주일 사이 태어난 지얼마 안 된 개체들이 삼십이나 마을로 흘러 들어갔다는 건 산속에는 훨씬 더 많다는 뜻입니다.”
“어미를 잃어 내려온 게 아닙니까?”
“문제는 지금이 마수의 산란기가 아니라는 거다.”
리샤르의 지적에 아서 모겐스는 곧장 수긍하며 펼쳐진 지도 위를 가리켰다.
“예, 원래대로라면 마수의 산란기는 봄입니다. 매년 봄 농민들까지 동원되어 산을 이 잡듯이 뒤져 알이란 알은 전부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가을에 성체가 된 마수의 숫자가 토벌가능한 숫자로 유지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겨울이 가까워지는 이 시기에 어린 개체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건.”
리샤르는 이 일의 심각성을 짐작한 듯 핏자국이 선명한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마수 이상 증식으로 보아도 무방하겠군.”
“그렇습니다. 봄처럼 인력을 동원해 알을 제거하고 어린 개체를 소탕하거나 최소한 밤에 더 날뛰는 마수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영지민들의 활동을 제한해야 합니다.”
“추수철이라 말을 듣지 않을 텐데.”
리샤르와 아서만이 대화를 이어가자 보좌관이 슬쩍 끼어들어 의견을 내놓았다.
“각하, 일부에서만 벌어진 일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더그 영지에 협력을 요청하여 산을 하나씩 털고 목책을 둘러막으면 어떻습니까?”
보좌관의 속 편한 의견에 리샤르와 아서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