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60화.
목책 따위로 막을 수 있는 건 어린 마수 정도였다.
그나마도 산을 따라 두르려면 얼마의 인력과 자원이 필요한지 계산은 해 봤는지 의문이었다.
영지를 둘러싸는 편이 훨씬 방범적으로 우수했다.
리샤르는 진심으로 이 보좌관을 치우고 나이가 들어 은퇴한 전보좌관을 불러들여야 하나 고민했다.
그 짧은 틈에 집사장이 숨을 헐떡이며 편지 한 통을 들고 집무실로 급히 들어왔다.
“주인님, 트롤리 가문에서 급한서 신이 도착했습니다. 붉은 인장입니다.”
그윈티드 공작가에 날아드는 편지에 붉은색 인장은 마수 관련하여 급한 건이라는 뜻이었다.
리샤르는 곧장 봉투를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그윈티드 공작 각하. 예법에 맞지 않는 서신임을 용서하십시오.
이틀 전 산에 올랐던 나무꾼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마수 사체를 가지고 남작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사체는 분명 마수가 맞았으며, 두렵게도 아직 어린 마수였습니다. 어린 마수는 봄에서 여름 사이에만 볼 수 있는 존재.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희는 두려움에 떨며 모든 인력을 총동원해 산 주변을 수색하였습니다. 수색하다가 개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의 마수의 알을 발견하였고…….」
편지를 죽 살피던 리샤르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바라보는 기사부단장을 위해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고작 반나절.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마수의 알을 마흔 개째 깨부수던 병사들은 겁에 질렸다고 하는군.”
“바, 반나절 수색에 마흔 개의 알을 발견했단 말입니까?”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각하. 트롤리까지 마수가 넘어오려면 더 그 강을 넘어야 하는데 더그 영지 쪽은 지금까지 잘 처리해 왔음을 보고서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잘 처리했다는 더그에도 새끼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며?”
“그거야 그렇지만……. 혹시 더 그 쪽에서 부풀려 보고한 건 아닌지요. 흠흠.”
허둥지둥 제 생각을 꺼내던 보좌관은 서 있는 아서를 보곤 헛기침을 했다. 정확히는 아서의 갑옷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말라 붙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마수의 피를 보면서였다.
그때 편지를 전하러 왔던 집사장도 생각나는 일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실은 최근 저희 영지에서도 털뭉치로 보이는 새끼 눈토끼가 굴러다닌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물론 아직 피해가 없어 따로 보고 드리지는 않았으나 그 수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당장 관련 보고서를 이쪽으로 모아 오게.”
보고서라면 자신 있던 보좌관이 냉큼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서를 이리저리 옮기며 내용을 추려 냈다.
그래도 아예 쓸모없는 인력은 아니었나 보다. 금세 분류된 서류가 책상 위에 놓이자 리샤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부터 시작이었는지 확인해. 인근 영지에 방문 서신을 보내도록.”
“예, 더그 쪽의 기록에 따르면 대략 일주일 정도…… 공작님?”
리샤르가 신중하게 보고를 하던 아서를 지나쳐 열린 문 앞에 섰다.
한참 전부터 문밖에 서 있던 앤시아가 당황한 듯 살짝 뒤로 물러섰다.
몇몇은 앤시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기척을 숨기며 다가온 것도 아니고 리샤르가 알면서도 내버려 뒀기에 모른 척하고 있던 참이었다.
“부인. 복도는 추울 텐데, 재미없는 이야기지만 듣고 싶다면 안으로 들어오지.”
“제가 들어가면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방해일 리가. 그대는 나의 아내이자 공작 부인이니 원한다면 저택 안 어디든 갈 수 있소.”
묘하게 로맨틱한 말이었다.
앤시아는 리샤르의 말에 따라 움직였고 비앙카가 냉큼 그 뒤를 쫓았다.
“단, 뒤에 하녀는 들어올 수 없소.”
“아…… 그런가요?”
“기밀이 오가는 곳에 믿지 못할 이를 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부인이 아끼는 하녀라는 사실관 별개의 이야기요.”
여기선 앤시아가 우길 수 없는 부분이었다.
비앙카를 굳이 대동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앤시아는 굳이 이상황에 자신이 끼어들어도 되는지 잠시 망설였다.
피비린내 나는 갑옷을 그대로 입고 나타난 기사부단장과 정신없이 쌓여 있는 서류를 뒤지는 보좌관에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듯한 깡마른 서기관까지.
그 곁에 초조해 보이는 집사장도 보였다.
낯선 얼굴들도 여럿 보이는 긴장된 공간에 굳이 앤시아가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 필요한 이야기는 얼추 들은 후였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러지. 그럼 지루한 이야기 지만 밤에 들려주겠소.”
문이 닫히고 앤시아가 돌아서는데도 비앙카는 느릿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에 남고 싶어 하는 비앙카에게 자유 시간을 주고 싶었으나 예민해 보이는 남자들로 가득한 집무실 앞을 어슬렁대게 하는 건조심하는 편이 나았다.
앤시아가 권해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비앙카도 앤시아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조용한 복도를 걸어가는 앤시아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마수 이상 증식이 왜 벌써 나와?’
빙의한 이후 연약한 몸으로 하루 대부분을 침대에만 있어야 했던 앤시아는 원작을 수십 번 복기하며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앤시아가 기억하기로 마수 이상 증식은 공작과의 이혼 후 발생했었다.
‘분명 내년 초일 텐데.’
봄에 근접한 시기라 이상 증식을 알아채는 게 늦었다. 번식기와 산란기가 겹쳐 일반적인 패턴을 벗어난 마수로 인해 토벌에 오랜 기간이 소요됐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 탓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했던 공작은 필연적으로 크게 다친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상처 입은 야수 같은 공작을 여주인공이 보듬고 치료하며 둘의 사이는 더욱 견고해진다.
공작 부인과 이혼한 후였기에 두 사람은 더더욱 전보다 거리낄것도 없이 가까워지는 것이 원작의 흐름이었다.
위기에 빠진 남주. 헌신적인 여주.
‘그야말로 바람직한 패턴이지만.’
과연 지금의 리샤르가 다친다 한들 비앙카가 내미는 치료의 손길을 받아들일까? 다가오는 비앙카를 내쫓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봄에 일어날 일이 가을에 벌어진 것이 영 불안했다.
괜히 제가 빨빨거리며 돌아다닌탓에 흐름이 이상하게 꼬여 버린건 아닌지 머리가 아파 왔다.
“답답하든 말든 그냥 칩거할 걸.”
“마님, 답답하세요? 저도 저택에만 있으니 답답한데 외출할까요?”
비앙카의 제안에 앤시아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방으로 가야겠어. 비앙카는 답답하면 외출해도 돼. 시녀장에게 허락받아야 하면 내가 시켰다고 하고 다녀와.”
“앗, 감사합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아직 방에 가려면 한참 남았는데도 곧장 등을 돌리는 비앙카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얼마나 가벼운지 아차 하는 순간 복도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이 이 상황을 못 봐서다행이네.”
일부러 방에 두고 온 줄리와 엘리의 한숨 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홀로 복도를 걸어가며 앤시아는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었다.
원래는 봄에 발생해야 했을 마수 이상 증식.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들은 상당했다.
기사들이 총동원되어 마수를 토벌했음에도 모든 산을 한꺼번에 토벌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도망쳐 오거나 요란한 소리에 이동한 마수들이 인근 영지를 비롯해 이곳까지 흘러 들어왔다.
어린 마수쯤이야 다른 때라면 성인들의 대처로 큰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숫자가 상당했기에 피해도 상당했다.
특히 약한 어린아이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비통한 어미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아까 우리 영지에도 눈토끼 새끼가 늘었다고 했지.”
앤시아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눈토끼.
앤시아는 눈토끼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알고 있는 거라곤 어깨에 종종 걸치는 새하얀 숄의 재료가 눈토끼의 털이라는 정도였다.
이름만 들으면 귀여운 토끼가 연상됐다. 하지만 마수였다.
눈토끼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반적인 토끼처럼 부드럽고 새하얀 털을 가진 마냥 귀여운 존재였다면 분명 많은 귀족들이 털만 깎아 쓸 게 아니라, 애완용으로 키웠을 것이다.
하지만 눈토끼를 키우는 귀족같은 건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문득 여관에 모여 질긴 고기 수프를 뜯어 먹던 마을 아이들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마수 고기도 뜯을 만큼 강한 이를 가졌지만 피부는 꽃을 꺾다 온통 상처투성이가 될 만큼 연약했다.
마수의 날카로운 뿔과 이빨은 그런 어린아이들의 연한 피부를 찢고도 남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앤시아는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말아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사용인들이 봤다면 직위에 맞지 않게 경박하다 수군거릴 만큼 다급한 뜀박질이었다.
“엘리, 줄리!”
다소 흥분했는지 문을 여는 앤시아의 손이 거칠었다.
“앗, 마님? 무슨 일 있으세요?”
“비앙카는 어디 가고 혼자 오셨어요?”
이마에 땀이 밴 채 살짝 헐떡이는 앤시아를 본 두 사람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갈 곳이 있어. 당장 외출 준비를 서둘러 줘.”
“네, 마님.”
“세상에, 땀을 이렇게 흘리시다니. 외출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좀 달렸어. 오히려 오늘은 몸상태가 좋은 거 같아.”
앤시아가 달렸다는 말에 하녀들은 놀라면서도 곧장 빠르게 외출준비를 도왔다.
목적지를 묻는 줄리에게 ‘아이들 상태나 좀 볼까 하고. 가볍게 답하자 줄리의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깃들었다.
비앙카를 곁에 둔 이후로 자주 섭섭함을 드러내던 엘리와 달리 줄리는 유능한 하녀의 모습을 고수해 왔다.
잠시 드러난 줄리의 온화한 미소에 앤시아 역시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여주인공만 신경 쓰느라 항상 자신을 돌봐 주는 하녀들에게 소홀했구나 싶어 짠한 기분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