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61화.
여관에 도착하니 이전에 보지 못한 목책과 허술해 보이는 작은 천막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어린아이 하나가 들어갈 만한 작은 천막이었다. 주변에 장난감이며 꽃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걸 보니 아이들 놀이용 천막인 듯 보였다.
어릴 때는 자기만의 숨을 공간을 만들곤 하니 이해는 갔지만 안 그래도 다 쓰러져 가는 여관 앞에 허술한 천막이라니, 장사가 될 턱이 없었다. 그나마도 천막 안에 아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다 어디 간 거지?”
“식사 시간이 아니면 아이들은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도 자주 가는 놀이 터 같은 곳이 있지 않아?”
“아마 이 시간이면 근처 공터에서 공차기 같은 걸 하고 있을 거예요.”
멀지 않은 곳이라는 말에 앤시아는 곧장 엘리를 앞세워 공터로 향했다.
엘리의 장담대로 얼마 걷지 않았는데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이 들려왔다.
“나한테 줘.”
“싫어, 넌 벌써 세 번이나 만졌잖아.”
“앗, 이쪽에도 있어.”
“이번엔 내가 가질래!”
‘공 개수가 부족해서 다툼이 일어났나? 줄리에게 더 사다 주라고 해야겠어.’ 공 말고 더 재미난 게 없을까 고민하며 몰려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가던 앤시아는 갑작스레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하녀들로 인해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줄리? 엘리?”
“마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앤시아가 무슨 일인가 물어볼틈도 없이 아이들 사이로 호위기사가 뛰어들었다. 소리도 없이 따라붙은 탓에 있는 줄도 몰랐던 호위기사의 돌발 행동이었다.
아니 아이들 노는 곳에 무슨 어른이 작정하고 뛰어드냐 싶어 쳐다보는데 아이들 손에 들린 하얀 공을 칼집으로 쳐 내 빼앗기까지했다.
애들보다 더 애들 같다고 한 소리 하려던 앤시아는 공중에 뜬 흰 공을 순식간에 검 꼬치로 만들어 버린 호위기사의 행동에 할말을 잃었다.
아이들 역시 빼앗긴 공을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가 허공에서 꿰뚫린 세 개의 공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익숙한 엘리와 줄리 주변으로 도망쳐 온 탓에 앤시아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가일 경, 지금…..”
호위기사에게 무슨 짓인지 물으려던 앤시아는 검을 따라 흐르는 새빨간 피를 보며 자신도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왜 공에서 피가 나죠?”
“공이 아니라 새끼 눈토끼입니다.”
간신히 비명이 아닌 질문을 한 끝에 쉽게 답을 얻었다.
아이들은 놀라 울음을 삼키며 엘리와 줄리의 드레스 자락을 꼭 쥐었다. 몇몇 아이들은 누구의 드레스인 줄도 모르고 앤시아의 옷까지 꽉 쥐고 서럽게 울먹였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마음이 약해진 앤시아는 살짝 아이들 편을 들었다.
“가일 경. 아이들에게 내려놓으라고 해도 괜찮지 않았을까요?”
“죄송합니다. 자칫 방심으로 인해 손가락이라도 물어뜯기면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마음이 앞섰습니다.”
“마음이 아니라 몸이 앞선 것 같지만…… 그 조그만 눈토끼가 많이 위험한가요?”
물론 앤시아는 어린 눈토끼라도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막상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으며 놀고 있는 걸 보았기에 조금 의문이 들었다.
“예. 눈토끼 특성상 상황이 여의치 않다 싶을 때는 얌전하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궁금해하는 앤시아를 위해 기사는 검에서 눈토끼 하나를 뽑아가까이 가져와 보여 주었다.
기사는 익숙하게 눈토끼의 털을 헤쳐 숨겨져 있던 날카로운 이빨과 손가락만 하지만 눈이라도 찔렸다간 큰일 날 것 같은 뿔을 보여 주었다.
“아이들에겐 위험합니다.”
“성인……이라도 잘릴 거 같은데요.”
날카로운 송곳니에 톱니 같은 앞니는 활자로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위험해 보였다. 앤시아의 가는 손가락 따위 순식간에 잘려 나갈 듯이 날카로웠다.
어째서 호위기사가 아이들의 손에서 새끼 눈토끼를 빠르게 치워냈는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이런 위험한 생물을 아이들이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환경은 너무도 위험했다. 앤시아는 자신의 드레스를 꼭 잡은 아이들을 향해 상냥하게 물었다.
“너희들, 눈토끼에 대해 알고 있니?”
“네, 알아요.”
“토끼 고기보다 질기지만 독이 없어서 먹을 수 있어요.”
“잡을 때는 최대한 피가 안 나게 잡아야 용돈을 받을 수 있어요.”
“큰 눈토끼는 어른에게 말해야 해요.”
앤시아의 부드러운 녹안에 아이들은 저마다 앞다투어 답했다.
그러나 그 답 속에 새끼 눈토끼가 위험하다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다.
하긴 책을 읽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던 앤시아조차도 아이들 손에 들린 새하얗고 보송보송해 보이는 새끼 눈토끼는 해가 없어 보였다. 오죽하면 검을 휘두른 호위기사에게 이유를 물었을까.
앤시아는 호위기사 가일에게 눈짓을 했고 의도를 알아챈 기사는 아이들을 향해 털을 헤집어 눈토끼의 뾰족한 이빨과 뿔을 보여주었다.
일부러 공포심을 주기 위해서인지 아이들의 코앞까지 댔고, 곧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꺅!”
“엄마야!”
놀란 아이들이 저마다 앤시아의 드레스를 꽉 쥐고 뒷걸음질 쳤다. 그 바람에 앤시아가 잠시 휘청였지만 줄리와 엘리의 부축 덕에 간신히 버텼다.
“봤니? 여기 이 멋진 기사님이 아니었으면 너희들 손가락을 간식처럼 먹어 치웠을 거란다.”
몇몇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놀랐으나 그중 덩치가 큰 아이들은 억울해했다.
“그, 그치만 지금까지 한 번도 물린 적 없어요.”
“맞아요. 여러 명이 만지면 안물어요.”
아이들의 당당한 외침에 앤시아는 기사에게 확인하듯 시선을 보냈다.
“눈토끼는 영악합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잡히거나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면 무척 얌전하게 굴어 방심을 유도합니다. 지금은 아이들의 숫자가 많아 얌전하지만 눈토끼 숫자가 더 늘어난다면 돌변할 겁니다.”
“들었지?”
“네·
아이들의 애매한 대답에 앤시아는 안 되겠다 싶어 말했다.
“엘리, 지금 가서 애들이 가지고 놀 만한 공 같은 것 좀 사와. 장난감으론 넘쳐 나는 에너지가 감당 안 되는 거 같으니 뛰어놀 수 있는 거로.”
“네, 마님.”
“줄리는 간식을 챙겨 줘. 그리고 천막도 제대로 된 걸 짓든가, 아예 여관 마당을 대여해서 애들 놀이 공간이라도 마련해 줘. 이런 공터까지 안 오게.”
“마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역시 마님은 자애로우시군요.”
어? 왜? 그 푸근한 눈빛은 뭔데?
아차. 순간 저도 모르게 무슨 열혈 기부자나 봉사자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엘리와 줄리는 항상 앤시아를 좋게 봐주니 그렇다 쳐도 항상 무뚝뚝하던 호위기사마저 날 선눈빛이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내 편을 늘려서 어쩌자는 거야?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자.”
앤시아는 곧바로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턱을 들어 오만해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주변에서 보기엔 아름다운 영애의 표본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앤시아는 최선을 다해 악역 포즈를 취한 후 또박또박 강한 어조를 만들어 냈다.
“저 애들. 기껏 통통하게 살찌웠더니 돌아다니다 마수 먹이라도 돼 봐. 마수들한테 이 동네 맛집이라고 소문낼 일 있어?”
“네?”
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되는 대로 막 내뱉고 있는지.
앤시아는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일단 방금 막 호감이 피어나기 시작한 호위기사의 감정을 뒤집어 놓는 게 급선무였다.
기사가 싫어할 만한 일.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여인이 할 만한 생떼.
앤시아는 기사에게 쓸데없는 일을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가일 경, 내게 배정된 기사가 있으면 당장 이쪽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해 주세요.”
“예, 명을 따르겠습니다.”
서류상 공작 부인이기는 하나 약식으로 치른 결혼식으로 인해 권력이라곤 한 톨 없는 처지임을 알면서도 앤시아는 뻔뻔하게 굴었다.
무릎까지 굽혀 보이고 뒤돌아서는 기사의 모습에 앤시아는 한시름 놓았다.
마수 이상 증식으로 병력 하나 하나가 귀중한 시기였다. 그걸 모르는 호위는 공작저로 돌아가 터무니없는 공작 부인의 요구를 어떻게 들어줘야 할지 고민하다 빈손으로 돌아올 것이다.
정말이지, 생각나는 대로 내뱉은 말이지만 적절한 대응이었다.
임기응변이 먹힌 것 같아 앤시아는 뿌듯해졌다.
이제 호위가 돌아올 때까지 앤시아가 할 일은 없었다.
쌀쌀한 날씨에 앤시아는 걸칠 것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함께 온 하녀들은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빠 보였다.
앤시아는 서늘한 공기도 피할 겸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자 싶어 여관 2층으로 올라갔다.
삐걱대는 계단이나 텅 빈 내부를 보니 이 집은 조만간 망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손님이 없으면 보통 주인장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기 마련인데, 웬일인지 마당을 바라보고 있는 주인장은 흐뭇해 보였다.
아이들을 거두어들여 주는 비용을 지불하기는 했으나, 매일같이 아이들이 먹고 뛰놀아 산만한 탓에 손님이 많이 줄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관 주인은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마냥 흐뭇하게 웃으며 지켜봤다. 성품이 꽤 좋은 듯싶다.
조금 더 투자해서 아이들을 안으로 들이고 보모를 고용하는 건 어떨까.
‘아니, 아니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 건 내가 떠난 후 비앙카가 리샤르를 도와 잘 해낼 거야.’
물론 이런 내용이 원작에 나오는 건 아니었다. 비앙카와 리샤르가 함께하게 된 후에도 여러 사건이 벌어진다.
그로 인해 둘은 더욱 믿음을 키워 가지만 그 사건들은 하나같이 굵직굵직한 큰 사건들이었고, 이런 자질구레한 사건은 없었다.
영지민들에 대한 딱히 이렇다할 서술 또한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사건은 해결됐고, 영지는 무탈하게 잘 돌아갔다. 그러니 앞으로도 이곳은 별문제 없을 것이다.
“얘들아, 마님께서 너희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셨어. 이걸로 놀고 공터에 가지 않기로 약속하자.”
“우와, 이 공 엄청 잘 튕겨요.”
“고맙습니다, 언니.”
엘리는 열심히 앤시아의 선물임을 강조했으나 아이들은 선물에 정신이 팔려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앞으로 내 이름은 대지 말라고 해야겠어. 저러다 내가 좋은 일했다고 오해받으면 곤란해.
엘리와 줄리는 사 온 장난감을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천막을 수선하느라 한참을 분주했다.
앤시아는 여관 이 층에 앉아 잠시 그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그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오르며 점점 다가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