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62화.
왜 공작가 쪽에서부터 흙먼지가 일어나는 걸까.
불안감에 지켜볼 수만은 없어 급히 계단을 내려와 여관 앞으로 나왔다.
흙먼지가 사라지고 돌바닥이 망가질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위험하게도 그리 넓지 않은 골목을 통해 말을 끌고 나타난 이들은 공작가의 기사단이었다.
일렬로 들어와 마당 안과 주변으로 늘어서는 인원이 상당했다.
가장 앞장서 달려온 호위기사는 앤시아를 발견하고 즉각 말에서 내려섰다.
“공작 부인께 배정된 기사단입니다. 각하께서 필요하면 다른 기사단도 내어 드리라 하셨으니 부족하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눈을 빛내며 기대감에 차오른 호위기사, 가일 로프의 뒤로 그에 못지않게 열의에 찬 어린 기사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중 몇몇은 낯이 익었다. 아마도 일전에 과일 공수를 위해 동원된 수습 기사와 어린 기사들이 앤시아를 위해 배정된 인원인 듯했다.
안 그래도 잔뜩 바빠질 예정인 공작가의 기사단이었다. 아무리 수습이라 해도 영지민들까지 나서야 하는 상황에 이 인원을 빼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괜한 말을 했구나 머리가 하얘지려 했으나, 앤시아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새로 작당했다.
고작 하루. 적당히 굴리다 돌려 보내면 철없는 공작 부인 타이틀을 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의욕이 샘솟았다.
“부탁할 일이 있어요.”
“무엇이든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말을 타고 온 이들이 한꺼번에 뛰어내려 바닥을 무릎으로 푹푹찍어 대자 기껏 다져 놓은 길이 엉망진창으로 변했다. 이따 애들에게 줄 일거리가 생겨 앤시아는 내심 뿌듯했다.
“우와……. 기사님들이 모두 무릎 꿇었어.”
“너무 예뻐. 공주님인가 봐.”
그들이 지나온 길목에는 많은 이들이 고개를 내밀거나 바깥으로 나와 무슨 일인지 기웃거렸다.
아이들과 여관 주인까지 약식 갑주이기는 하나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기사단의 위압감에 눈을 떼지 못했다.
덕분에 자연스레 그 앞에 홀로 서 있는 앤시아까지 주목받았다.
한두 명, 많아야 대여섯 정도 오지 않을까 예상했던 앤시아는 최소 서른 명은 돼 보이는 기사들을 보며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평온하던 영지에 불안감을 불러 온다는 걸 눈치챘다.
일단 흩어 놓자.
“와 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언제든 공작 부인의 검이 되길 기다렸습니다!”
아예 대놓고 광고를 해라.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아이들은 전부 귀를 막고 물러설 정도였다.
화들짝 놀라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모른 척하며 앤시아는 생긋 웃음을 보였다. 어차피 기사들은 불려 나왔고 이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 적당히 굴리기로 했다.
“가일 경께서 이곳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눈토끼 마수 셋을 처리 하셨습니다. 가일 경이 조언하기를, 아이들에게는 위험할 수 있고 한 장소에 셋이나 되는 새끼 마수가 동시에 출몰하는 건드물다고 합니다.”
제가 그랬나요? 라는 듯한 가일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앤시아는 집무실 앞에서 들은 내용을 적절히 섞어 알렸다.
“영지를 살피고 순찰하는 경비대가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영지 안에서의 일만 살피기에도 바쁠 겁니다.”
앤시아의 말에 동조하듯 기사들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택 안의 기사뿐 아니라 영지의 경비대까지 신경 써 주는 공작 부인에게 마음이 술렁였다.
“경들에게 바라는 건 영지와 맞닿은 곳, 방책이나 담을 살피고 더 나아가서는 마수와 관련된 흔적을 찾아 위치와 숫자를 파악하는 겁니다. 가능하다면 작은 마수라고 해도 놓치지 말아 주세요.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도와주세요.”
아이들이 멀쩡해야 일을 시킬 수 있다.
‘그래야 아이들을 부려먹는 못된 마녀, 악녀 소리를 듣지.’
더불어 기사단을 경비병 취급한 한심한 공작 부인이라는 소리도 들으면 좋았다.
어느 쪽이든 아이들을 괴롭히는 건 앤시아가 할 일이었다. 상처가 날 정도로 다치거나 환경이 나빠 병을 얻는 건 앤시아의 악행에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었다.
일단 구르자. 다치지만 않게 여기저기 경계를 핑계로 돌아다니라고.
“주인마님의 깊은 뜻, 꼭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제 모든 걸 걸고 발견한 마수 한 조각까지 갈가리 찢어 버리겠습니다.”
응. 그래. 검 한 번 휘두르면 눈토끼 꼬치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쉬워 보이지만.
평민과 귀족이 뒤섞인 탓에 호칭도 섞여 버렸지만, 분위기만큼은 최상이었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급을 나누는 공작가의 기사단이었기에 서로를 믿고 달려왔다.
이토록 비장하게 구는 기사단을 향해 앤시아는 수줍은 미소로 화답했다.
“경들만 믿겠어요.”
“맡겨만 주십시오!”
“가자!”
마치 화채를 만들기 위해 과일공수를 하러 떠나던 때와 비슷한 열기였다.
기사단은 앤시아의 호위였던 가일을 따라 아이들이 눈토끼를 발견한 공터로 향했다.
어찌 보면 잡일 수준으로 실력 출중한 엄선된 기사단이 할 일은 아니었다. 기사단이란 이토록 충성스럽고 맹목적인 존재인 건가 신기했다.
곧 떠날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기사들을 배웅하던 앤시아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 옳지 못하다는 것. 자신의 선택이 악녀다웠기에 뿌듯했다.
‘오늘 하루 포인트는 이걸로 넘치겠어.’
“엘리, 줄리. 이만 돌아가자.”
앤시아는 자신이 멋대로 벌인 일에서 한 발 빼기 위해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앗, 네. 바로 정리하겠습니다.”
“마님, 몸도 안 좋으신데 무리하셨어요. 아이들을 걱정하시는 것도 좋지만, 마님 몸을 제일 먼저 생각해 주세요.”
“응? 무슨 소리를…….”
“식은땀을 흘리시면서까지 아이들을 위해 외출을 감행하셨잖아요. 저희가 말려야 했는데 죄송해요.”
저택에서의 일을 지금까지 언급하다니. 엘리는 여전히 열심히 오해하고 감동했다.
그래, 어차피 이 두 사람에게 악녀 노릇 하는 건 포기했다.
마음대로 상상하라고 두고 앤시아는 줄리가 가져오는 마차를 기다리며 차가워진 공기에 팔을 문질렀다.
“엘리, 이곳은 해가 지기 전부터 추워지니?”
“추우세요? 숄을 가져올게요, 마님.”
“아냐. 마차도 곧 올 거고, 그보다 항상 이렇게 추운 거야?”
“저야 이곳에서 죽 살아서 이정도는 그리 춥지 않아서요.”
춥지 않다는 엘리의 하녀복 차림은 활동성에 중심을 두어 두텁지 않았다.
앤시아의 시선이 아이들 쪽으로 향했다. 다시 세워진 천막과 새로운 장난감에 신이 난 아이들의 옷은 이전과 달리 깨끗했으나 얇아 보였다.
“애들한테 겨울옷을 사 주도록해.”
옷이 두꺼워지면 눈토끼에게 물리더라도 상처가 덜 나지 않을까 얄팍한 속셈도 있었다.
“겨울옷까지…… 정말 감사해요, 마님. 제가 어릴 때 마님 같은 분이 공작 부인이셨다면”
뒷말을 흐리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엘리의 감동 그 자체인 반응에 앤시아는 오히려 가볍게 채근했다.
“감기 걸리면 일도 못 하잖아.
기사단이 우르르 몰려왔으니 길이 여기저기 푹푹 파였을 텐데 그것도 메꾸라고 해. 일당은 꼭 챙겨 주고.”
“물론이죠, 마님. 아이들도 용돈이 생겨 기뻐할 거예요.”
내 의도를 자꾸 왜곡하지 말아주라.
앤시아는 슬슬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추위에 괜스레 심통을 부렸다.
“되도록 빨리 사 입혔으면 좋겠어.”
“그건 저희 이브 숍에서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엘리의 대답을 듣기도 전 골목 쪽에서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앤시아는 골목길 앞에 서 있는 귀족 여인이 낯익어 살짝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앤시아에게 낯익은 귀족여인이 있을 리 없었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 이브.”
“기억해 주셨군요, 나의 천사.
아니,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의상실. 드레스 숍의 주인인 이브는 조금 전 수많은 말들이 내달리는 소리에 놀라 문밖으로 나왔다. 이브는 하나뿐인 종업원하녀가 호기심에 보러 가는 걸 못 이기는 척 뒤를 쫓아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자신의 천사, 뮤즈, 공작 부인 앤시아를 발견했다.
허름한 여관과 골목길에서 종종 마주쳤던 꽃 파는 아이들을 배경으로 자그마한 앤시아가 누구보다 기품 있고 아름답게 서 있었다.
그 앞에 무릎을 굽힌 기사들을 두고도 의연하기만 한 천사를 목격한 이브의 머릿속에 폭죽이 터진 듯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당장 가게로 돌아가 스케치를 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지만, 사랑스러우면서도 당당하고 고귀한 자태를 뽐내는 앤시아를 더욱 더 보고 싶어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기사들이 흩어지고 사랑스러운 소녀처럼 무해한 웃음을 보이는 앤시아는 외모만큼 성품도 아름다웠다.
아이들을 걱정하며 그들이 추위에 떨지 않도록 섬세한 배려심을 보였다. 그윈티드 영지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공작 부인조차 이곳 아이들을 걱정하고 솔선수범하여 보살폈다.
이브는 이곳에서 죽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입장으로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을 모른 척하는 건 비겁하다 느껴졌다.
“공작 부인의 뜻을 저도 따르겠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옷은 제 주류가 아니나, 아이 옷을 다루는 지인들이 있으니 곧바로 수급 할 수 있습니다. 대신, 나의 뮤즈, 공작 부인께 신작 드레스를 선보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갑자기 튀어나온 이브의 열띤눈빛과 호소에 앤시아는 순간 질색하며 뒤로 물러설 뻔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직접 옷을 배달해 주겠다면 하녀들이 힘들게 다시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되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래요, 마담. 저야말로 마담의 신작 드레스를 입을 수 있도록 부탁드리죠.”
“이브라고 불러 주세요.”
마치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눈빛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익숙했다.
이런 이를 대하는 건 앤시아에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제게 어울리는 드레스를 가져 다주신다면 그때 다시 이름을 듣겠어요.”
자칫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는 태도였으나, 새침하게 웃는 귀여운 얼굴이 그 모든 걸 사랑스럽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