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63화.
공작가의 회의실은 밤늦은 시간까지 오가는 이로 분주했다.
뒤늦게 합류한 더그 백작가의 후계자가 이게 다 의뢰한 마수퇴치를 대충 해서 그런 게 아니 냐는 망발을 하는 바람에 한때 과열되기도 했다.
회의실을 가득 채운 열기는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제발 저희 영지도 잊지 말아 달라는 트롤리자작의 애원에 흐지부지되기도 했다.
서로 조금이라도 이득을 차지하려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리샤르는 단 한마디로 그 상황을 종료시켰다.
“내 몸은 하나이니 가장 위험한 곳을 말하게.”
모든 계획의 기본은 리샤르의 토벌 참여 여부, 그리고 기사단의 분배였다.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가 무력까지 강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머리를 숙이자니 올해 마수 의뢰를 가장 크게 넣은 더그가문에서 불만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올해 처음으로 마수의 침입을 겪은 약소 가문인 트롤리자작은 편지를 보내자마자 가주가 직접 달려와 호소할 정도로 겁을 먹은 상태였다.
이어 다른 영지의 기사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찾아와 위급함을 알리는 통에 일은 더욱 복잡해졌다.
“생각보다 이번 이상 증식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듯 합니다.”
“누가 그걸 모릅니까? 그래도 우리 더그 가문에서 의뢰를 먼저 넣었으니 그 점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둑한 살집을 가진 더그 소백작의 주장에 끝자리 나마 간신히 몸을 구기고 앉아 있던 깡마른 트롤리 자작이 비굴한 자세로 고개를 숙여 왔다.
“저, 저희 영지는 예산은 별로 없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지금 비용이 문제가 아닐세.
각하, 현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 후 공평하게 처리 해야지요.”
“공작님, 저희 가문과의 인연을 생각해 주십시오.”
다른 때 같았으면 일단 마수부터 잡고 보자며 일어났겠으나 그런 식의 우격다짐으로 쉬이 될 상황이 아니었다.
수시로 날아드는 소식을 토대로 종일 어느 지역을 먼저 방문해야 하느냐로 실랑이가 이어졌다.
마수 토벌이 우선이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영지를 완전히 비워 둘 수도 없었다.
회의 중간쯤 보좌관이 황궁에 도움을 요청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모두의 차가운 시선만 받고 묵살되었다.
황궁이 북부의 흠을 잡고 압박하느라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청한다? 설령 도움을 받더라도 목줄을 황제의 손에 쥐여 주는 꼴이었다.
몇 번의 결과가 뒤집히고 나서야 마수 이상 증식에 대한 토벌과 조사 인원 배분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
깊은 밤. 달이 기울 때가 돼서야 회의실 문은 다시 열렸다.
갑작스레 모여 회의에 참여한 이들 모두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은 결과인 듯 저마다 수긍하며 물러섰다.
“그럼 이대로 각 영지에 전달하겠습니다.”
“수고해 주게.”
“기사단에도 알리겠습니다. 내일, 아니 이미 날이 넘어가 버렸군요. 새벽에 뵙겠습니다.”
“이제야 한숨 돌리겠군요.”
“고생하셨습니다, 각하.”
저마다 리샤르를 향해 말을 건네고 급하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집사장이 눈치 빠르게 준비한 차가운 물을 마신 후에야 리샤르는 무거웠던 어깨가 조금 가벼워 짐을 느꼈다.
새벽이 되면 리샤르는 당연히 토벌을 위해 기사단과 함께 다른 영지로 향해야 했다. 보고된 내용만 봐도 아직 그윈티드 영지에 흘러 들어오는 마수의 수는 작년보다 늘었다. 뿐, 그 수 자체가 많지는 않았다.
게다가 기특하게도 공작 부인인 앤시아는 낮에 직접 영지민을 살피러 마을로 내려갔다.
그들을 살피고 수습이기는 하나 자신에게 배정된 기사단을 요청해 왔다. 아직 부족한 수습 기사단을 사리사욕이 아닌 영지민을 위해 움직여 마수 조사까지 보냈다.
공작 부인이 겁을 내기는커녕 직접 발 벗고 나서 영지민을 살피고 있단 소식을 전해 들은 리샤르는 아내가 기특해 지치는 와중에도 기운이 났다.
설령 무의미한 행동이 될지라도 그윈티드 영지를 위하는 앤시아의 행동은 마수 토벌에 있어 효율을 중시하는 리샤르에게조차 감동을 주었다.
‘보고 싶군.’
앤시아가 보고 싶었다.
이 역시 리샤르에게는 새로운 감정이었다. 누군가가 문득 떠오르는 경험도 그 대상을 보지 않으면 초조해지는 것도 전부 새롭고 낯설었다.
앤시아를 향해 커져 가는 마음과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자는 얼굴이라도 봐 둘까.”
새벽 출정을 하려면 잠은 거의 못 자겠지만, 침실로 향하는 리샤르의 걸음은 가벼웠다.
잠든 앤시아의 얼굴이라도 보면 남은 피로가 가실 것 같았다. 누군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란걸 알면서도 이미 리샤르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몇 번의 설득 끝에 최근 앤시아는 부부 침실에서 잠들었기에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계단에 막 발을 디디던 리샤르는 귀찮기 짝이 없는 존재의 기척을 알아챘다. 불쾌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공작님.”
한낱 하녀 주제에 겁 없이 공작의 팔을 붙잡는 행동에 리샤르는 더 참지 않았다.
“앗!”
순식간에 비앙카의 가는 목을 붙잡아 벽으로 밀쳐 낸 리샤르가 푸른 눈을 차갑다 못해 시릴 만큼 어둡게 빛냈다.
“분명 내 앞에 홀로 나타나면 가만두지 않는다고 경고했을 텐데.”
목을 잡혀 아무 말도 못 하게 된 비앙카는 말 대신 품에 안고 있던 물 주전자를 내밀어 보였다.
리샤르가 손에서 힘을 풀자 비앙카는 한참 기침한 후 억울하다는 듯 눈물 고인 서러운 눈빛을 보냈다.
“콜록……. 마님께 가져다 드리려고 마실 걸 챙겨 가던 중이었어요.”
“아직 깨어 있나? 낮에 외출까지 해서 피곤할 텐데.”
앤시아가 깨어 있다는 소식에 리샤르의 마음이 급해졌다. 비앙카에게서 손을 떼고 곧장 뒤돌아 섰다.
앤시아는 항상 리샤르에게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초조하게 만들고 다급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조금만 서두르면 금방 볼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도 어서 얼굴을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마음이 급해졌다.
콜록거리며 뒤를 쫓는 기척에 리샤르가 사납게 돌아보자 비앙카는 목을 매만지면서도 물 주전자를 들어 보이며 생긋 웃었다.
“저와 같이 걷기 싫으시면 공작님께서 가져가시겠어요?”
“그러지.”
망설임도 없이 내민 리샤르의 손에 비앙카가 놀란 듯 주춤거리다 물 주전자를 놓쳤다.
“꺅!”
비앙카에게로 고스란히 쏟아진 물이 얇은 드레스를 흠뻑 적셨다. 물방울이 튄 뺨을 손등으로 살며시 닦아 내며 곤란하다는 듯 눈을 깜박이는 비앙카의 행동에 리샤르는 기가 찼다.
정작 흠뻑 젖어 속옷이 다 비칠 정도인 몸은 가릴 생각도 안 하고 뺨에 묻은 물 몇 방울만 느릿하게 닦아 내는 손짓이 뜻하는 바가 명확했다.
그러고 보니 늦은 시간이기는 하나 하녀복이 아닌 잠자리용 얇은 드레스만 입은 것도 의도적인 듯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외모를 알고 이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비앙카의 행동은 리샤르에겐 불쾌감만 불러올 뿐이었다.
“더는 못 봐주겠군. 새벽이 오기 전 저택을 나가는 게 좋을 거다.”
“공작님이 저한테 그러실 순 없어요.”
대체 앤시아가 얼마나 잘해 주었기에 이 아둔한 평민이 겁을 상실하고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구는 걸까.
“당장 목을 비틀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내 아내에게 감사해야 해. 두 발로 걸어 나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리샤르의 냉정한 말에 비앙카가 억울하다는 듯 호소했다.
“공작님은 왜 자꾸 거짓말만 하세요?”
“뭐?”
“전 알아요. 공작님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시잖아요. 그런 공작님이 저를 보실 때면 달라요. 감정적으로 구시죠.”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지?”
“공작님은 항상 감정 없이 사람을 대하시잖아요. 하지만 절 보면 화를 내시거나 밀어내려 하시죠. 고작 하녀일 뿐인 제가 불편하시면 매질하셔도 될 텐데 말로만 밀어내시잖아요.”
안 그래도 갑작스러운 밤샘 회의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리샤르는 두통이 이는 걸 느꼈다.
“부인 때문이라고 말했을 텐데.”
“마님과는 첫날밤 이후 한 번도 잠자리를 갖지 않으셨잖아요. 의무만 치르신 거죠. 항상 공작님을 피하기만 하는 마님은 참 이 기적이세요.”
어느새 눈물조차 사라진 비앙카의 선한 얼굴에 요염함이 깃들었다.
“저라면 절대로 피하지 않을 텐데.”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 리샤르에게 다가서던 비앙카는 곧이어 어깨가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제 어깨에 꽂힌 단검을 확인한 비앙카가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리샤르가 그보다 빨리 단검을 쥐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비앙카의 입을 막았다.
조금의 자비도 남지 않은 거친 행동에 비앙카의 얼굴에 처음으로 공포심이 떠올랐다.
“부인의 전담 하녀가 흘렸을 것 같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니 출처가 궁금하긴 하지만. 그거야 사용인을 갈아 치우면 될 일이니 묻지 않겠다. 그보다 그대에게 꽂힌 단검에 대해 조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리샤르와 마주한 비앙카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반면 리샤르의 시선은 오히려 부드럽게 변했다.
“여기서 조금만 움직이면 근육이 상하고, 넌 평생 이쪽 팔은 쓰지 못하게 될 거다. 그리고 거기서 더 안쪽으로 찌르면 동맥이 끊겨 과다 출혈로 긴 고통을 겪을 틈도 없이 죽게 되지.”
“으읍! 읍!”
“원하는 쪽을 말해 봐. 손을 옆으로 조금 움직이는 것 정도야 수고스럽지도 않지.”
비앙카의 눈에 공포심이 어린걸 보면서도 리샤르는 느긋하게 단검 손잡이를 더 지그시 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고작 어깨 따위가 아니라 심장이나 목을 찔러 거슬리는 걸 완벽하게 치워 내고 싶었다.
앤시아. 그녀가 마음을 쓰는 대상이라는 것만으로 리샤르의 손은 본능이 아닌 이성에 따라 주요 부위를 피해 움직였다.
“그대를 볼 때마다 감정적으로 군다고 했던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리샤르의 푸른 눈은 전에 없이 어둡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