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64화.
“지금 내게서 보이는 감정은 어떻지? 아직도 내가 그대에게 여지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 손이 미끄러질 것 같군.”
“흐윽! 읍!”
비앙카는 제 어깨에 꽂힌 단검이 더욱 깊숙이 밀려 들어오자 견디기 힘든 공포를 느꼈다.
선명하게 드러난 비앙카의 두려움에 리샤르는 오히려 들끓던 감정을 갈무리했다.
“목숨을 취하는 대신 가르침을 준 것에 감사하도록 해.”
비앙카는 살아생전 처음 느껴보는 적의가 너무나 생소하고 두려웠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은 자신을 좋아했다. 어딜 가나 사랑받는 삶이었다.
비앙카는 저를 향해 있는 선명한 적의와 불쾌감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대의 목소리 따위 듣고 싶지 않으니 이대로 뒤돌아 떠나도록해. 검의 문양을 알아볼 테니 누구도 이유를 묻지 않을 것이다.”
처음으로 타인의 적의를 온몸으로 느낀 비앙카는 리샤르의 손이 입에서 치워진 후에도 두려움에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다.
비앙카는 덜덜 떨며 고통스러운 어깨를 붙든 채 벽을 짚고 걸어갔다.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몸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저 이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는 듯한 어깨를 붙잡고 열심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무서워, 무서워. 도움이 필요해. 너무 무서워.’
비앙카는 정신없이 시녀장 로사의 방으로 향했다.
커다란 집무실 옆에 붙어 있는 로사의 방은 문부터 먼지 한 올없이 완벽했다.
“시녀장님, 저 비앙카예요.”
문을 두드리자 늦은 시각임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을 한 로사가 문을 열었다.
물에 젖고 몸 반쪽이 피투성이인 비앙카를 보고 놀랄 만도 하건만, 로사는 아무렇지 않게 주변을 빠르게 훑고 그녀를 안으로 들일 뿐이었다.
“흑, 저 다쳤어요. 이러다 잘못되면 어떡해요? 공작님은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피가 많이 나요.”
“주인님이 그리 말씀하셨으면 괜찮을 거다.”
“시녀장님, 의사를 불러 주세요.”
“주치의를 이런 일로 부를 순없으니 마을 의사에게라도 가 보렴.”
무성의한 로사의 답에 비앙카의 눈이 흔들렸다. 왜 도와주지 않냐는 듯 비앙카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로사는 오히려 팔짱까지 끼며 턱을 치켜들었다.
“시녀장님께서 공작님이 외로운 분이라고 하셨잖아요. 위로해 드리려고 했더니 칼로 찌르셨어요.”
“위로라니. 그 천한 몸뚱이라도 들이댄 모양이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시녀장님이 유혹하면 될 거라고 하셨잖아요. 마님이랑 첫날밤을 보내셨으니 여인을 아는 몸이라 괴로우실 테니 도와드리라고.”
“그 젊음과 미모로 사내 하나 유혹하지 못하고, 뭘 더 바라는 건지 모르겠구나. 뻔뻔하기는.”
180도 달라진 시녀장의 냉정하다 못해 혐오하는 듯한 태도에 충격받은 비앙카는 고통도 잊은 채 억울함을 토로했다.
“어,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어요? 시녀장님이 마님은 몸이 약해서 관계도 못 하고 아이도 못 낳을 거라고, 공작님을 외롭게만 할 거라고 하셨잖아요. 전 최선을 다해 위로해 드리려고 한 거라고요. 시녀장님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비앙카의 억울한 외침에 시녀장은 팔을 풀고 고개를 절레절레흔들었다.
“내 말을 오해했나 보구나. 주인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건 사용인의 기본임을 알려 준 것뿐인데.”
“시녀장님!”
“여기서 헛소리나 하기보다는 어서 병원에 가지 그러니. 실려 나가기보다 제 발로 걸어 나가는 게 나을 텐데.”
로사의 냉담한 태도에 비앙카는 혼란스러웠다.
처음 공작가에 들어와 방을 배정받기 위해 시녀장을 만났을 때, 로사는 무척 그녀를 반겼다.
안 그래도 너 같은 아이가 필요 했다며 좋은 방을 내주고, 따로 불러 불쌍한 공작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불쌍한 우리 주인님을 구원할 사람은 비앙카 뿐이라며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방법을 묻는 비앙카에게 너의미모와 여성스러운 몸을 이용하라던 건 시녀장이었다. 로사의 든든한 응원을 받으며 비앙카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실제로 가까이서 본 리샤르는 날카롭고 외로워 보였다. 그녀가다가갈수록 밀어내면서도 다양한 감정이 내비치길래, 심적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라 여겼다.
그랬는데.
한순간에 공작의 단검에 어깨를 찔리고, 시녀장은 모른 척 말을 돌렸다.
떠밀리듯 로사의 방에서 나온 비앙카의 등 뒤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공작가 내 의사에게 보이겠다면……. 공작가의 사람이라 그 단검 문양을 보고 치료를 해줄지는 의문이지만, 네 유일한 장점을 이용하면 될지도 모르겠구나. 잘해 보렴.”
비앙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 빠르게 문이 닫혔다. 로사의 말은 공작가 의사를 찾아가도 치료받긴 힘들다는 뜻이었다.
유일한 구명줄이 사라졌다. 통증과 별개로 찾아온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작가는 이상했다.
비앙카는 평생 살아오면서 느끼지 못했던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벌써 두 번이나 맞닥뜨렸다.
낯선 감정은 너무도 날카로웠고 고통스러웠다.
두렵고, 그와 동시에 외로웠다.
언제나 당당하게 원하는 걸 요구하며 살아왔던 비앙카는 이 상황이 너무 낯설고 무서웠다.
낯선 이에게도 쉽게 다가가던 비앙카가 처음으로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래도 빨리 치료를 해야 해.”
팔을 따라 흐르는 피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처음 겪는 두려움에 선뜻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비앙카는 약사뿐이었던 작은 마을에서 배운 지식을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
겁에 질린 비앙카가 어깨에 단검이 꽂힌 채 돌아선 후 리샤르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멀어지는 비앙카를 지켜보는 리샤르의 차가운 눈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후우…….”
비앙카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리샤르는 좀처럼 가라 앉지 않는 화를 삭이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 했다.
감정이 전에 없이 들끓었다. 고작 말 몇 마디에 이토록 화가 날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단검을 휘두르던 그 순간,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아마 그 정도로 끝내진 못했을 것이다.
앤시아가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신경 거슬리는 상대를 향한 살의를 참아낼 수 있었다.
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불같은 모든 감정은 아내로 인해 비롯된 것이었다.
리샤르는 이제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비앙카를 향해 경고하듯 내뱉었다.
“널 향했다 해서 너로 인해 생긴 감정이 아니다. 이 감정에 무엇 하나 네 것은 없다.”
앤시아가 들었다면 경악할 말이었다.
아내를 떠올리니 흉포한 감정이 가라앉고 대신 익숙지 않으나 기분 좋은 여러 감정이 스멀스멀몰려왔다.
예정대로 앤시아를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부부 침실에 도착하자 아직 잔존하던 부정적 감정들이 비로소 모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대신 앤시아를 향한 애정과 은은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묵직한 문을 가볍게 열고 들어서자 훈훈한 공기가 먼저 리샤르를 맞아 주었다.
리샤르에게는 더운 편이었으나 앤시아에게는 적당한 따뜻함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벽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자 그 소리에 앤시아가 잠이 깬 듯 몸을 일으켰다.
“음……. 공작님?”
“내가 깨운 건가? 미안하군.”
“괜찮아요. 그보다 지금 오신 거예요?”
잠이 덜 깬 앤시아의 느릿한 말투에 리샤르는 마음이 평화로워 짐을 느꼈다.
문득 앤시아를 위해 비앙카가 물을 가져오던 중이었음을 떠올렸다. 앤시아가 목이 마를 것 같아 설렁줄을 당기려던 리샤르는 손을 멈추고 물었다.
“혹 비앙카에게 마실 걸 가져다 달라고 했소?”
“네? 아뇨.”
“역시 그랬군.”
몽롱하니 대답하던 앤시아는 불쾌감을 드러내는 리샤르의 목소리에 퍼뜩 잠이 깼다.
비앙카가 자신의 핑계를 대고 뭔가를 저지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앤시아는 재깍 말을 뒤집었다.
“아, 그러고 보니 비앙카가 절 위해 마실 걸 가져온다고 한 것 같아요. 참 착한 사람이에요. 그렇죠?”
웃으며 비앙카를 칭찬하는 앤시아를 빤히 바라보던 리샤르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군. 음료 색이 붉던데.”
붉은 음료? 뭐지? 라즈베리? 와인?
“부인이 가져다 달라고 했다더군.”
“아, 네. 항상 비앙카에게 부탁하고는 해요.”
“과일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쓰며 날 유혹했소. 그런데도 부인은 그 하녀의 편을 들 텐가?”
“네? 물을 뒤집어쓰고…… 유혹을 했다고요?”
비앙카. 너 정말 노력했구나.
정작 유혹을 받은 리샤르는 곧장 앤시아에게로 달려온 듯 옷차림에 흠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어떻게 감추고 있었을까 싶을 만큼 짜증이 가득한 리샤르의 얼굴을 보며 앤시아는 안도했다. 그리고 안도하는 자신에게 당황했다.
앤시아의 당황한 모습이 리샤르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몇 번이고 부탁했을 텐데.”
억누르듯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습하게 느껴져 앤시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를 아끼는 것까지는 내가 참을 수 있소. 하지만, 날 유혹하려 했다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부인이라니.”
리샤르의 얼굴이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내가 어디까지 더 노력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날 봐 줄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