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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65화 (65/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65화.

아, 상처받았다.

앤시아는 리샤르가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목격하며 혼란스러웠다.

그가 괴로워하는 게 안타까워야 하는데 오히려 기뻤다. 비앙카가 아닌 앤시아를 향해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고, 앤시아의 애정을 갈구하는 리샤르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리샤르가 사랑스러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안 돼. 주인공에게 마음 주지 마. 당신도 내게 감정 쏟지 마.

앤시아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손에 감기는 이불이 거추장스러워 더듬거리는 순간, 리샤르의 손이 이불을 끌어당겼다. 사고가 정지했다.

다가오는 리샤르를 피해야 하는데 피하고 싶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감정의 동요에 앤시아는 그를 밀어낼 핑곗거리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다급해진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고스란히 외치고 말았다.

“공작님은 운명적으로 비앙카에게 끌릴 수밖에 없어요.”

리샤르의 움직임이 멈추자 앤시아는 필사적으로 해야 할 말을 떠올리려 했다.

아직 시기가 아닌 것뿐이야.

당신은 첫날밤을 보낸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 사람이잖아.

난 첫 밤조차 보내지 않았는데.

다른 기대 하게 하지 말란 말이야.

앤시아는 차마 할 수 없는 말들을 삼키며 적절한 변명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런 앤시아의 망설임을 기다리다 못한 리샤르가 다시 다가왔다.

결국 머릿속을 빙빙 돌던 말이 튀어나왔다.

“공작님과 저는 인연이 아니에요. 비앙카, 그녀가 당신의 진실한 사랑이 될 거라고요.”

“뭐?”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횡설수설하듯 본심을 내뱉었다.

“하, 그게 무슨.”

험한 말이 나올 것 같아 리샤르는 이를 악다물었다.

앤시아는 스스로 내뱉은 말에 당황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숨만 들이켰다.

리샤르는 앤시아가 한 말들에 기가 막혔다. 운명이니 진실한 사랑이니 하는 그녀가 동화 속이야기에 푹 빠진 어린 소녀처럼 보였다.

단지 그 대상이 왜 하필 리샤르와 비앙카인지 의문이었다.

어쩌면 앤시아는 그녀의 운명인 상대가 따로 있고 언젠가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이 짐작이 사실이라면 리샤르는 속을 태우는 이 감정을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차라리 전 약혼자에게 돌아갈 생각뿐이라고 말하는 편이 덜 어이 없겠군.”

물론 앤시아는 돌아갈 생각이었다.

백작가로,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답을 못 하고 흔들리는 녹안에 에리샤르의 참았던 분노가 눈앞을 까맣게 불태웠다.

“부인.”

앤시아의 팔을 붙잡는 손이 전에 없이 거칠었다.

“지금 나단 레슬리를 떠올리고 있다면 당장 지우는 게 좋을 거요.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게 아니라면.”

앤시아는 갑자기 나단을 입에 올리며 화를 내는 리샤르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여기서 오라버니 얘기가 왜 나와요?”

“왜, 날 그 비앙카라는 하녀 따위와 엮고 부인은 제 운명이라 여기는 나단에게 돌아가기라도 하려는 건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정말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나 단이 나오고, 저런 해석을 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내가 그 하녀와 운명이라고?

그 하녀가 나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이제 앤시아는 당황을 넘어 화가 났다.

제 물음에 일절 대답하지 않고, 무작정 화부터 내고 있는 리샤르의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 어울려요. 길을 막고 물어보세요. 비앙카와 공작님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덩달아 화가 나 이성이 흐려진 앤시아는 될 대로 되라 소리쳤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난 그 여자가 싫소. 내 주변을 맴돌고 부인의 마음을 이용하는 파렴치함에 치가 떨려.”

리샤르의 명확하고 직설적인 의사 표현에 앤시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부인을.”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리샤르의 분위기가 수상했다. 무언가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어 버리게 될 것 같았다.

“자, 잠깐.”

“좋아하오.”

기어코 리샤르에게서 나온 고백에 앤시아의 동공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내가 함께하고 싶은 건 부인이야.”

리샤르의 손이 앤시아의 뺨을 스쳤다. 굳어서 꼼짝도 못 하는 앤시아의 목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리샤르가 다가왔다.

이상한 오해나 하고 엉뚱한 말이나 하는 앤시아가 뭐가 그리 예뻐서 입을 맞추려는 걸까.

앤시아는 도무지 리샤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앤시아, 자신이었다. 그를 밀어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비앙카를 저와 엮는다며 화내는 리샤르의 행동이 기뻤다. 그의 행동을 쉽게 받아 줄 것만 같았다.

앤시아는 흔들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다가오는 입술을 피했다.

“부인?”

고백을 받아 줄 것처럼 보였던 앤시아의 회피에 리샤르는 의아했다.

한편 앤시아는 흔들리는 마음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느라 리샤르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었다. 혼란 속에 리샤르를 힘없이 밀어내자, 다행히 그는 쉽게 떨어져 주었다.

앤시아의 미약한 거부에 한발물러서긴 했으나 리샤르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비앙카와 자신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이제 끝임을 알려야 했다.

“부인에게 해야 할 말이 있소.”

앤시아의 망상을 해명하기 위해 어떻게든 다시 대화를 시도하려 손을 뻗었다.

앤시아는 저 손이 자신을 얼마나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다루는지 알았다. 이상하리만치 감정이 요동치는 지금은 닿고 싶지 않았다.

닿아선 안 될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쳐 내고 말았다.

“아…….”

무의식중에 쳐 낸 탓에 앤시아는 제가 해 놓고도 당황해 얼어붙었다.

단단한 리샤르의 손을 쳐 낸 앤시아의 손이 붉게 달아올랐다.

리샤르는 본인의 감정을 솔직히 고백했음에도 회피하기만 하는 앤시아가 야속했지만, 그녀의 창백한 안색에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지.”

리샤르가 낮은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앤시아는 그를 잡지도,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리샤르가 방을 나가고 난 후에도 앤시아는 한동안 자리에 눕지 못했다.

기색이 미약했으나 분명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마음이 쓰였다.

그러면서도 한 번 밀어낸 정도로 쉽게 포기하고 등 돌린 리샤르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스스로 밀어내 놓고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앤시아는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지 못한 채 하염없이 리샤르가 나간 문만 바라보았다.

***

새벽에 부부 침실을 방문한 리샤르와의 감정적인 대화 탓에 한참을 고민하고 뒤척이다 잠든 앤시아는 아침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눈을 떴다.

두꺼운 커튼이 열리고 가벼운 환기를 위해 반만 열린 창문 틈으로 찬 공기가 들어왔다. 앤시아가 춥지 않도록 숄을 둘러 주는 손길이 익숙했다.

“마님, 오늘 아침 식사는 방으로 들일까요?”

“주인님께서 자리를 비우셨으니 편하게 방에서 드시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보지 못하는 건 아쉬웠다. 이 모순적인 감정이 앤시아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렇게 빨리 저택을 비울 줄 알았다면 좀 더 천천히 대화해 봤으면 좋았을걸.’

감정이 일렁이는 감각에 앤시아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넋을 빼고 있는 앤시아의 모습에 엘리가 조심스럽지만 발랄하게 아침 메뉴를 읊었다.

“요리장님께서 동부에서 난 마지막 복숭아를 힘들게 구하셨다고 해요. 저희도 이 시기에 복숭아를 보는 건 처음이에요.”

혹시나 거절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엘리의 말에 앤시아는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졌다.

언제나와 같이 충실히 앤시아를 보살피는 엘리와 줄리를 바라보다 새삼스레 그녀들 역시 원작과다르다는 걸 느꼈다. 자신을 향한 호의가 뒤늦게 따뜻하게 다가왔다.

“요리를 들이라고 할까요?”

요리장이 힘들게 구했다는 과일을 거절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준비하시라고 알리고 올게요.”

엘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가볍게 씻고 줄리의 손에 머리가 꾸며지는 동안 앤시아는 비앙카의 부재를 신경 쓰고 있었다.

평소에도 자주 늦는 편이지만 지금쯤이면 뒤늦게 나타나 하품을 감추려 애쓰는 비앙카와 눈이 마주치고는 했다.

‘오늘은 아예 점심때나 나타나려는 건가?’

비앙카가 보이지 않는 이유가 리샤르의 부재 때문이구나 싶어 참 솔직한 여주인공답다고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알싸한 감각이 위장을 스치며 앤시아를 불편하게 했다.

늦은 아침은 요리장의 혼을 담은 준비로 이른 점심이 돼 버렸다.

일부러 넉넉하게 가져오게 하고 하녀들에게도 나눠 주던 앤시아는 문득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 비앙카가 조금 궁금해졌다.

“비앙카가 오늘 좀 늦나 봐. 오늘 메뉴가 푸짐해서 좋아했을 텐데.”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 중 복숭아만 집어 먹던 앤시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태연히 물었다.

그러자 줄리와 엘리, 두 사람의 시선이 수상하게 이리저리 흔들렸다.

망설이던 두 사람 중 줄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앙카는 떠난 것 같습니다.”

마지막 복숭아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던 앤시아는 그대로 굳었다. 줄리의 말이 귀로는 들렸는데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고 빙빙 돌았다.

“다시 말해 줄래?”

“실은 저희가 매일 비앙카 방에 들러 아직 잠들어 있는 그 앨 깨운 뒤 마님을 모시러 오거든요.”

“오늘은 방에 없기에 일에 적응한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점심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아 시녀장님께 이 일을 의논 드리니 떠났다고 합니다.”

비앙카를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매일 그녀를 깨워 왔다는 하녀들이 기특했다. 동시에 하녀들이 들려준 믿지 못할 사실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비앙카가 떠났다고? 이런 식으로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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