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66화.
그럴 리 없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누구도 아니고 여주인공인데.
“말도 안 돼.”
“맞아요. 짐도 안 챙겨서 떠나다니 너무 수상하잖아요.”
짐도 챙기지 않고 갑자기 사라진 아름다운 하녀.
이건 어디로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새벽녘 급하게 떠난 리샤르를 쫓아가느라 짐 하나 챙기지 못한 건 아닐까.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생각했으나, 리샤르의 단호한 모습이 떠올랐다. 비앙카가 아무리 부탁했다 한들 데리고 갔을 리 없었다.
어째서인지 초조한 마음이 가라 앉지 않았다.
앤시아는 급히 방을 나섰다. 전에 없이 굳어 버린 앤시아의 얼굴에 뒤를 쫓는 하녀들의 발걸음도 긴장한 듯 조심스러웠다.
앤시아는 시녀장의 개인 집무실 문을 다급히 열어젖혔다.
편지를 쓰고 있던 로사가 한숨과 함께 편지를 슬쩍 치웠다. 티나지 않게 치워 내려 노력했으나, 무언가 감추는 기색이 역력했다.
호기심을 불러왔으나 지금 급한건 다른 일이었다.
“로사. 내 전담 하녀가 내게는 말도 없이 떠났다는데. 그걸 당신은 알고 있다고 들었어.”
“예, 공작가 안에서 일어난 일은 전부 알고 있습니다.”
“시녀장의 성실함은 알고 있어.
지금 내가 묻는 건 비앙카가 정말로 떠났냐는 거야.”
“떠났습니다.”
“어디로?”
“제멋대로 떠난 하녀의 행방까지는 아무리 유능한 저라도 무리입니다.”
“시녀장이 무척 신경 써 주기에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 줄 알았어.”
“그럴 리가요. 평민과 개인적인 친분 따위는 없습니다.”
비앙카와 대화할 때 환하게 웃던 얼굴이 생생하건만 로사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어차피 불성실한 하녀 하나가 사라진 것뿐입니다. 마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이 아니지요. 아니면, 그 아이가 마님께 각별할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건 줄리와 엘리도 궁금해하던 점이라 마른침을 삼키며 앤시아를 지켜보았다.
앤시아는 질문에 답이 아닌 여지를 남겨 두었다.
“돌아온다면 내게 알려 줘. 내 쫓거나 벌을 주지 말고.”
“일을 내팽개치고 도망간 하녀가 돌아오는 경우는 없지만, 마님의 넓은 아량은 기억해 두겠습니다.”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데도 앤시아는 대항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복도로 나온 앤시아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비앙카와 시녀장 로사는 친밀해 보였기에 이곳에 오면 여주인공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지 알았다.
이대로 비앙카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앤시아의 얼굴이 창백했다.
“마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그보다 비앙카의 방을 봐야겠어.”
“네, 모시겠습니다.”
줄리가 앞서고 엘리가 부축하듯 곁을 지키며 비앙카가 묵었던 숙소로 향했다.
전담 하녀가 되면 앤시아와 가까운 곳에 방을 배정받거나 전담하녀끼리 방을 사용하는데 비앙카는 처음 주어진 개인 방에서 죽 묵어 왔다고 했다.
비앙카를 리샤르와 자주 만나게 하는 것만 생각했지 그녀가 어떤 식으로 생활하는지에는 무관심했었다.
앤시아는 반성했다.
평소에 비앙카를 제대로 알아두었다면 이렇게 당황스럽지 않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여기입니다.”
보아 왔던 그 어떤 하녀의 방보다 넓고 가구들이 제법 좋아 보였다. 다른 하녀들이 묵고 있는 방과 차이가 컸다.
하녀가 묵을 숙소는 모두 시녀장인 로사가 직접 지정해 주고 관리한다. 확실히, 로사는 비앙카를 다른 하녀들과 차별해 대우했다.
다시 로사에게 돌아가 물어봐야 하나 고민 되었다. 하지만 막상가서 무얼 물어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떠났다면 살던 마을로 돌아간 걸까? 아니면 마을에서 새 일자리를 찾고 있을까?
생활감이 묻어나는 비앙카의 방을 보며 새로운 의문도 떠올랐다.
“갑자기 떠난 하녀의 방이 방치되는 경우가 흔해?”
대귀족의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가 하룻밤 만에 사라졌다. 빈손으로 떠났을까 의심이 갔다.
물론 앤시아는 비앙카를 의심하지 않지만, 보통은 그러지 않나 싶어 묻자 역시나 두 사람도 의아해했다.
“두고 간 짐은 전부 확인하는 게 절차이기는 합니다.”
“짐도 두고 급하게 떠날 정도면 도망친 거 아니에요?”
엘리의 걱정에 앤시아는 비앙카가 언제 떠났는지 알아 오라고 하고 방을 살폈다.
애초에 가져온 짐은 얼마 없어 보였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소소하게 늘어난 소품들이 비앙카의 취향을 짐작하게 했다.
잠시 방을 살피는 사이 경비를 만나고 온 줄리에게서 비앙카가 나가는 모습을 본 이가 아무도 없다는 말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역시 비앙카는 도망친 거예요.”
“도망친 거라면 경비병이 잡아냈을 거야.”
공작가는 숨어드는 것만큼 몰래 나가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혹 시녀장이 비앙카를 도운 게 아닐까? 그 전까지의 친근하던 사이를 모두 부정하고 선을 딱 긋는 태도로 미루어 보아, 어떤 정보는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아 초조해졌다.
“엘리, 줄리. 난 방으로 돌아갈테니 두 사람은 비앙카에 대해 알아봐 주지 않을래? 사용인들에게 물어봐도 좋고 돈이 들어도 좋아.”
“네, 마님.”
두 사람을 보내고 방으로 돌아온 앤시아는 불안한 듯 방 안을 서성였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뛰어나가 비앙카를 찾고 싶었으나 허약해 빠진 몸은 방해만 될게 뻔했다.
“리샤르를 쫓아간 거면 차라리 좋을 텐데.”
어디까지나 앤시아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야, 비앙카.”
답답한 마음에 앤시아는 그녀가 갈 만한 곳을 떠올리기 위해 머릿속에서 원작을 필사적으로 되짚어 봤다.
몇 번이고 곱씹었던 내용이었는데도 마음이 급하니 오히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지. 리샤르가 돌아오기 전에 비앙카를 찾아야 할 텐데.’
마수 이상 증식 때 리샤르는 크게 다친다.
그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만큼 본능만 남은 리샤르에게 비앙카가 선뜻 다가가며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깊어진다. 무척 중요한 이벤트였기에 리샤르가 다칠 때 비앙카가 이곳에 있어야 했다.
앤시아는 문득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던 걸음을 멈췄다.
“어?”
리샤르가 다친다.
당연한 흐름이기에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필연적으로 생겨날 미래.
떠올린 것만으로도 가슴 안쪽이 찌르르 울리듯 아파졌다.
“가슴이…… 아파?”
리샤르가 다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앤시아는 생각을 방해하는 가슴의 통증을 작은 주먹으로 탕탕치며 지우려 했다.
“내 감정이 어떻든, 급한 건 이런 게 아니야.”
리샤르가 언제 다쳐서 돌아올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었다. 그 전에 비앙카를 찾아내야 했다.
앤시아는 자꾸만 틀어지는 상황에 초조해졌다. 불명확한 미래에 불안해졌다.
“일단 비앙카부터 제자리로 데려와야 해. 그럼 다시 원작대로 흘러갈 수 있을 거야.”
리샤르를 향해 자꾸만 기우는 감정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한참 만에 돌아온 줄리와 엘리에게서 이렇다 할 정보를 얻지 못했다. 앤시아는 곧장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길드에 의뢰하러 가야겠어.”
“비앙카를 찾는 의뢰라면 제가다녀오겠습니다.”
“그건 저희에게 맡기고 마님께선 어서 쉬셔야 해요.”
종일 바뀐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앤시아의 몸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이마엔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고, 안색은 낮보다 어두워져 있었다.
앤시아는 언제든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움직여야 할 이유가 있었다.
“너희가 길드에 의뢰하면 무시당할 거야. 공작 부인이 가면 무시도 안 할 거고 더 노력해 주지 않겠어?”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괜찮아. 마차를 타고 갈 거니까.”
“마님, 이러다 쓰러지십니다.”
한 달간 앤시아를 곁에서 지켜온 그들은 그녀의 상태를 제법 잘 파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호의는 따뜻했지만, 지금은 비앙카를 찾는 게 중요했다.
“난 비앙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겠어. 만나서 떠나야 할 이유가 뭐였는지,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다시 데리고 올거야.”
작지만 단호한 앤시아의 목소리에 줄리와 엘리는 하는 수 없이 준비를 서둘렀다.
유능한 사용인들 덕에 해가 지기 전 마을 중앙에서 살짝 벗어난 위치의 길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이는 건물로 들어서자 깔끔한 차림에 정형 화된 웃음을 보이는 직원들이 앤시아를 반겨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바람처럼 빠르게 고민거리를 해결해 드리는 바람 길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힐끗 안을 둘러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해결사부터 용병, 가볍게는 심부름센터까지 다양한 인력을 상시 보유한 듯 보였다.
앤시아는 길게 고민할 것 없이 곧장 본론과 함께 엘리에게 눈짓해 금화 주머니를 열어 보이게 했다.
“알고 싶은 정보가 있는데.”
“귀한 분이 오신 듯하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역시 어디서든 금의 위력은 즉각적으로 발휘된다.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안쪽에 마련된 귀빈실로 들어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깔끔한 차림의 남자가 자신을 길드장이라 소개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내 하녀를 찾고 있어. 이름은 비앙카. 평민이고 갈색 머리에 녹안, 굉장한 미인이야.”
“죄송하지만 그 의뢰는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공작 부인.”
용건을 말하기가 무섭게 길드장이 정중하게 웃는 얼굴로 거절했다.
앤시아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공작 부인임을 어필하며 요구했으나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부군께 물어보시면 답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