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67화.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가벼운 어투에 앤시아는 백작 부인의 말투를 흉내 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금 공작님께서 이 영지를 위해 가장 위험한 곳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우고 계신 걸 알면서 비꼬는 건가?”
“그럴 리가요. 충언을 곡해하시니 저도 안타깝습니다. 어느 길드를 찾아가신다 한들 그윈티드영지에서 절대 권력자의 흠이 될 일은 조사해 주지 않을 겁니다.”
“절대 권력자의 흠이 될 일이라니? 이건 불륜이나 내연녀에 관한 의뢰가 아닐세.”
“차라리 그런 의뢰라면 공작 부인의 슬픈 마음을 달래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꾸며진 슬픈 얼굴을 보이는 길드장의 태연한 반응에 앤시아는 그가 한 말들이 거짓이 아닌 경우를 생각해야 했다.
비앙카가 사라진 일에 리샤르가 개입한 것일까? 게다가 흠이 될만한 일이라면서 애정 문제는 아니라는 듯한 태도는 또 무엇인가? 무엇보다 길드장은 무슨 수로 그 사실을 알게 된 거지?
이어지는 의문에 앤시아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공작가에 세작이라도 심어 두었나 보군.”
“세작이라니요. 남들보다 부지런히 귀 기울이면 알 만한 소소한 이야기를 귀여운 새들이 물어 나를 뿐. 오해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북부에서 그윈티드 가문을 적으로 두는 일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공작이 관련된 일이라면 이들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공작 부인이 쫓아다니며 캐려 할 정도의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앤시아는 알아야 했다.
비앙카를 찾아야만 리샤르가 마수 토벌에서 돌아올 때까지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내가 매우 아끼는 하녀야. 공작님은 내 권한에 참견하지 않겠다고 약조하셨고.”
“그러셨군요. 공작님께서 약속을 어기셨다니 안타깝습니다.”
길드장은 앤시아의 말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가볍게 대응했다. 공작 부인의 지위를 내세우거나 돈주머니 몇 개로 길드장의 입을 열게 하기는 힘들어하실 겁니다.”
길드가 정보통이라는 걸 드러내는 속삭임에 앤시아는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았으나 앤시아가 궁금한 사항에 대해선 결코 입을 열지 않으리라. 정보를 쥐고 있는데도 입을 열 생각이 없는 길드장을 보며 앤시아는 최대한 침착하게 몸을 돌렸다.
“어이쿠, 공작 부인께서 가신다니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길드장은 앤시아가 마차에 탈때까지 따라와서는 연신 인사를 건네 왔다. 그린 듯한 미소 하며, 완전히 아첨하는 모양새였다.
“언제든 방문해 주십시오. 저희 길드는 많은 걸 알고 있기에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다음엔 어떤 질문이든 답을 들을 수 있길 바라지.”
안 그래도 비앙카의 부재로 정신없는 상황에 밀당까지 하려니 머리가 아파졌다. 마차를 오르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등을 기댄 순간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 비앙카를 찾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앤시아는 불안해지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다스리며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겼다.
앤시아는 백방으로 비앙카를 찾아다녔다. 줄리와 엘리의 만류에도 불안감에 직접 몸을 움직였다.
하녀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금화를 쥐여 주고 돌려보낸 앤시아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며 쓰러질 뻔했다.
설마 비앙카가 다친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누가?
길드장의 태도를 보아 리샤르가 연관된 듯 보였으나 답을 알려 주는 이는 없었다.
이대로 비앙카를 잃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리샤르를 향한 마음과 비앙카를 걱정하는 마음이 뒤섞여 앤시아를 괴롭혔다. 덕분에 앤시아는 밤새 끙끙 앓았다.
***
앤시아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수프조차 먹지 못하고 다시 비앙카를 찾으려 몸을 일으켰다.
“마님, 제발 쉬셔야 해요.”
“저희가 찾겠습니다. 마님의 발이 되고 눈이 될 테니 부디 지금은 휴식을 취해 주십시오.”
안 그래도 아침부터 머리가 빙빙 돌아 거동이 힘든 터였다. 앤시아는 하녀들의 호의를 받아들이며 자리에 누웠다.
“고마워. 부탁할게.”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불안해하는 앤시아를 본 엘리와 줄리는 비앙카를 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변했다.
밤늦게까지 비앙카가 있을지도 모를 마을의 여관이나 가게, 경비병들을 찾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그렇게 온갖 곳을 헤매고 다녔는데도 첫날 알아낸 사실 외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죄송하다며 고개 숙인 하녀들의 얼굴에 미안함과 피곤함이 뒤섞였다.
그녀들을 돌려보낸 앤시아는 위통이 오는 것처럼 속이 조여드는 두려움에 한참을 울었다.
“어디로 간 거야, 비앙카…….”
사라진 비앙카를 찾을 길이 막막해지자 앤시아는 전에 없이 두려워졌다.
원작이라는 막강한 패가 손에 쥐어져 있을 때는 행복하기만 하던 일상이 송두리째 뒤집혔다.
엘리와 줄리 외에도 사람을 사서 비앙카를 찾으려 했다. 몇 개의 금화 주머니가 텅 비도록 사람을 써 봤지만, 목격자 한 명 나오지 않았다.
수습 기사단과 호위에게까지 부탁해 경비병을 몇 번이나 귀찮게 해 봤지만, 역시나 허탕이었다.
비앙카가 나가는 사람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늘로 증발해 버린 것이 아니고서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비앙카가 영영 리샤르 옆에서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앤시아의 악녀가 되어 이혼당하겠다는 계획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게 뭐 어때서?
솔직히 이제 원작 따위는 아무 래도 좋았다. 제 마음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리샤르에게 흔들리면서 두 사람의 마음을 제 맘대로 다룰 수 있으리라 여긴건 오만이었다.
그로 인해 비앙카가 다쳤다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평생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이미 많은 게 바뀌었는데, 제가 고집스레 원작에 매여 있던 탓에 누군가가 다친다니,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다.
비로소 앤시아는 아득바득 붙잡고 있던 계획들을 머릿속에서 하나둘 지워 나갔다.
‘미안해, 비앙카. 나 때문에 틀어진 거야. 넌 아무 잘못도 없는데.’
앤시아의 눈에 저절로 눈물이 차올랐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두 하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수건을 꺼내 앤시아에게 내밀었다.
“아니, 안 울어. 아직 울 때가 아니야. 비앙카를 찾아야지.”
비앙카와 리샤르가 연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비앙카는 반드시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
비앙카를 본 이가 아무도 없다는 건 이상했다. 마지막 목격자는 아마도 비앙카가 떠난 걸 알고 있는 시녀장이거나 유혹당한 리샤르였다.
두 사람 모두 저택 안에서 본게 마지막.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거대한 앤시아를 보고 반갑게 웃으며 달려오던 비앙카를. 간식을 탐내고 빨래 바구니로 붕붕거리던 개구진 모습을. 간식을 가져가라고 할 때마다 반짝거릴 정도로 빛나던 눈빛을. 리샤르에게 보낼 물건을 가지러 들른 창고가 보물창고라며 신기해하던 천진한 얼굴을.
“세탁실, 조리실, 창고, 여기부터 탈탈 털어 보자.”
“마님, 말씀하신 장소는 전부 첫날 확인해 보았습니다.”
까지 부지런히 챙겼다.
앤시아가 기운을 낼 수 있다면 헛일이 되더라도 얼마든지 할 두하녀는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
적막 속에 의식을 잃었던 비앙카는 주변이 소란스러워짐을 느끼고 눈을 떴다.
가까운 곳이 아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몇몇 사람이 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아주 잠깐 도와달라고 말해 볼까 망설였지만, 할 수 없었다. 믿었던 시녀장의 배신은 비앙카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비앙카가 숨어든 공간은 거대한 창고 구역 중 가장 오가는 사람이 없는 약초를 모아 둔 곳이었다.
공작가 사람이라면 다치더라도 효과 좋은 약을 쓰지 선물로 들어온 약초를 따로 달이거나 사용하지 않았다.
어쩌면 주치의는 가끔 들를지도 모르나, 적어도 지난 며칠간은 앤시아의 심부름이나 쉬는 시간에 보물 창고 구경하듯 들렀던 창고의 약재 공간은 먼지만 뽀얗게 쌓여 있었다.
도망치듯 공작가를 빠져나가려던 비앙카는 지혈이라도 하려고 들어온 이곳에서 차라리 기본적인 처치를 하고자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