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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68화 (68/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68화.

어떻게든 몸을 추슬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비앙카는 미리 꺼내 둔 약재를 입 안에 넣고 꼭꼭 씹어 먹었다.

쓴 내가 확 풍겼지만, 이걸 먹어 둬야 상처가 곪지 않았다.

어깨의 상처에 붙여 둔 약재를 떼어 냈다. 피로 흠뻑 젖어 있었으나 지혈 효과를 톡톡히 보았는지 더 이상 상처에서 피가 묻어 나오진 않았다.

“으”

비앙카는 어깨에 새로운 약재를 붙이고 약재 포대 위에 몸을 뉘었다. 열만 떨어지면 제 발로 마을 의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진통과 수면 효과가 있는 약재덕에 상처를 입었음에도 서서히 수마가 몰려왔다.

***

하녀들과 함께 세탁실과 조리실을 탈탈 턴 앤시아는 비앙카의 흔적을 찾아 가장 구역이 넓은 창고에 도착했다.

마침 안에서 나오는 하인들이 창고 입구를 지키는 병사와 관리 인에게 물품 반입을 확인받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지키고 있는 거대한 창고에 몰래 들어가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마님, 창고는 첫날 확인해 봤어요. 혹시나 귀한 물건이 사라졌을 수 있어서 더 철저히 확인한 거로 알아요.”

“사람이 하는 일에 실수가 있을 수 있잖니. 직접 확인해야겠어.”

창고는 비앙카가 종종 언급했던 장소였다. 특히 약초가 방치되는 게 아깝다며 비앙카가 자주 언급 했기에 더욱 신경 쓰였다.

“약초를 보관하는 곳부터 가 보자. 안내해 줘.”

의가 제조한 약으로 충분했다.

그렇다고 사용인들 멋대로 선물로 들어온 약재를 쓸 수도 없으니 이곳에서 약재는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다. 약초에 익숙한 비앙카가 아까워할 만도 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셔야 해요, 마님.”

“그래. 알았어.”

엘리의 뒤를 쫓으며 예감이 들었다.

창고 안에 얇은 벽으로 구역이 나뉜 공간으로 다가가자 약재 특유의 냄새가 풍겨 왔다.

안내하는 엘리보다 한발 앞서 안으로 들어서던 앤시아는 그대로 멈춰 섰다.

약재 냄새와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마치 짚단이라도 쌓아 놓은 것처럼 여기저기 쌓여 있는 약재들 사이에 비앙카가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옷이 온통 피투성이인데도 앤시아가 비명을 지르지 않은 건 비앙카의 가슴이 천천히 움직이며 숨을 쉬고 있음을 알려 준 덕이었다.

앤시아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비틀거릴 만큼 겁을 먹었음에도 비앙카에게 다가가 그녀를 흔들었다.

“비, 비앙카.”

“으응…….”

식은땀에 흠뻑 젖은 비앙카가 미간을 찌푸렸다. 앤시아는 부름에 반응을 보이는 데 안도했다.

“비앙카, 정신이 드니?”

안도한 앤시아와 달리 악몽 속에서 헤매던 비앙카는 자신을 붙든 그림자에 덜컥 겁이 났다. 여전히 불타는 것 같은 어깨의 통증과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 그녀를 불안에 떨게 했다.

“오……지 마.”

열이 올라 몽롱한 머리와 흐릿한 눈은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비앙카는 치료를 위해 어깨에서 뽑아 두었던 단검을 쥐었다.

“위험합니다, 마님!”

비앙카가 단검을 쥐는 순간 줄리는 앤시아를 끌어당겨 거리를 벌렸다. 엘리 역시 허둥지둥 옆에 있는 포대를 들어 방패처럼 앞으로 내밀며 앤시아를 지키려 했다.

정작 단검을 든 비앙카의 손은 힘없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저……리 가……..”

“비앙카. 나야. 네가 항상 마님이라고 부르는 앤시아야.”

“난… 도우려고 한 건데….”

“응, 알아. 이번엔 내가 도와줄게.”

비앙카는 주춤 뒤로 살짝 물러 섰다. 자신은 그녀의 남편인 공작님을 유혹하려 했다.

공작이 제게 화를 냈듯이, 공작부인 역시 그녀에게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벌을 주려 다가오는 걸지도 몰랐다.

“못…… 믿어……. 아, 아파.

왜…… 흑…….”

경계하던 줄리와 엘리조차 당황할 만큼 비앙카는 손에 든 검을 앞으로 죽 뻗은 채 울기 시작했다.

앤시아는 검을 들고 사람들을 잔뜩 경계하는 비앙카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무서워……. 여긴…… 다 날 미워해……. 왜…… 왜.”

항상 사랑받아야 했던 비앙카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도움을 거부했다. 더듬더듬 두려움을 토해 내는 비앙카에게 앤시아는 자신을 겹쳐 보았다.

노력하는데도 좀처럼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어설픈 악녀생활에 불안해하면서도 애써 즐겁게 지내 왔었다.

비앙카의 등장에 역시나 예정된 미래구나 싶어 필사적으로 밀어붙인 탓에 주인공 두 사람의 관계가 크게 어그러졌다.

“마님, 비앙카가 피를 많이 흘려서 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제압할 테니 경비를 불러 주시겠어요?”

“포대가 두꺼워서 이걸로 누르면 될 거예요.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가세요, 마님.”

엘리와 줄리의 각오에 오히려 앤시아는 두 사람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까이 가지 않을게. 잠깐만 비켜 주렴.”

앤시아의 상냥한 미소에 두 사람은 옆으로 비켜서면서도 비앙카를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 숫자가 줄어들자 비앙카의 시선이 앤시아에게 고정됐다.

“비앙카.”

“아파……. 무서워…….”

“응, 비앙카. 나도 아픈 거 싫어. 무서워. 그래서 빨리 안 아프고 싶었어.”

이혼 후의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다. 막연한 희망으로 현재를 채찍질하며 나아갈 뿐이었다.

“네게 이런 아픈 일이 생길 줄 몰랐어. 알았다면 내가 좀 더 힘들어도 괜찮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물만 흘리는 비앙카에게 앤시아는 좀 더 본심에 가까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비앙카. 내가 네 편이 되어 줄게.”

줄곧 앤시아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무조건적으로 내 편이 되어 주었던 백작가의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한 진실은 언제나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나만의 짐.

쉬울 거라고 자기 암시를 걸며 걸어온 길은 막상 걷다 보니 의도한 것과 다른 방향이었다.

첫날밤 이후 틀어박혀 있기만 해도 소문만으로 악녀가 될 수 있었던 앤시아처럼 될 수 없었다.

나름 열심히 악녀답게 행동하고리샤르를 밀어냈음에도 앤시아를 싫어하는 이는 로사뿐이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맞는 길을 가야 하는데 이 길이 아니면 어쩌나 두려웠다.

그 불안한 길을 누군가와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설령 잘못 들어섰다 하더라도 무섭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함께 가 줄게. 치료하는 게 무섭다면 곁에 있을게. 누구도 믿지 못하겠다면 믿지 않아도 돼. 그냥 네 옆에서 널 도울 수 있게만 해 줘.”

곁에 누군가가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안심할 수 있는지 앤시아는 리샤르와 함께하며 알게 되었다.

내 편 하나 없는 공작가에 들어와 고집스럽게 악녀의 길을 걷고자 하며 외면했던 사람들은 그녀의 회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도 곁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든든하게 서 있었다.

이들의 호의를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무의식중에 밀어냈던 자신의 행동이 마치 비앙카가 겁을 먹고 검을 내려놓지 못하는 모습과 겹쳐 보였다.

“비앙카. 널 도울 수 있게 날 도와주지 않을래?”

“제가…… 도……와요?”

“응. 비앙카를 아프게 한 그 칼이 무서워서 다가갈 수가 없어.

내가 네 손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까?”

“마님은 제가…… 제가, 밉지 않으세요?”

“응, 비앙카.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 그러니 어서, 내가 네 손을 잡을 수 있게 해 줘. 내가 널 도울 수 있게 도와줘.”

앤시아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비앙카는 결국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울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몇 번이고 잘못했다 빌었다.

줄리가 눈으로 좋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칼을 멀리 쳐 내는 사이, 비앙카가 비틀거렸다.

앤시아는 얼른 그런 그녀를 향해 달려가 쓰러지지 않도록 끌어안았다.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그런데도 비앙카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안아 온 앤시아를 힘껏 끌어 안았다.

“도울……게요.돕고…싶었…….”

“응, 고마워. 비앙카가 도와줘서 도울 수 있게 됐어. 잘했어.”

“저…도움됐……죠?”

“응. 이제 안심하고 자도 돼. 깨어나면 하나도 안 아플 거야.”

“네…….”

앤시아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 듯 비앙카가 몸에서 힘을 뺐다.

줄리와 엘리가 재빨리 옆에서 비앙카를 받쳐 준 덕에 앤시아는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사람을 부르기보다 경비에게 부탁해 비앙카를 업고 공작저 의사에게 향했다.

의사는 비앙카의 상처와 상태를 확인하고는 너무도 쉽게 진단을 내렸다.

“처치는 평민이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합니다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마치 비앙카가 잘못되기라도 할것 같은 말에 앤시아는 숨이 턱막혔다. 안 그래도 창백한 비앙카의 안색에 걱정이 커지던 참이었다.

“숨, 쉬잖아.”

“예. 점점 약해지겠지만요.”

이 시대에 수혈이 되던가? 아니, 된다면 혈액형이 존재했겠지.

피가 부족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간이라도 먹여야 하나?

앤시아의 복잡해 보이는 얼굴에 의사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피가 부족하면 채우면 됩니다.”

“어떻게?”

“치유 마석으로 하지요.”

“그건 외상에만 듣는 거 아니었어?”

“치유 마석은 정확하게는 재생마석입니다. 잃어버린 피도 재생시켜 주지요.”

의사가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태연히 말했다. 앤시아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럼 사용해 줘.”

“사용할 수 없습니다.”

치료실에 비치된 치유 마석이 버젓이 보이는데도 의사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족한 피를 치유 마석으로 회복할 수 있다며?”

“공작가에 보관 중인 마석은 귀족과 기사들을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치유 마석의 값어치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었다. 백작가에도 몇 개 없을 만큼 귀한 마석이 북부라고 발에 챌 만큼 넘치는 건 아닐 테니까.

그렇다 해도 버젓이 테이블 위에 치유 마석이 있는데, 안 된다니.

아무리 귀한 마석이라고는 하나, 여긴 공작가였다. 모르긴 몰라도 물량이 부족한 건 아닐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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