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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69화 (69/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69화.

“비앙카는 내 하녀야. 공작 부인의 전담 하녀인데 안 된다고?”

“네, 안 됩니다. 아무리 공작 부인께서 아끼시는 전담 하녀라고 해도, 귀족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함부로 써 대다간 아무리 마석이 넘쳐 나는 공작가라도 부족해집니다.”

“귀족을 위한 거라 했으니 내 몫이 있겠지? 그걸 사용해. 그럼 되잖아.”

단호한 앤시아의 태도에 망설이던 의사는 결국 한숨과 함께 치료 마석을 집어 들었다.

비앙카의 상처 위에 올려 두는 것만으로도 치료 마석은 빛을 내며 반응했다. 매우 느릿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비앙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정도만 회복시켜도 자력으로 나을 수 있습니다. 열흘 정도 거동이 불편할 수는 있으나”

“아니. 비앙카의 몸에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아.”

비앙카가 떨어트린 단검에 공작가, 그것도 직계에만 내려지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간 비앙카를 찾아다니던 중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나중에 나타난 집사장이 놀라 수습해 가는 과정에 듣게 된 진실은 예상대로 였다.

리샤르가 비앙카를 다치게 했다.

이렇게까지 달라졌다면 원작을 따르는 건 의미 없지 않을까. 이미 많은 게 달라졌다는 걸 알면서도 목표를 잃어버리는 게 두려워 고집스럽게 버틴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됐다.

리샤르를 향한 마음이 흔들리는 걸 굳이 막아야 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30분 정도만 더 있으면 완치될 겁니다.”

“고마워.”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외상은 애초에 제 손을 쓸 일이 거의 없으니까요.”

의사가 자리를 뜬 후에도 앤시아는 한참 비앙카의 곁을 지켰다. 조금씩 아물어 가는 상처와 혈색이 도는 비앙카를 바라보다, 그녀를 다치게 한 리샤르를 떠올렸다.

마수 토벌을 떠나기 전, 리샤르는 앤시아에게 비앙카에 대한 적의를 명백히 전하고, 마음을 고백했다.

그날 앤시아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느라 강박적으로 그를 밀어낸 탓에 리샤르는 상처받은 얼굴로 출정을 나가야 했다. 그런 리샤르를 떠올리자 후회와 함께 꼭해 주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언제 돌아올까……”

생각이 많아지니 금세 열이 올랐다.

치유 마석이 이런 데에도 효과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앤시아는 점점 멀어지는 의식에 끝내 정신을 놓았다.

***

어딘가에서 갓 구운 빵 냄새와 고소한 수프 냄새가 풍겨 왔다.

딸그랑거리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에 깊이 잠들었던 앤시아가 서서히 깨어났다.

아삭아삭 씹는 소리, 후루룩 국물 마시는 소리가 어찌나 경쾌한 지 눈뜨자마자 식욕이 동할 정도였다.

눈을 떠 보니, 평소라면 앤시아가 눈을 뜨기가 무섭게 달려올 하녀들이 약간 떨어진 곳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너 미친 거 아니니? 마님 식사에 손을 대다니.”

“마님은 어차피 안 드시잖아.

아침은 매번 나눠 주셨는걸.”

“그래도 그렇지. 마님이 드시기도 전에 음식에 손을 대는 하녀가 어딨어?”

“그치만 이 따끈따끈하고 뽀얀빵 좀 봐. 식으면 너무 아깝잖아.”

비앙카의 손에 포동포동해 보이는 동그란 빵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뽀얀 김이 피어올랐다.

와. 저 모습 사진으로 딱 찍어서 빵집 앞에 붙이면 오전 중 완판 찍겠어.

“그래. 갓 구운 빵은 식기 전에 먹어 주는 게 맞지.”

“앗, 마님!”

앤시아의 부드러운 긍정에 비앙카가 빵을 신나게 주워 들어 입에 쏙 집어넣었다. 한쪽 뺨이 잔뜩 부푼 비앙카는 났던 화도 사그라들게 만들 만큼 마냥 사랑스러웠지만, 앞으로 비앙카를 하녀로 두려면 너무 풀어 주기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빵이 식더라도 규율을 지켜야지.”

입에 넣은 빵을 꿀꺽 삼킨 비앙카에게 앤시아는 조금 엄한 목소리를 만들어 내 말했다. 그래 봤자 여리고 사랑스러운 앤시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아진 정도로,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동안은 네가 적응하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앞으로 함께 살아가려면 이곳의 규칙에 따라야 해. 그러니 비앙카. 나는 네게 벌을 내릴 거야.”

벌을 내린다고 말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비앙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오늘은 디저트 금지야.”

엘리의 얼굴에 ‘그게 무슨 벌?

이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비앙카는 이 이상의 벌은 없다는 듯 시무룩해졌다.

“앞으로도 하녀답지 못한 행동을 한다면 그때마다 혼을 낼 테니까, 엘리와 줄리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할 거야.”

“네, 마님. 잘못했어요. 두 사람 말도 잘 들을게요.”

디저트 금지라는 말에 시무룩했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간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기에 갑작스러운 앤시아의지적에 서운해할 줄 알았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오히려 비앙카는 눈을 빛내며 기뻐했다.

“더 혼내 주세요, 마님. 마님께 혼나는 거 기분 좋아요.”

갑작스러운 비앙카의 성향 고백에 잡힌 손을 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전 그동안 칭찬해 주는 사람밖에 없었어요. 그게 다 절 위한 관심이고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엘리가 ‘그동안 줄리와 제가 했던 잔소리들은?’ 하는 표정으로 어이없어하다가 분통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처음이에요.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 주신 분은.”

비앙카가 반짝이는 눈으로 바짝 다가왔다.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비앙카의 녹색 눈동자에 비치는 앤시아가 뚜렷이 보일 정도였다.

아니 왜 여주가 나를 꼬시려는 것 같지?

앤시아는 예기치 못한 비앙카의 열렬한 충성에 당황했다. 그러다 문득, 환자인 비앙카가 무리해 움직이는 듯해 걱정스러워졌다.

천천히 손을 뻗어 비앙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프지는 않고?”

“상처 하나 없어요. 보여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앤시아는 다급히 당장이라도 옷을 풀어 헤칠 기세인 비앙카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비앙카가 이번엔 기회를 잡은 양 앤시아의 손을 꼭 마주 잡아 왔다.

“저, 마님께서 평민인 저는 평생 손도 못 대 볼 귀한 치유 마석을 내주셨다고 들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민망한 마음에 답을 망설이는 사이 비앙카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없는 동안 식사도 못 하고 많이 우셨다고 들었어요.”

뒤에 서 있던 엘리가 뜨끔한 듯 앤시아의 시선을 피했다.

“마님께서 절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데 전 멋대로 착각하고 사고를 쳤어요.”

“응? 사고?”

갑작스러운 고백에 앤시아가 의

“실은, 제가 칼에 찔린 이유는 큰 실수를 한 탓이에요.”

무슨 실수를 했다고 사람 어깨에 칼을 꽂았을까. 되묻는 대신 앤시아는 알고 있는 부분을 언급했다.

“공작님이 널 다치게 했다는 건 짐작하고 있어.”

리샤르가 비앙카에게 칼을 휘두른 이유가 너무도 궁금했지만, 피해자인 비앙카에게 물을 수 없었다.

마수 토벌에서 리샤르가 돌아오면 물어볼 생각으로 꾹 참고 있었는데 비앙카가 먼저 언급하니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맞아요. 공작님이 절 좋아하시는 줄 알고 유혹하다가 선을 넘었나 봐요.”

‘그거 그냥 말해 버려도 되는 거니? 여주인공의 머릿속은 꽃밭처럼 아름답기만 한 건가?’ 생글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고백해 버리는 비앙카 탓에 앤시아가 오히려 뒤에 서 있는 하녀들의 눈치를 봤다.

비앙카의 폭탄 발언에 지켜보던 엘리의 눈이 빔이라도 쏘아져 나올 것처럼 흉흉해졌다. 평소 감정의 동요가 없던 줄리의 얼굴에 조차 한기가 깃드는 게 실시간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비앙카는 자신이 유혹한 공작의 아내 앞인데도 태연하기만 했다.

“그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 앞에서 하면 어떡해? 미움받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앤시아의 걱정스러운 질책에 비앙카는 오히려 환한 웃음을 보였다.

“어차피 이젠 다 지난 이야기 인걸요. 이제 제겐 마님뿐이에요!

마님, 저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저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물으면 질문이 한 가지든, 백 가지는 다 답해 주고 싶어지잖아.

앤시아는 비앙카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으려 애써 침착하게 마주 웃었다.

“하나만이라면.”

“마님께서도 제가 공작님의 아이를 갖기 바라세요?”

웃고 있던 앤시아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주인공인 두 사람을 이어 줄 생각뿐이었지,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은 고려 해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아이를 갖는다면?

그건 어차피 앤시아가 떠난 후의 일이었다. 비앙카의 질문에 동요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몇 년이나 단련해 온 웃음이 흐려질 만큼 마음이 흔들렸다.

지난 며칠 사이 앤시아는 이제 원작의 흐름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가고자 마음먹기 시작했다. 리샤르가 좋으면 좋다고. 비앙카를 억지로 그에게 밀어붙이지 않을 거라고.

욱신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꾹누르며 앤시아는 비앙카의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비앙카. ‘마님께서도.‘라는 건 다른 누군가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니?”

앤시아의 웃음 속에 슬픔이 어리는 걸 발견한 비앙카는 붙잡은 손을 더욱 꼭 쥐었다.

“시녀장님이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마님은 몸이 약해서 아이도 가지기 힘들다고, 그것 때문에 불안해할 거라고요. 공작님도 마님께 불만이 많을 거라고…… 죄송해요.”

어쩐지 요즘 잠잠하다 싶더니 뒤에서 열심히 이런 일을 벌이고 있었구나, 싶으면서도 당시에는 앤시아가 원하는 방향이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앤시아가 말이 없자 눈치 없이마냥 해맑던 비앙카가 침울해졌다.

“전 정말로 마님도 원하시는 줄 알았어요. 귀족은 형식적인 결혼을 하고 아이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해서요. 제가 오해하고 잘못을 저질렀어요. 죄송해요. 두 분이 서로에게 진심이신 걸 알았다면 끼어들지 않았을 거예요. 아, 물론 그렇다고 그동안 제가 마님께 했던 행동들이 정당하다는 얘긴 아니에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죄송해요, 마님.”

비앙카가 잘못한 강아지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그간 제가 했던 행동들을 반성했다.

얄미울 때가 없었다 하면 거짓말이지만, 애초 제가 원작대로 흐름을 잇겠답시고 비앙카의 행동을 부추긴 것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니 비단 비앙카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앤시아는 멋쩍게 미소 지으며 비앙카를 다독였다.

“죄송할 거 없어. 비앙카가 느낀 대로 난 두 사람이 친해지길 바랐으니까.”

단지 마음에 걸리는 건, 로사가 생각보다 더 크게 관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비앙카와 로사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을 거란 예상은 했으나, 로사가 리샤르를 유혹하도록 앙카를 부추기고 있는 건 줄은 몰랐다. 그것도 거짓말까지 보태가며.

이상했다. 원작에서의 리샤르와 비앙카는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걸까?

로사가 앤시아를 미워한다는 건 누구보다도 앤시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불륜은, 오로지 앤시아에게만 피해가 오는 일은 아니었다. 리샤르 역시 좋지 않은 평가를 얻게 될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로사가 리샤르에게 연결해 주려고 고른 여자, 비앙카는 평민이었다.

‘신분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혐오감을 보이던 로사가 비앙카에겐 공작의 아이를 배라고 사주했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로사 혼자 저지른 일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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