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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71화 (71/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71화.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제 발로 다시 앤시아의 곁에 달라붙은 여인의 존재가 지긋지긋했다.

안 그래도 앤시아가 자신을 밀어낸 것이 신경 쓰여 찾아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비앙카를 상처 입힌 사람이 자신인 걸 알았으니 앤시아가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더더욱 부인을 볼 면목이 없어 리샤르의 한숨이 깊어졌다.

불쾌해 보이는 리샤르를 잠시 지켜보던 집사장은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고 물러섰다.

“골치 아프게 됐어.”

앤시아는 리샤르가 검을 휘두를 만큼 비앙카를 질색하는 걸 알게 되었음에도 끝내 그녀를 곁에 두었다. 그날 새벽, 아내를 찾아가 진심을 토로했음에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어째서 앤시아는 그녀를 그토록 옹호하고 곁에 두려 하는가.

그저 천성적인 선함 탓이라기엔 남편인 자신을 대하는 것보다 더 애틋했다. 이제는 비앙카가 밉다 못해 부러울 지경이었다.

부인에게 속한 사람이 되면 이토록 맹목적인 애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자신이 앤시아의 애정을 갈구하게 된 것을 어렴풋이 알아채기 시작한 리샤르는 애써 상념을 털어 내며 집무실로 향했다.

*

앤시아는 하녀들에게도 휴식 시간을 줄 겸 낮잠을 자려 했다.

침대에 누워 자리를 잡을 때쯤 바깥이 소란스러워져 귀를 기울였다.

서두르는 사용인들 사이에서 공작이 몇 번 언급되는 걸 듣고 리샤르가 돌아왔음을 알아챘다. 언제 다시 마수 토벌을 나갈지 모르는 공작의 귀가였기에 앤시아는 그를 만나기 위해 일어났다.

야근에 철야까지 하고 돌아온 남편 바가지 긁으러 출동하는 기분이었으나 비앙카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이건 꼭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기껏 쉬라고 보낸 하녀들을 불러들이는 대신 얇은 드레스 위에 겹쳐 입을 수 있는 로브를 걸치고 도톰한 숄까지 두른 후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일중독에 가까운 리샤르라면 집무실로 갈 것이라 예상했다.

최대한 빠르게 도착했으나 이미 열려 있는 문 사이로 보인 건 흩어진 보고서 종이뿐이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는 게 분명 한데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집무실이 아니면 회의실이나 기사단을 보러 가지 않았을까 싶어 앤시아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하녀들을 시켜 리샤르가 있는 곳을 알아내는 편이 빠를 테지만 마음이 급해 그저 스스로 종종걸음을 쳤다.

저택을 반 정도 헤맨 끝에 앤시아는 마침 지나가던 집사장을 붙잡을 수 있었다.

“저기, 집사장.”

“마님? 오수에 드신 줄 알았습니다.”

“응, 맞아. 공작님이 오신 것 같아서 찾아다니는데 안 보이셔.”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제일 먼저 가 봤는데 안 계셨는걸.”

“엇갈리셨나 봅니다.”

집사장은 차분히 리샤르의 소식을 전했다. 도착하자마자 집무실에서 보고서를 확인한 리샤르는 회의실에서 짧은 회의를 한 후 수습 기사단에 새로운 훈련 매뉴얼을 전하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전부 앤시아의 예상과 딱 들어 맞았으나 다리 길이와 체력 차이로 인해 몇 번이고 놓쳐 버렸다.

처음부터 집무실에서 기다릴 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앤시아는 점점 아파져 오는 다리를 통통 두드렸다. 가까운 주방에 들러 달달한 간식이라도 먹고 갈까 잠시 흔들리기는 했지만, 오기가 생겨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아까와 달리 닫혀 있는 집무실 문을 보고 앤시아는 누군가 들어갔음을 확신했다. 여전히 커다랗고 무거운 문을 몸으로 밀어 열자 리샤르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후우…….”

앤시아보다 한발 앞서 집무실에 도착한 리샤르는 며칠 사이 쌓인 서류를 빠르게 살피다 내려놓았다.

“피곤하군.”

리샤르는 피로해진 두 눈을 감은 채 치유 마석이 닿아 열기가 오르는 복부를 지그시 눌렀다.

기분상 밀착도를 높이면 더 빠르게 치유가 되는 듯해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치유 마석을 사용하느라 가만히 있을 시간에 앤시아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비앙카를 거두었다는 소식에 섭섭함이 가시지 않았다. 리샤르가 비앙카에 대해 불편함을 그렇게 호소했음에도 앤시아는 결국 그녀를 곁에 두길 택했다.

“제길. 이럴 시간이 없는데.”

오늘 저녁까지 더그 영지 너머산까지 도착하려면 지금부터 달려도 빠듯했다.

이제부터 해야 할 강행군을 생각하면 별거 아닌 상처라도 없애고 움직이는 게 맞았다. 이 시간에 쪽잠이라도 자야 하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사박사박.

천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는 부인의 기적이었다.

섭섭함이 녹아내리고 리샤르의 굳어 있던 얼굴이 풀어졌다. 리샤르의 감정이 순식간에 몽글몽글한 감각으로 둘러싸였다.

“공작님?”

앤시아는 설마 공작이 자나? 싶으면서도 조심스럽게 리샤르를 불러 보았다.

환불받으러 온 센 언니처럼 용건만 다다닥 외칠 예정이었던 앤시아는 지친 얼굴로 의자에 기댄 리샤르를 보고 있자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론 제 기척을 알아채지 못하는 게 의아했다.

“정말 잠든 거예요? 에이, 생쥐가 지나가도 알아차리실 수 있으고 있던 리샤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파삭…….

치유 마석은 일반 마석과 달리 가치가 높아 집사장이 슬퍼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보다 중요한 건 그를 목 끝까지 붉어질 만큼 놀라게 한 이였다.

앤시아는 큰 눈을 깜박이며 더없이 사랑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앗, 역시 자는 척하셨던 거네요.”

앤시아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리샤르의 감겨 있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아주 조금 입술 끝을 올린 채 나른하게 앤시아를 바라보는 리샤르의 외모가 미쳤다.

리샤르가 잘생긴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무방비한 모습은 저에게만 보여 준다는 걸 알고 있는 앤시아는 심장이 빠르게 날뛰기 시작했다. 리샤르를 향한 제 감정을 인정하자 그의 미모가 더욱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열이 올라 눈을 피하다 리샤르가 손을 얹고 있는 복부에 시선이 닿았다.

“공작님, 상처가…….”

옷과 손으로 가렸음에도 미처 다 덮지 못한 여러 개의 상처를 발견한 앤시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앤시아의 시선을 알아챈 리샤르가 풀어 둔 단추를 채우며 상처를 감추려 했다.

앤시아는 그런 리샤르의 손을 미약한 힘으로 붙잡았다. 리샤르가 조금만 거절해도 이 손은 쉽사리 떨어질 테지만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앤시아가 조심스럽게 리샤르의 풀어진 상의를 살짝 젖히자 커다란 손톱에 할퀸 듯한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앤시아의 심장이 아플 정도로 동요했다. 다친건 리샤르이건만 가슴이 찌르듯 아파졌다.

그동안 이 감정을 어떻게 참아 왔는지 본인도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도 리샤르는 앤시아가 보고 겁내지 않을까 싶어 제 상처를 가리기에 급급했다. 항상 리샤르는 앤시아를 생각해 주었는데 자신은 오히려 밀어내기만 했다.

계속해서 밀어내기만 하던 자신을 묵묵히 받아 주는 리샤르의 한결같은 모습에 새삼 울컥 눈물이 흘러나왔다.

“부인?”

리샤르는 다툼으로 끝났던 마지막 대화 탓에 아직은 앤시아를 마주하기 불편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아내를 어떻게 피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때 그의 상처를 보고 놀란 듯 안색이 창백해진 앤시아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잘못했소.”

우는 앤시아를 보고 놀란 리샤르가 무조건 자신이 잘못했다고 빌었다.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죄책감이 느껴졌다.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부인이 울 일이 아니오.”

“흑…….”

앤시아의 눈물에 리샤르의 머릿속이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 비앙카를 다치게 하고 내 쫓은 건 내가 너무 과했어. 부인에게 의논해야 했는데.”

“흐윽…….”

“떠나기 전 화를 내고 갔던 것도 미안하오. 그리고 또.”

두서없이 사과하던 리샤르는 그 렁그렁 고인 눈물조차 손에 쥐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아내를 보며 입 안이 바싹 말라 왔다.

뽀얀 뺨을 따라 흐르는 눈물방울에 결국,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말마저 꺼내고 말았다.

“좋아한다. 고백했던 것도 사과 하리다.”

앤시아를 달래고자 진심이 아닌 사과까지 끄집어낸 리샤르는 눈물이 뚝 그친 아내를 보고 씁쓸했다. 그러면서도 앤시아의 젖은 뺨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그래서요?”

아직 더 사과해야 할 게 있나 싶어 어두워지는 리샤르의 얼굴에 앤시아의 손이 살며시 닿았다.

“그래서 절 좋아하게 된 걸 후회하세요?”

“아니.”

망설일 것도 없이 튀어나온 리샤르의 본심이었다. 혹여나 제게 닿은 앤시아의 손을 떨어질까 급히 붙드는 건 덤이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정작 앤시아는 리샤르에게 손을 떼기는커녕 저를 붙든 그의 손을 꼭 마주붙잡았다.

이게 무슨 뜻일까.

리샤르의 푸른 눈에 어린 불안감과 기대감이 앤시아의 흔들리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자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한 리샤르의 감정이 앤시아에게 용기를 주었다.

“저도요.”

상냥한 속삭임에 리샤르는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려 앤시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도 당신이 좋은 거 같아요.”

확신이 아닌 모호함이 깃든 고백이었다. 고백을 듣는 리샤르역시 앤시아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북부의 냉혈 공작의 이런 멍한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그동안 피하기만 해서 미안해요. 아직 적응 중이라서 그래요.”

마음을 인정하기 시작하자 가슴이 쉴 새 없이 뛰었다.

“앞으로 노력할게요. 기다려 주실 거죠?”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리샤르의 어두웠던 얼굴은 빛이 깃드는 듯 서서히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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