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급한 건 중심점이 되어 줄
“이 충성심 좀 보라지. 공작가는 시녀장도 기사 못지않군.”
“서로 잘하는 일이 다를 뿐 마음만은 공작가를 위해 충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로사는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아서를 힐끗 본 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중심가에 빈 건물을 찾는 거라면 제가 봐 둔 매물이 있는데 알려 드릴까요?”
“적당한 곳을 알고 계십니까?”
“그런 걸 시녀장이 어떻게 알아?”
동시에 묻는 두 사람을 향해 로사는 차분히 답을 내주었다.
“영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빠짐없이 제 귀에 들어온답니다.”
회의 내내 벽에 붙어 서서 그림자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을 때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보좌관은 그런 로사를 향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야~ 공작 부인이 따로 없네.
그윈티드 가문은 정말 복 받았어.”
보좌관의 칭찬은 자칫 공작 부인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었다. 아서가 눈썹을 씰룩거리며 불쾌감을 드러냈으나 로사의 사무적인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깃들었다.
“감사합니다.”
겸양조차 없는 감사 인사였다.
*
공작가 회의실의 귀족들이 회의로 정신없이 바쁜 반면, 공작가 홀에 모인 사용인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로 모인 건지 알아?”
“몰라. 나도 갑자기 모이라고 해서 온 거라.”
앤시아는 급한 일을 하는 사용 인을 제외하고, 바로 모일 수 있는 이들을 불러 모았다.
공작 부인의 첫 호출이었기에 많은 사용인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와 인원이 상당했다. 개중에는 훈련하다 말고 달려온 수습기사도 몇몇 포함되어 있었다.
넓은 홀을 채운 수많은 이들을 지켜보던 앤시아는 사용인을 소집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집사장을 통해 가볍게 부탁한 일이었다. 앤시아는 자신이 공작가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절 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러다 홀이 꽉 차겠어.’
혹시나 시녀장 로사가 참견하지 않을까 기다려 봤지만, 도통 보이지 않았다.
지금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로사가 없을 때 빨리 해버리는 게 나았다. 홀 한가운데 있는 단상에 오르자 웅성대던 사용인들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몇몇 아는 얼굴은 앤시아를 호의적인 눈으로 바라봤지만, 대부 분이 낯설었고 이렇다 할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앞에 두니 절로 긴장이 됐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가까운 사람부터 먼 사람까지 천천히 눈에 담은 앤시아는 그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공작 부인의 행동에 놀란 사용인들은 허둥지둥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동안 미안했어.”
앤시아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약식혼 때도 그러했듯 홀 안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사용인들은 이게 무슨 소린지도통 영문을 몰라 눈만 굴릴 뿐이었다.
앤시아는 최대한 의연하게 허리를 펴고 모두를 향해 차분히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내가 너무 못되게 굴었던 거 알아. 따로 사과하기엔 잘못한 게 너무 많아 이런 자리를 마련했어.”
후회가 된다면 제대로 된 사과가 먼저였다. 앞으로 잘하자. 그렇게 마음먹고 앤시아는 진심을 모두에게 전했다.
“그동안 못된 안주인이라 많이 힘들었을 거야. 앞으로 더 바빠질 텐데 지금까지와 달리 고의가 아닌 필요에 의한 거니까 오해하지 말았으면 해.”
이 사과는 일부러 악녀 짓을 해왔던 것에 대한 진심이기도 했지만, 당분간 정신없이 바빠질 것을 알리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동안은 일부러 악녀처럼 굴며 너희를 고생시켰어. 하지만 앞으론 그거랑 별개로 더 바빠질 거야.’
이게 과연 사과하는 자리인지 맥이는 자리인지 애매해질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무의미한 일이 되더라도 속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침묵하던 사용인들 사이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시작되더니 이내 가까이에 서 있던 하녀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앤시아가 일반적인 귀족처럼 굴었다면 감히 이 정도의 말도 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용 인들은 그간 앤시아의 소소한 악행들로 인해 오히려 수혜를 입어왔다.
사용인의 질문은 예상하지 못한 터라 앤시아는 본인이 했던 악행중 하녀와 관련될 만한 걸 떠올렸다.
“간식을 뺏거나, 항아리를 깨거나.”
“마님께서 간식의 질을 개선하라고 말씀해 주신 덕분에 매일 맛좋은 간식을 푸짐하게 받고 있습니다. 휴식 시간이 기대됩니다.”
“고루한 항아리들을 최신 유행으로 교체한 덕에 복도를 지날때마다 뿌듯합니다.”
말을 하기가 무섭게 칭찬과도 같은 말이 돌아왔다.
“어…… 기껏 해 준 요리를 먹지 않기도 하고…….”
“마님. 저 하몬, 공작가의 수석 요리장으로서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마님께서 흡족해하실 만한 레시피를 연구하는 것이 제 새로운 즐거움입니다. 내치지만 말아 주십시오.”
“덕분에 저희 모두 다이어트를 해야 할 만큼 포식하고 있습니다.”
앤시아가 먹지 않는 요리는 물론, 새로운 레시피 개발을 위한 요리장의 시도 덕에 양질의 요리들이 매일 쏟아져 나왔다. 그 이득은 사용인들이 톡톡히 보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다. 앤시아는 이번엔 뒤쪽에 서 있는 수습기사들을 바라봤다.
“저기, 기사단을 내 멋대로 배치를 한 적도 있고.”
“영지민들이 저희를 두려워하기보다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님의 선견지명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마님께서 과일을 선호하신 덕에 영지에도 과일 상점이 새로 열렸어요.”
“맨날 칙칙하던 드레스숍이 어린이용 드레스로 화사해졌다고 해요.”
사과하려고 만든 자리가 어느새 칭찬 릴레이처럼 변해 버렸다.
점점 얼굴이 붉어지는 앤시아에게 하녀 한 명이 양손을 모은 채 다가왔다. 맹세컨대 악행을 저지를 때 한 번도 보지 못한 하녀였다.
“마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고 싶어요.”
앤시아와는 조금의 접점도 없어 보이는 하녀가 감동으로 가득 찬 눈을 하고 있었다.
왜 뭔데 왜 그런 표정인데.
뒤로 물러설 수도 없어 쳐다만 보고 있자 아니나 다를까 호의 가득한 목소리가 하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어린아이들을 마님께서 보살펴 주셨다는 걸 알아요.”
“아닌데? 난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
조금만 무리해도 쓰러지는 몸이었기에 당당하게 굴 수 있었다.
곧바로 반박했지만 끄덕이는 몇몇 사용인의 반응이 이어졌다.
“부모님은 추수하시느라 바쁘시고, 저도 밤늦게나 퇴근하다 보니 막냇동생 꼴이 말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새옷을 입고 깨끗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물어보니 백금발의 공주님이 장난감도 사 주시고 맛있는 음식도 주신다지 뭐예요.”
“아, 그건 전담 하녀들이 한 거야. 난 그냥 지켜보기만 했어.”
전담 하녀가 공작 부인의 허락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용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담아 두었던 고마움을 털어놓았다.
“저희 집도 할머니께서 산에서 넘어지셨는데 기사단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평소라면 경비가 없을 시간이었는데 주인마님께서 기사단을 풀어 경계를 서게 하셨다는 걸 들었습니다.”
“저희 애들도 마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인제 와서야 감사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님.”
“아니, 아니라니까. 내가 감사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고, 기사단도 내 멋대로 배치한 건데.”
‘악녀 짓 하려고……..’ 어설픈 변명이 이어지자 여기저기서 광대가 불룩해질 만큼 흐뭇한 미소를 짓는 이들이 속출했다.
반성회를 시작했는데 어째서 칭찬만 이어지는 걸까.
점점 붉어지던 뺨에 이어 귀와 목까지 발갛게 달아오르자 지켜보는 사용인의 눈빛이 더욱 푸근해졌다.
마님 너무 귀여우셔.
사랑스러우신 분이야.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어허, 감히 누구에게 망언을 하는 거냐? 등등 들려오는 작은 소곤거림조차 앤시아를 향한 호의가 선명했다.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에 앤시아는 얼굴이 붉어진 채 가장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내가 사과를 한 건, 앞으로 더 힘들어지는 게 고의가 아니란 걸 알려 주고 싶어서야. 정말 많이 바빠질 거니까 다들 각오해야 해.”
일종의 약 주고 병 주기. 이 보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눈 가리고 아웅.
정작 사용인들의 따뜻한 시선을 보니 다 쓸데없는 짓이었구나 싶었다.
“할 말은 다 했어. 다들 돌아가기 전에 가벼운 설문 조사만 참여해 줬으면 해.”
오늘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간의 악녀 짓을 사과하는 것. 다른 하나는 마수 사냥축제에 대한 반응과 의견을 모으는 일이었다.
이왕 사람을 모이게 했으니 설문을 해 두면 도움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