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74화.
예, 아니요 수준의 단답형인 데다 거수를 통해 숫자를 파악하는 정도라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담 하녀 세 사람이 합심한 덕에 설문 조사는 빠르게 끝났다.
여전히 얼굴에서 열기가 빠지지 않은 앤시아는 한숨처럼 작게 다 짐했다.
“앞으론 일부러 못된 짓은 안할 거야.”
“마님, 지금까지 하신 일도 못된 짓이라고 부를 만한 건 없으셨습니다.”
“여기서 더 착해지시면 날개가 생길지도 몰라요.”
제발 그만,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 지경이었다.
비앙카는 언제 가져온 것인지 시원한 물병을 앤시아의 뺨에 대주며 살짝 볼멘소리를 냈다.
“다들 마님을 좋아해요. 그래도 마님이 제일 좋아하는 하녀는 제가 맞죠?”
“아니, 제일은 나야. 너보다 내가 먼저 마님의 전담 하녀였으니까.”
비앙카와 엘리가 아옹다옹거리는 동안 줄리는 연신 손수건으로 미약한 부채질을 이어 갔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싶으면서도 마음이 다급했다.
축제 준비를 하려면 당장 오늘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구체적인 건 회의를 통해 결정 되겠지만, 자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
축제 제안이 통과된 후 곧바로 바빠질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시녀장 로사까지 고분고분하게 지시에 따를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다.
이른 아침 앤시아의 방을 방문한 로사는 전에 없이 공손한 태도로 머리를 숙여 왔다.
“마님께서 영지를 위해 축제를 제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공작가를 지켜온 한 사람으로서 보탬이 되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축제 본부로 사용하기 적절한 건물을 알려 주었다.
중앙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사방이 훤히 트여 있어 두루두루 유용한 건물이라는 설명을 마친 후, 앤시아가 반응이 없자 말을 보탰다.
“마수 토벌과 축제 준비를 동시에 하느라 주인님은 물론 모두가 정신없이 바쁠 때입니다. 공작가를 지키고 있는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해야 하지 않을까요?”
로사의 진중한 발언에 앤시아는 상당히 놀랐다.
앤시아를 향한 악의보다 공작가와 영지를 아끼는 마음이 더 큰 것일까? 저 정도로 영지에 진심이라면 절반쯤은 믿어 봐도 될 것 같았다.
앤시아가 망설이자 로사는 쐐기를 박았다.
“오늘 중에 들러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좋은 매물이라 늦으면 다른 사람이 차지할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 하나. 지금 아니면 다시는 구할 수 없는 절호의 찬스.
쇼호스트의 강력한 외침과 맞먹는 정확한 한 방에 앤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마을에 가 볼 생각이었어. 로사가 추천해 준 건물이니 기대가 돼. 알려 줘서 고마워.”
“비상사태이니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야지요.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진심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절대로 호의일 리가 없었다. 로사의 악의가 손바닥 뒤집히듯 선의로 바뀔 리가.
엘리의 뒤에 숨어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비앙카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로사였다. 그 태연함을 눈으로 직접 보니 더더욱 그녀의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무슨 의도로 건물을 소개해 준 걸까.
매매 계약이라면 이것저것 신중히 따져 보겠지만, 일시적으로 대여하는 것뿐인 건물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일단 건물을 보면 뭐라도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어 앤시아는 겸사겸사 외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줄리, 외출 준비를 해 줄래?”
“마님께서 확인하신다던 설문지는 안 보시고요?”
“아. 맞다.”
지난밤 집으로 돌아갔던 사용인들 대부분이 이웃 주민과 가까운 가게에 들러 축제 관련 설문지를 돌리고 오전에 받아 왔다. 오늘부터 사람을 쓸 생각이긴 했지만, 이왕이면 가까운 사람들이 해야 더 솔직한 의견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껏 받아 온 설문이니 일이 진행되기 전 확인해 두어야 했다.
“오전에 그걸 보고 오후에 나갔다 와야겠어.”
“그럼 약부터 드세요.”
오전 내내 추가로 모은 정보를 정리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다 돼갔다. 혹시 리샤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던 차에 정말로 그가 방문했다.
“부인. 오늘 내게 시간을 내어 주지 않겠소.”
“앗, 공작님.”
한창 바쁠 텐데도 리샤르는 잘차려입고 앤시아를 찾아왔다.
리샤르의 방문에 화색을 띤 앤시아는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항상 자신을 피하거나 어색하게 물러섰던 이전과는 상반된 모습에 리샤르는 가슴 안쪽부터 푸근해짐을 느꼈다.
“부인이 바쁘지 않다면.”
“네, 저 시간 있어요. 그런데…….”
앤시아의 시선이 리샤르를 이리 저리 살피더니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혹시 데이트 신청하러 오신 건가요?”
잠깐이었지만, 리샤르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에 앤시아는 조금 놀랐다.
장난으로 한 말에 리샤르가 당황하자 앤시아는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함께 외출조차 한 적이 없군. 미안하오.”
“앗, 아니에요. 그냥 농담한 거예요.”
“아니. 부인이 항상 참고 양보한다는 걸 알면서도 챙기지 못한 내 실수요.”
능글맞게 굴 때는 언제고 또 이렇게 진지해졌다.
앤시아는 자신을 향해 진심을 보이는 리샤르가 좋았다.
절로 발그레해진 앤시아의 뺨에 리샤르의 손끝이 가볍게 스쳤다.
“오늘은 축제 준비를 위한 건물을 확인하러 갈 예정이오. 부인의 의견을 얻고자 함께 외출하면 어떨까 하여 들러 봤소.”
앤시아는 안 그래도 봐야 할 건물이 있기에 기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네, 좋아요. 바로 준비할게요.”
“여인의 준비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건 알고 있으니 천천히 하길. 끝나면 집무실로 사람을 보내 주시오.”
“그럴게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준비할게요.”
리샤르가 방을 나가자마자 앤시아는 물론 하녀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30분 내로 최대한 준비해 줘.”
“움직이시기 편하면서 사랑스러운 느낌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살갖이 살짝 드러나는 편이 마차 안에서 분위기 잡기 좋지 않을까요?”
“꺄~ 마님, 너무 로맨틱해요!”
하녀들의 설레발 속에 앤시아역시 살짝 볼을 붉힌 채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유능한 하녀들 덕에 30분도 되지 않아 꾸밈을 마칠 수 있었다.
사랑스러우면서도 귀족적인 품위를 잃지 않는 절묘한 차림새는 몇 시간 공들인 것 못지 않았다.
화장은 비교적 가볍게 했지만 앤시아의 녹안과 백금발을 돋보일 수 있게 하는 색을 놓치지 않았다. 장신구와도 잘 어우러졌다.
오죽하면 앤시아가 거울을 보고 엄지 척을 할 정도였다.
리샤르 역시 앤시아를 데리러 왔다가 잠시 말을 잃고 쳐다볼만큼 그녀의 사랑스러움이 배가 되었다.
마차로 향하는 내내 리샤르에게서 어떤 찬사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이 앤시아에게 고정되어 있어 뒤를 쫓는 하녀는 물론 당사자마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대기하고 있던 마차까지 성실히 에스코트한 리샤르는 앤시아가 좌석에 앉자 문을 닫지 못 하고 망설였다.
“공작님?”
혹시 마차에는 안 타는 건가.
어쩌면 리샤르는 말을 타고 가는 걸지도 모른다. 뒤에 보이는 흑마를 보니 역시나 마차를 타는 건 앤시아 혼자인가 보다.
묘하게 아쉬운 기분도 들었지만, 앤시아는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리샤르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언제나의 사랑스러움에 진심까지 담긴 앤시아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그 탓일까. 리샤르는 예정과 달리 마차에 올라탔다.
“공작…….”
놀란 앤시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뜨거운 숨결이 덮쳐 왔다. 앤시아는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마차의 벽을 붙잡고 얼굴만 기울인 채 입술을 겹친 리샤르는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다가온 것과 다르게 조심스러웠다.
의아해져 눈을 뜨자 리샤르의 진중한 얼굴이 보였다.
“부인의 입술 색이 지워질 것 같군.”
“아…….”
“아니면 조금 지워져도 괜찮나.”
한마디 할 때마다 앤시아에게 허락을 구하듯 입술이 맞닿고 떨어졌다.
“부인은 화장하지 않아도 아름다워.”
이 말을 마지막으로 마차 문이 닫히며 리샤르의 품 안에 갇혔다.
마차 밖에서 대기 중이던 줄리와 엘리는 소소하게 챙겨 둔 메이크업 수정 도구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를 붙잡고 서 있던 하인이 안절부절못하자 호위 기사가 다가와 말에 대신 올라탔다.
“천천히 출발하겠습니다.”
마차 안에서 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충실한 기사는 마부에게 지시를 내리고 천천히 출발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리샤르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입술을 내주던 앤시아가 정신을 차렸다.
“공작님, 다들 보고 있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나?”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의아해 하는 리샤르의 입술에 분홍빛이 섞인 립이 묻어 있어 앤시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앤시아의 손끝이 입술을 살살 닦으려 하자리샤르는 그 손을 붙잡고 가볍게 입 맞췄다.
“다시 묻힐 텐데 손만 더럽히게 돼.”
“공작님.”
“부인. 이름을 불러 주지 않겠나?”
위험한 동굴 곰 보이스가 귓가에서 속살거리자 앤시아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리샤르의 품 안이었기에 넘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안 그래도 새빨개진 얼굴이 불타오를 것처럼 열이 올랐다.
“공작님, 저, 저기.”
반년을 기다려 달라고 한 이유는 원작의 흐름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원작과 달라진데다 앤시아의 마음 역시 리샤르에게 어느 정도 열려 있었다.
찰싹 달라붙어 퍼부어지는 키스를 받고 있다 보니, 어느 정도가 아니라 아예 활짝 열린 듯했다.
그러나 첫날밤 단 한 번 목격했던 리샤르의 나신이 워낙 충격적이었던지라 앤시아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마구 울렸다. 원작 앤시아를 향해 저도 모르게 존경심이 일어날 만큼 확실했던 그의 존재감을 떠올렸다.
일단 미룰 수 있는 건 미루는 게 맞다.
“저, 첫날밤에 저와 약속하신 거.”
“기억하고 있소. 반년. 겨울이 지나가길 이토록 간절히 바란 적이 있었나 모르겠군.”
‘으아아. 이 남자 은근 집요하잖아.”
마수 퇴치 외에 아무것도 관심 없던 리샤르의 변모에 앤시아는 그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리샤르의 다정한 스킨십에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어느새 중앙광장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하녀들과 올 때는 상당히 멀었던 것 같은데 리샤르와 함께 오니 무척 짧게 느껴졌다.
“하녀를 들여보내지.”
“아, 네.”
리샤르가 마차에서 내리자 줄리와 엘리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두 사람의 손에는 메이크업 도구가 들려 있어 앤시아는 어색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의 예상과 달리 앤시아는 입술 외에 딱히 지워진 곳이 없었다.
입술에 립을 덧바르는 동안 앤시아는 붉어진 얼굴을 감출 길이 없어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하녀들이 뒷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리고 난 후에야 앤시아는 민망함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뗐다.
마차 앞에서 기다리던 리샤르가 자연스럽게 내민 손을 붙잡자 간신히 식힌 뺨이 다시 붉어졌다.
그와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내딛는 발끝까지 신경 쓰였다.
마음을 깨닫고 인정하기 시작하자 리샤르와 있는 시간이 온통 핑크빛으로 가득했다.
‘기다려 달라고 해 놓고 내가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일 때문에 나온 걸 텐데 리샤르와 붙어 있느라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이야기를 듣고자 먼저 말을 꺼냈다.
“공작님, 축제 준비를 위한 건물을 보신다고 하셨는데 제가 뭘 봐 드리면 될까요?”
“무엇이든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말해 주시오. 부단장이나 보좌관이 보기엔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다양한 이의 의견이 필요하지.”
“그렇군요.”
‘꼬투리를 잡으라는 거네. 악녀가 하기에 딱 좋은 일이라는 거잖아.’
아차. 이제 굳이 악녀가 될 필요가 없는데도 자연스레 나와 버린 생각이었다.
살짝 고개를 흔들고 정신을 집중하려 앞을 본 앤시아는 번잡하지 않은 중앙광장에 얼마 안 되는 시선들이 전부 제게 향한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아, 그렇지. 공작부부가 함께 외출했으니 시선이 모이는 게 당연해.’
앤시아는 좀 더 자세를 바르게 하고 표정에 신경 썼다.
웃음을 장착하고 나긋나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앤시아에 비해, 그 곁에 느낌상 두 배는 더 큰 체구의 리샤르는 움직이는 얼음동상처럼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드레스숍 앞에는 감동한 눈빛으로 금방이라도 뛰어오고 싶어 하는 이브와 그녀를 막아서는 충실한 하녀가 보였다.
그 모습은 긴장했던 앤시아에게 자연스러운 웃음을 불러일으켰다.
꽃의 요정이 머물고 간 것 같은 해사한 웃음에 두 사람에게 나뉘었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앤시아는 일부러 못되게 굴지 않아도 되기에 백작가에 있을 때처럼 티 없이 밝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축제의 예비 참여자이자 소비자 였다.
축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이들의 협조가 필요하기에 앤시아는 될 수 있는 한 좋은 감정을 심어 주려 했다.
그런 앤시아를 심각한 얼굴로 지켜보는 리샤르는 당장 부인을 마차에 태워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고 싶은 욕구를 눌러 참느라 점점 더 서늘한 기운을 뿜어 댔다.
싸늘하다. 등 뒤가 묘하게 차갑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샤르가 얼마나 냉기를 풀풀 풍기고 있을지.
영지민들은 자신을 볼 때는 넋을 잃고 있다가, 시선이 조금 위로 향한 후에는 못 볼 걸 본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사라졌다.
자기 영지를 살피면서 왜 기분이 나빠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앤시아는 살며시 리샤르의 손을 쥐었다.
“공작님. 축제를 준비하려면 영지민들의 협조가 매우 매우 중요하지 않나요?”
“중요하지.”
“그럼 최소한 표정이라도 부드럽게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얼굴에 가면이라도 쓰라는 건가.”
“계속 사람들을 겁먹게 하시면 그럴 수도 있어요.”
생긋 웃으며 리샤르를 올려다보니 다소 황당해하면서도 옅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중앙광장에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넓은 골목을 양쪽으로 끼고 있는 삼 층짜리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치나 건물 형태가 오전에 로사가 말해 준 건물과 일치했다.
로사의 말대로 서둘렀다면 괜히 두 번이나 걸음 할 뻔했다.
“부인이 보기에는 어떤가?”
겉으로 보기에 깔끔하고 축제기간 다용도로 사용하기에 규모가 적당했다.
눈으로 묻자 리샤르는 태연하게 답했다.
“대가로 축제 수익 1%를 주기로 했으니…… 부인?”
“네?”
“왜 입술을 내밀지?”
성공 여부도 알 수 없는 축제의 수익금을 대가로 건물을 빌렸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였나 보다. 민망함에 살짝 입술을 말아 물었더니 리샤르가 거리를 좁혀 왔다.
“여기서 키스라도 해 달라는 건가?”
리샤르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앤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제, 제가 언제요? 그런 적 없거든요. 그보다 공작님 대체 얼마나 더 하시려고!”
마차에서 한 거로 충분하지 않냐는 핀잔을 주려다 주변이 적막해짐을 느낀 앤시아는 빠르게 말을 삼켰다.
공작부부의 외출을 따라나선 호위와 사용인들은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무표정으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중 비앙카만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쪽을 훔쳐보다가 엘리에게 꼬집히고 나서야 고개를 숙였다.
아, 망했다. 나름대로 공작부부의 첫 외출이니 품위 있는 척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다 틀려 버렸다.
시무룩해진 앤시아가 건물 안으로 느릿하게 들어서자 리샤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토라진 얼굴 하지 마, 부인. 키스하고 싶어지니까.”
“공작님!”
당황한 앤시아의 부름에 리샤르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보지 못한 사이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돌아가 버린 게 아쉬울 만큼 훈훈한 광경이었다.
리샤르는 앤시아와 함께 한 외출이 너무도 즐거워 마음을 다잡
“공작님, 건물에 집중하세요. 그래야 집에 돌아가 쉴 수 있죠.”
“그렇군.”
부인은 현명했다. 이런 곳에서 앤시아에게 닿으려고 애쓰기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 마음 편히 안을 수 있었다. 하다못해 돌아가는 마차 안이라도 괜찮았다.
그러려면 이곳에서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리샤르는 곧장 현장에 집중했다.
이미 보고서를 통해 건물에 대한 정보는 빠짐없이 파악한 후였다. 앤시아를 데리고 나온 건 그녀가 이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몸소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어서였다.
아내가 리샤르 자신의 명예를 위해 뒤에 숨어 공을 낮추는 일은 원치 않았다.
“외부와 비교하면 내부는 좀 낡았네요. 그렇다고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요.”
“아무래도 중앙광장에서도 보이는 건물이다 보니 외관에 더 신경을 썼습니다.”
일찍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던 건물 주인이 직접 앤시아의 질문에 답을 해 주었다.
앤시아는 몇 군데 벽을 틀 수 있는지와 출입 가능한 문의 개수, 위층의 객실 사용 여부를 따져가며 점점 더 이 건물이 최적임을 확신했다.
앤시아가 적극적으로 건물 주인과 안을 살피기 시작하자 리샤르는 살짝 뒤로 물러나 주었다.
복도가 다소 좁은 편이기도 하고 집중하는 앤시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가까이 있으면 자꾸 손을 잡거나 어깨를 끌어안으려 드는 제 손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호위가 적절히 앤시아의 뒤를 따르는 걸 보며 따라온 보좌관이 내미는 보고서를 짬짬이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