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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75화 (75/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76화.

“복도와 방은 좁지만 깔끔하네요.”

벽은 낡았어도 침대나 소파는 제법 쓸 만했다. 관리가 잘되고 있는데도 손님 하나 없는 게 의아했다.

“위치를 생각하면 좀 더 고급화전략을 쓰는 편이 낫지 않나요?”

주인도 귀족이었으니 귀족을 상대로 하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에 건물 주인이 도리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외지에서 방문한 귀족분들은 공작 저에 머무실 테고, 돈 많은 상인은 주로 창고와 상가가 모인 서문이나 동문 쪽 숙소를 이용합니다. 그쪽은 중앙보다 세가 더 저렴하기도 하고요.”

‘그걸 알면서 왜 여기에서 숙박업을 하는 건데?’ 앤시아의 의문 가득한 눈빛에 주인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마수가 늘어나기 전까지는 중앙광장도 북적였습니다. 그때는 저희 숙소도 빈방을 찾기 어려울만큼 호황을 누렸지요.”

그윈티드 영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 보니 실언을 해 버렸다. 앤시아는 빠르게 실수를 인정했다.

“그런 거였군요. 제가 영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실언했네요.”

“아닙니다. 마음 써 주신 것만도 감사드립니다.”

“음, 그럼 평소에는 어떤 분들이 이용하시나요?”

“예전에는 수습 기사에 지원하는 분들이나, 그분들을 만나러 온 가족들이 숙박하기도 했지만, 공작가의 손님이나 다름없으니 저택에 머물도록 배려하셔서…….”

“아, 네. 죄송해요.”

자꾸 지뢰를 밟는 질문에 앤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이 좋은 건물을 두고도 제대로 써먹지 못했던 게 아쉬웠다. 이번에 축제 관련 업무를 보고 나서도 겸사겸사 비슷한 용도로 쓸 수 없을까? 동사무소나 민원실 처럼 사람들이 오갈 수 있고 믿고 쉴 수 있는 공간 같은 거.

“부인.”

“앗, 네.”

“그대가 존대해야 하는 이는 이 영지에 없소.”

리샤르는 앤시아의 편을 들어주었으나 정작 본인이 존댓말을 쓰고 있는 건 인식하지 못한 듯 보였다.

“아. 익숙하지 않아서요.”

“이런 건 전담 시녀가 알려 줘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어째서 하녀만 데리고 다니는 건가.”

그거야 시녀장이 내어 주지 않으니까 그렇지.

그동안은 대외적으로 하는 모든 행동이 악행이 되길 원했기에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공작 부인답지 않은 말투는 얕잡아 보일 수 있는 것과 동시에 흠이 되기에 충분했으므로,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앤시아도 나름 고집이 있었다.

어차피 잘해 봤자 본전이었다.

그럼 굳이 도움도 안 될 이들과 친해지거나 관계를 개선할 생각은 없었다.

이 연약한 몸으로 굳이 스트레스를 늘려 가며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리샤르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그윈티드 공작가는 논외의 대상이었다. 대귀족이라고 해도 황제의 견제를 받고 있으며 가장 추운 북부에 처박혀 마수만 때려잡는 공작의 세력은 그가 가진 기사단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일정 숫자를 넘기면 반란으로 오해 받을 수 있어 아슬아슬하게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입원을 가졌음에도 황궁에서 요구하는 수량을 맞추기에 급급했고, 외부로 판매하는 것 역시 제한적이었다.

팔다리에 돌덩이라도 달고 사는 것처럼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닐 텐데도 묵묵히 북부를 지켜온 리샤르가 안쓰러워 애잔한 눈빛을 보냈다.

“부인 눈이…….”

“네?”

앤시아의 답을 기다리던 리샤르는 그 시선에 홀리듯 고개를 기울였다. 호위가 눈치껏 하녀들의 시선을 막았고 곧 리샤르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리 촉촉한 눈으로 바라보니 참을 수가 없어서.”

“읏, 떨어지세요. 이런 식이면 건물 하나 보는 데 한참 걸리겠어요.”

“그러지.”

기회만 되면 다가오는 리샤르의 행동은 곤란했지만 싫지 않았다.

앤시아는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도 휩쓸릴 게 뻔했기에 빠르게 앞서 걸었다.

“복도 끝에 난 큰 창문이 저희의 자랑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주인의 안내로 복도 끝에 다다랐다. 좁은 복도를 지나와 커다란 창문 앞에 서자 탁 트인 공간이 보였다. 창문 밖으로는 긴 도로 가 나 있어 오가는 마차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여기 명당이네요.”

“예, 맞습니다. 위층은 불꽃놀이를 할 때도 명당으로 꼽는 자리로 그 시기엔 손님이 넘쳐납니다.”

“그렇겠어요. 정말 좋은 위치네요. 자리만 봐도 기대될 정도예요.”

“부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러시면 이번 축제에서도 불꽃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갑작스러운 청탁이었으나 리샤르에게 물어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기서 보게 될 불꽃놀이가 앤시아조차 무척 기대가 될 만큼 위치가 좋았다.

“확답은 못 해 드리지만, 의견은 내볼게요.”

“감사합니다, 부인. 그럼 부인께 샘플 몇 가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가져가셔서 테스트해 보셔도 괜찮습니다. 마침 오늘 들른 상인에게 새로운 샘플이 있다고 해서 받아 두었거든요.”

불꽃놀이 샘플이라. 전담 하녀들과 함께 테스트해 보면 재밌겠다고 생각하며 주인의 뒤를 따랐다.

창문을 등지고 돌아서자 처음 들어왔던 복도 입구 쪽에 리샤르와 보좌관이 서 있었다. 그 뒤로 엘리, 줄리, 그리고 비앙카 세 사람이 가로막혀 지나오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건물 주인과 걸으며 대화하는 내내 등 뒤가 허전하다 했더니 저러고 있었을 줄이야.

보좌관이 곤란한 듯 힐끗거리는데도 모른 척 보고서를 펼쳐 보는 리샤르는 비앙카에게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혐오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앤시아의 고백에 리샤르의 마음이 많이 좋아진 듯 보였다. 비앙카도 리샤르를 보면 겁을 먹기는 했지만, 리샤르가 아예 시선도 안 주고 무시하자 덜 무서워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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