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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77화 (77/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77화.

앤시아는 눈앞이 핑 도는 걸 느끼고 비틀거렸다.

“마님, 괜찮으신가요?”

“아, 네. 괜찮…….”

이건 괜찮지 않았다.

앤시아는 자신의 허약한 몸을 아주 잘 알았다.

이런 식이라면 금방 의식이 날아가 버릴 것이다. 필사적으로 호위의 어깨에 팔을 두르려는 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안 되는데. 이러다 리샤르가 제 모습을 본다면.

“부인.”

이거 봐. 저 위험한 길을 건너와 버렸잖아.

어느새 호위가 아닌 리샤르에게 안긴 앤시아는 그를 원망 섞인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왜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지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뻤다.

‘뭐냐고 대체. 이 모순적인 감정은.’

언제 또 폭발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리샤르의 품에 안기자 안심이 됐다.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자 리샤르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부인!”

“좀…… 놀라서…….”

아직 의식을 잃지는 않았으나 몸에 힘이 없었다.

리샤르는 앤시아를 가볍게 안아든 채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이미 바깥은 폭음을 듣고 거리로 나온 사람들로 웅성거렸다.

“경비대는 영지민들의 접근을 막아라! 기사들은 내부의 폭발물을 찾아 신속히 안전을 확보하라!”

“예, 각하!”

혹시 모를 추가 폭발을 대비해 리샤르는 주변 사람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조치하고 곧장 마차로 향했다. 계단을 통해 내려온 하녀들 역시 앤시아를 걱정하며 뒤를 쫓았다.

“부인, 힘들면 눈을 감고 있어도 돼.”

지나친 긴장과 감정 소모로 인해 몸이 제멋대로 무너져 내린 것과 달리 앤시아의 의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눈앞이 핑 돌만큼 어지럽기는 했으나 리샤르의 단단한 품이 안정감을 주었다.

리샤르는 제 품에 안긴 앤시아의 호흡이 안정적으로 변한 걸 확인한 후에야 초조함이 가라앉았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하녀들에 비해 앤시아는 호위가 완전히 감싸 안은 덕에 크게 더러워지지 않았다. 리샤르는 비앙카와 다른 하녀들 앞을 막아서느라 먼지투성이였다.

자신의 몸에 묻은 먼지가 앤시아에게 닿는 건 탐탁지 않았으나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마차에 도착해 앤시아를 조심스럽게 앉힌 후에야 리샤르는 안심할 수 있었다.

“부인은 하녀와 호위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시오.”

“아직 살펴봐야 할 일이 많은데…….”

“오늘은 돌아가서 쉬도록 해.”

앤시아를 꽉 끌어안은 리샤르는 전에 없이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굴었다.

그러면서도 앤시아의 뺨에 묻은 약간의 먼지를 닦아 주는 손길은 무척 다정했다. 리샤르의 손등에 상처를 발견한 앤시아가 손을 떨자, 그마저도 다른 손으로 살짝 잡아 주었다.

리샤르의 다정함에 앤시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폭발이 일어난 건물로 리샤르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상황을 누구보다 앞서 조사해야 할 사람이 리샤르였기에 말릴 수도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은 마음에 리샤르의 손을 놓지 못했다. 리샤르는 그런 앤시아가 사랑스럽다는 듯 손등에 입 맞추며 천천히 손을 떼게 했다.

“그대가 다치지 않아서 얼마나 안심하고 있는지 알아줬으면 해.

부디 내가 돌아갈 때까지 편히 쉬고 있었으면 좋겠군.”

리샤르의 진심에 앤시아는 억지로라도 웃어 보였다.

“빨리 오세요. 집에서 기다릴게요.”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말이었다.

별거 아닌 기다린다는 말이 리샤르의 마음속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반드시 그녀에게 돌아가야겠다는 맹세를 하고 싶을 만큼 간절한 마음이 생겨났다. 차마 그 거대한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었다.

“그러지.”

당장 할 수 있는 건 가벼운 대답뿐.

앤시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춘 후 리샤르는 곧장 뒤돌아섰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리샤르를 보며 앤시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리샤르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돼서야 앤시아는 긴장을 풀고 마차 좌석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엘리와 줄리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앤시아를 챙기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부디 아무 일 없이 리샤르가 돌아오길 바라며 앤시아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눈을 떴을 땐 푹신한 이불 속이었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약초 냄새에 의식이 없는 자신에게 약을 먹이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싶었다.

“마님, 일어나셨어요? 놀라셨을 때 드시면 좋은 약초를 우린 차예요.”

비앙카가 앤시아의 몸을 일으켜 찻물을 삼키도록 도왔다.

차라고 표현했으나 이건 약이었다.

쓴 약초 물로 마른 입 안을 적시려니 고역이었다.

가까이서 본 비앙카는 눈가가 짓무를 정도로 운 것 같았다. 뒤에 서 있는 두 하녀 역시 밤이 깊었는데도 곁을 지킨 걸 보면 잠도 못 자고 걱정했나 보다.

“다들 고마워.”

“마님께서 몸이 약하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기절까지 하실 줄은 몰랐어요. 한참이나 일어나지 않으셔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이불에 매달려 울먹이는 비앙카를 다독이며 방 안을 둘러보던 앤시아는 하녀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구나. 음…… 혹시 공작님은 아직 안 오신 거니?”

“아뇨. 조금 전에 들렀다 가셨어요. 마님께서 깨어나시면 알려 달라고 하셨어요.”

“아, 그래? 어디 다치시거나 한건 아니지?”

“네. 주인님께선 건강하세요.”

“그래. 다행이야.”

안도하는 앤시아의 웃음이 하도 예뻐서 줄리와 엘리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비앙카만이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전 공작님이 별로예요.”

이건 하녀들끼리 모였을 때 뒷말로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공작 부인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다른 하녀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웃다 굳은 얼굴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수도 막 단칼에 썰어 버리시는 능력자라고 하고선, 위기 상황에서는 마님을 보호하지 못했잖아요.”

아무리 리샤르가 대단해도 십미터나 떨어진 복도를 한 번에 날아올 수는 없었다.

비앙카는 또다시 눈물이 고여서는, 앤시아의 뺨과 손등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살짝 따끔거린다 했더니 상처가 생긴 모양이었다.

“이 하얀 피부에 상처가 생기다니. 아프지 않으세요?”

비앙카의 걱정에 앤시아는 짙은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은 비앙카를 걱정하기도 했지만, 질투도 했다. 그런 자신과 달리 비앙카는 자신을 보호해 준 리샤르에게 불만을 드러낼 정도로 앤시아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비앙카의 순수함에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고마워, 비앙카. 하지만 정말 괜찮아. 곁에 있던 가일 경이 보호해 줘서 거의 다치지 않았는 걸. 아, 맞다. 가일 경은? 날 보호하느라 다쳤을 텐데.”

“부서진 돌에 맞아서 멍이 든 것 빼고는 괜찮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혹시 몰라 일찍 교대해서 쉬러 갔어요.”

“그래? 다행이다. 그래도 휴가라도 주고 싶은데.”

“집 사장님께 전달하겠습니다.”

“응, 고마워.”

폭발의 피해는 얼마나 컸을까?

아마도 리샤르가 철저하게 조사를 하고 있을 테고, 따로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폭발에 대한 건 어차피 하녀들과 나눌 대화가 아니었다.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앤시아는 물론이고 하녀들마저 해야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서로 눈치만 봤다.

앤시아는 폭발하던 순간 자신도 몰랐던 질투심을 깨달은 게 부끄러워서였다. 비앙카에게 미안하면서도 사과하자니 이유를 설명하기 난감했다.

살짝 발그레해진 뺨이나 망설이며 눈을 깜박이는 앤시아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비앙카는 두 손을 들고 침대 옆에 무릎꿇었다.

“저 벌 받을게요.”

“응?”

“마님, 너무 예뻐요. 귀여우세요. 사랑스러워요. 한 번만 꽉 끌어안아도 될까요?”

“안 돼.”

대답은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엘리에게서 튀어나왔다.

앤시아는 포옹쯤이야 못할 것도 없었지만, 지나치게 반짝이는 비앙카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망설여졌다. 풀 죽은 비앙카가 느릿하게 일어서는 걸 보고 차라리 이걸로 사과를 대신하자 싶어 양팔을 살짝 벌려 보였다.

“좋아. 비앙카에게는 미안한 일도 있으니까.”

“와! 감사합니다!”

덥석 끌어안는 비앙카의 악력이 얼마나 강한지 앤시아는 숨이 턱막혔다. 줄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엘리는 질투심이 담긴 듯한 눈으로 비앙카를 주시했다.

“마님, 너무 부드럽고 작고 향기도 좋고.”

“응, 고마워. 나도 이제 미안한 마음이 가셨어.”

비앙카가 이렇게 주접 캐릭터인 줄 꿈에도 몰랐다. 그 덕에 비앙카가 한결 더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몸도 약하신 마님께 부담 드리지 마.”

“아, 알았어. 감사해요, 마님.”

비앙카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엘리에게 붙잡혀 떨어졌다.

마음속 짐도 덜었겠다 앤시아는 한시라도 빨리 리샤르가 보고 싶어졌다.

“공작님께 가 봐야겠어.”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목욕부터 하시겠어요?”

“목욕은 아침에도 하셨잖아요.

밤인데 왜 또 해요? 그리고 여기가 침실인데 왜 다른 침실로 가시는 거예요?”

이상하리만치 앤시아에게 충성심을 보이는 비앙카에게서 질문이 쏟아졌다.

공작 부인의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비앙카로 인해 줄리에게서 사과의 말이 이어졌다.

“마님, 비앙카에 대한 교육은 최대한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완전히 지워 내진 못했습니다.

몸을 씻으시는 게 어떨까요?”

정중한 줄리의 제안에 앤시아가 망설이자 엘리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희가 빠르게 도와드릴게요.

30분이면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며 드릴 수 있어요.”

예전이었으면 리샤르를 보러 가는데 치장은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앤시아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당황한 리샤르나 기사들의 반응을 보아 흔히 있는 일은 아닌 듯 보였다.

사람을 노린 걸까? 건물을 노린건 아닐까? 건물 일부가 망가질 정도였으니 폭탄이라도 터트린 걸까?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어지는 의문 속에 가장 의심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 수상한 건 아침 일찍부터 앤시아를 찾아와 건물을 소개해 준 로사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로사가 소개한 건물에서 폭탄이 터졌다면 누구라도 그녀를 의심할 터.

‘그런 얕은수를 썼다고?’

만약 앤시아가 혼자 건물에 방문했을 때 폭탄이 터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리샤르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어땠을까….

뜻밖에 심장이 잠잠했다. 오히려 안도감마저 들었다.

…나 되게 강심장인가 봐.”

“그럼요. 마님이 얼마나 대단하신데요.”

“공작님께 오지 말라고 소리치 실 때, 정말 멋지셨습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다.

앤시아는 새삼 그 순간 자신과 호위, 하녀들뿐이었다면 아까보다 덜 놀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샤르가 없는 편이 나았다.

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라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앤시아는 포근한 눈토끼숄을 여미며 집무실로 향했다.

요즘 리샤르가 저택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 탓에 수시로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두근거린 적은 없었다.

중요한 말을 전하기 위해 만나러 가는 길인데도 자꾸만 뺨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문 옆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평소 집무실 주변은 한산했기에 기사의 존재가 당황스러우면서도 지체 없이 문을 열어 주는 것에 안도했다.

안에는 앤시아의 걱정과 달리 리샤르와 집사장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리샤르는 앤시아가 들어서자 주저 없이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다가섰다.

앤시아가 힐끗 뒤에 서 있는 집 사장을 살펴보니 온화한 웃음을 보였다.

‘하긴, 내 몫도 따로 있다고 했으니까. 나중에 백작가에도 따로 보낼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친정 부모님 떠올리듯 백작 부부를 떠올리던 앤시아는 지금 이 럴 때가 아님을 깨닫고 리샤르에게 바싹 다가섰다.

“공작님, 단둘이 있고 싶어요.”

아무래도 공작가를 지켜 온 로사를 범인으로 취급하는 건 조심스러웠다.

집사장이 눈치껏 집무실을 나가며 문을 닫아 주자 리샤르는 앤시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부인, 침실에서 기다리지 못할만큼 내가 보고 싶었나.”

“아니, 공작님. 그게 아니고.”

“아닌가? 이런, 보고 싶은 건 나뿐이었나 보군.”

차갑게 빛나는 푸른 눈이 어째서 이럴 땐 유순하게 보이는 건지 앤시아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앤시아의 경계가 허물어진걸 알아챈 리샤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볍게 입을 맞춰 왔다.

뽀뽀하는 걸 이렇게나 좋아할 줄이야.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리샤르와의 키스가 기분좋아 거부하기 힘들었다. 이대로는 대화는커녕 숨쉬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입맞춤이 깊어지기 전 앤시아는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공, 작님. 낮에 폭탄 터진, 읍, 자, 잠깐 만요.”

“폭죽에 폭탄이 섞여 있었더군.”

“그랬어요? 그거 아무래도 범인, 으음.”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다급히 말을 이었지만, 리샤르는 몇 번이고 앤시아의 입술을 찾아 머금었다.

다정하면서도 집요한 키스에 앤시아는 잠시 백기를 들었다.

민망할 정도로 숨소리만 뒤섞이기를 수차례 이어 가는 동안 앤시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리샤르에게 매달리다시피 안겨 있어야 했다.

앤시아가 힘들어하는 걸 알아챈리샤르가 그녀를 안아 들며 부드럽게 입술을 닦아 주었다.

“시녀장은 일단 감옥에 구금 중이오.”

“벌써 알아내신 거예요?”

놀란 앤시아의 반응에 리샤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앤시아는 단장하느라 시간을 흘려보낸 것이 부끄러워졌다. 고개숙인 앤시아의 반응에 리샤르가 가볍게 턱을 쓰다듬어 들게 했다.

“왜 그러지?”

“저도 의심스러워서 알려 드리려고 온 건데… 괜히 치장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게 죄송해서요.”

“부인은 치장하지 않아도 아름답지만, 나를 위해 꾸민 것은 기쁘군.”

그래도 앤시아의 죄책감은 미약하게 남아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리샤르는 그런 앤시아를 달래 등을 쓰다듬으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숙소 주인은 오전에 공작 부인 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받았다고 하더군. 그 정보를 준 자에게서 공작 부인에게 불꽃놀이를 제안하면 틀림없이 비싼 값을 치를 거라고 해서 미리 준비해 두었다고 해.”

설마 그 폭음이 불꽃놀이용 화약으로 인한 것이었나?

“불꽃놀이가 그렇게 위험한가요?”

“그럴 리가. 폭죽 속에 폭탄을 섞어 두었더군.”

하긴. 벽이 무너질 만큼의 화력을 보이는 걸 불꽃놀이에 사용할 리 없었다.

“게다가 타이밍도 기가 막히지.

이른 새벽에 낯선 상인이 들러신작 불꽃이라며 샘플을 주고 갔다더군. 시연도 해 주고 공짜로 샘플을 쥐여 주니 주인은 거부할 리 없지. 그중 폭탄이 섞여 있는 걸 주인이 알아보지 못했다 해도 이해가 돼.”

“우연이 지나치네요.”

“그렇지. 아귀가 지나치게 잘 맞아. 그 상인이 시녀장의 먼 친척이라는 것도.”

리샤르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벌써 많은 걸 알아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새로 알게 된 사실에 앤시아는 감탄했다.

“도주의 우려가 있어 구속하러 갔을 때 시녀장은 태연히 업무를 하고 있더군.”

미묘한 리샤르의 표정에 앤시아는 이야기를 경청하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지금 우울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로사는 앤시아에겐 불편한 사람이지만 리샤르에겐 충직한 사용인이었다.

오랫동안 저택을 맡길 만큼 믿어 온 사람이었다. 그런 로사가 공작 부부가 방문한 건물에 폭탄을 터트렸다.

리샤르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뭐라고 위로해야 하나 망설이던 앤시아의 손을 리샤르가 조심스럽게 잡아 왔다.

“부인을 해치려 하다니.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 생각해 보면 이전에도 부인을 음해하는 편지를 보내왔는데 내 대처가 안일했소. 미안하오.”

“아뇨, 공작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그때 일은 안주인이 된 제게 맡겨 주신 거죠. 저도 로사가 절 안 좋아한다는 건 알았어요. 그렇다고 이런 큰일을 벌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걸요.”

비앙카에게 한 일도 그렇고 앤시아는 로사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정말 자신이 싫어서라는 이유 하나뿐일까?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 로사가 왜 그랬는지 들으셨나요?”

“감옥에 가둔 후로는 얼굴도 보지 못했소. 심문은 맡겼지만, 계속 나를 불러 달라며 울부짖고 있다더군. 나는 시녀장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얼굴을 보면 검을 뽑지 않을 자신이 없으니.”

리샤르의 통한에 앤시아는 그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굳어 있던 그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앤시아를 끌어당기는 손이 부드러웠다.

분노로 괴로워하던 리샤르가 안정을 찾자 앤시아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제가 로사를 만나 볼게요.”

“그건 안 돼.”

앤시아의 등을 끌어안고 있던 리샤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걱정이 온몸으로 느껴져 앤시아는 웃을 수 있었다.

“공작님. 혹시 로사는 암기를 다룰 줄 아나요?”

“아니. 그런 특기가 있었다면 다른 일을 맡겼겠지. 무엇보다 감옥에 가두기 전 철저히 검사했소.”

“아니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저주를 걸 수 있다거나?”

“그런 능력이 있다면 암살자로 고용하고 싶군.”

리샤르 자신도 말해 놓고 우스웠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용은 살벌했어도 분위기가 유해지자 앤시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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