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79화.
“감옥을 지키는 병사도 있을 것이고 호위도 데려갈 거예요. 아서 경이 바쁘지 않으면 동행해도 좋고요. 로사에게 꼭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요.”
“……나도 동행하겠소.”
“안 돼요.”
이제 입장이 바뀌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리샤르는 문밖에, 기사부단장과 호위 여럿을 대동하여 만나는 걸 허락했다.
“그럼 바로 로사를 보러 갈게요.”
“아니. 내일 가는 게 좋겠군.”
“시간은 얼마 안 걸릴 거예요.”
“부인이 알고 싶은 걸 손쉽게 얻으려면 상대를 초조하게 하는 편이 효과적이지. 차디찬 지하감옥에서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새운다면 첫 방문자가 무슨 말을 하는 웬만해선 거짓을 말하기 힘들 거요.”
“심문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질문은 내일부터. 오늘은 길을 들이고 있을 거요.”
자신은 물론 리샤르마저 다칠 뻔 했다. 그런데도 로사를 고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등골이 오싹했다.
팔을 매만지는 앤시아의 반응을 보며 그녀가 듣기에 좋지 않은
“일찍 일어나면 돼. 부인과 함께 잠들 기회를 놓칠 수야지.”
앤시아를 우선시하는 리샤르의 행동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앤시아의 뺨이 수줍은 듯 발그레 열이 오르자 리샤르의 마음도 급해졌다. 부부침실로 향하는 걸음이 무척이나 빨라졌다.
어서 이 사랑스러운 여인과 꼭 달라붙어 있고 싶어졌기에.
*
리샤르는 약속대로 아침이 되자 앤시아와 함께 지하 감옥을 찾았다.
“잠깐이라도 잠을 자는 게 나으실 텐데 고집이 어찌나 세신지.”
“토벌 중에 밤을 꼬박 새우고 이동하는 일도 잦으니 걱정 마시오.”
지난밤 두 사람은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리샤르는 앤시아가 잠들기 전까지 집요하게 달라붙다가 그녀가 잠들자마자 집무실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잠는 모습조차 사랑스러운 앤시아를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었으나 한시바삐 해결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다.
아침까지 마수 경계와 관련한 보고서를 확인하고 축제 안건을 조율했음에도 남은 일들이 즐비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리샤르는 기어코 앤시아를 따라 나섰다.
“이번에는 늦지 않겠소.”
폭파 사고 때는 앤시아와 떨어져 있어 리샤르가 직접 지키지 못 했다. 호위 기사가 앤시아를 보호했다고는 하나 그 일은 리샤르에게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혹여나 소란스러워 지더라도 이곳에서 기다려 주세요.”
“부디 너무 걱정시키지는 마.”
앤시아의 뜻대로 리샤르는 바깥에 남았고 여럿의 호위와 기사부 단장까지 동행해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구속된 여인 한 명을 만나는데 과한 인원이었으나 리샤르의 걱정이자 배려였기에 앤시아는 앞장서는 아서를 따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공작가 안에서 감옥에 갇힐 만큼 죄를 지은이가 없다 보니 제법 넓은 공간은 적막 뿐이었다.
그중 단 하나의 감옥만 네 명의 병사와 고문관이 지키고 있었다.
아서와 앤시아가 다가서자 마석으로 만든 조명이 밝아지며 감옥안이 훤히 드러났다.
지하 감옥은 눅눅하고 어두웠으나 내부는 뜻밖에 깨끗했다.
혹여나 로사가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질문은커녕 동정심만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앤시아의 염려와 달리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로사는 묶여 있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앤시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감옥 밖의 앤시아가 죄인이라는 듯 악의에 찬 눈빛이 이글거렸다.
‘공작 부부를 향해 폭탄까지 터트린 이를 이토록 유하게 대우한다고?’
앤시아가 아서를 돌아보자 질문도 하기 전에 즉각 답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오랜 기간 공작가를 위해 헌신해 온 시녀장이다 보니 모든 증거와 증인이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함부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감옥에 갇혀서도 공작가를 위해서였다며 태도가 하도 당당하여 증거와 증인을 추가로 확보 중입니다.”
변명처럼 느껴졌지만, 오랜 기간 시녀장을 알아왔던 아서의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는 듯 보였다.
“그럼 로사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오늘 공작 부인께서 방문하신다는 소식에 고문은 미뤄 두었습니다.”
앤시아의 질문에 멀찌감치 서 있던 고문관이 점심 메뉴를 말하듯 가볍게 답해 주었다.
아무래도 아서는 고문이라는 단어를 앤시아에게 말하지 않으려고 적당히 에두르려 했던 모양이었다.
이미 증인과 증거가 있는데도 굳이 고문까지 해야 한다니, 로사의 강경함을 확인한 앤시아는 앞으로 꺼낼 말들을 신중히 떠올렸다.
“주인마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말씀해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문관의 이어진 말에 앤시아는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제야 창백한 로사의 안색이 눈에 들어왔다. 겉모습은 멀쩡해 보여도 입술이 부르트고 손끝이 엉망이었다.
고문은 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밤새 두려움에 떤 것은 아닐 테고, 아마도 분을 참지 못한 듯 보였다.
앤시아가 로사와 대화를 하기 위해 다가가자 아서가 일정 거리에서 막아섰다.
“이 정도 거리면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실 겁니다.”
로사가 철창 밖으로 손을 뻗고 발버둥을 친다 해도 닿지 못할 딱 그만큼의 거리였다.
로사에게 말을 걸기 전 앤시아는 심호흡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리샤르를 자극할 수 있기에 일부러 동행에서 배제했다. 그의 측근인 아서가 듣기에도 그다지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으나 굳이 감춰야 할 만큼 비밀도 아니었다.
마음을 다잡은 앤시아는 준비해둔 말들을 꺼냈다.
“로사.”
주인님을 불러 주세요.”
앤시아와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로사의 태도는 차분하다 못해 서늘했다. 축축한 공기와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에 지난밤이 그리 녹록치 않았음을 짐작했다.
앤시아는 의도적으로 눈치 없는 척 발랄하게 입을 열었다.
“로사, 정말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
“주인님이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지 말고, 이건 이번 사건 이랑 상관없는 거란 말이야.”
심문 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한 앤시아의 가벼운 어투에 로사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있잖아. 비앙카에게 공작님을 유혹해 임신하라고 부추긴 이유가 뭐야?”
천진한 소녀처럼 가벼운 말투로 던진 질문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앤시아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던 아서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놓칠 뻔했다.
시녀장이 누구에게 무엇을 사주했단 말인가.
앤시아를 호위하러 함께 온 기사들은 헛기침까지 할 만큼 당황했다.
“그걸. 진심으로 지금 묻고 싶은 겁니까?”
“응. 너무너무 궁금했거든.”
감옥 안에 있는 로사조차 황당해할 정도로 뜬금없고, 사사로운 질문이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로사의 지친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세상에. 어리석다는 건 알았지만, 절 찾아와 처음 하는 질문이 고작 그겁니까?”
말을 할 때마다 목을 가다듬어야 할 만큼 힘들면서도 로사는 앤시아를 향한 악의를 드러냈다.
리샤르가 아니면 아무 말도 않겠다던 태도와 사뭇 달라졌다.
그만큼 앤시아의 질문은 가볍디가벼웠다.
로사에게 경고하려는 듯 아서가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앤시아가 먼저 양손을 들어 가볍게 맞부딪쳐 주의를 돌렸다.
“하지만 다른 건 다 증거가 나와서 물어볼 게 없는걸.”
“증거라니요?”
“로사가 건물에 폭탄을 가져다 놓고 터트리게 했다는 거. 전부 찾아냈거든.”
다.
“보기엔 안 그럴 거 같은데 뒤처리가 허술했나 봐. 그러니 로사가 공작님을 해치려고 한 거에 대해선 물을 이유가 없지.”
“주인님을 해치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눈에 핏발이 설 만큼 격렬한 반응을 보인 로사는 허리를 숙이고 기침을 했다.
앤시아는 고문관을 돌아보며 물병을 가리켰다. 그는 탐탁지 않은 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고문관은 공작가 사용인들 사이에서 퍼진 공작 부인의 선한 심성에 대해 주워들은 게 있었다.
전 약혼자를 맨발로 달려 나가 맞이하는 철없는 행동을 하기도 하고, 하녀들의 간식을 버터와 설탕이 듬뿍 든 것으로 바꾸고, 마을 아이들을 위해 내탕금을 풀었다고 했다.
공작 부인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귀족 영애가 손에 쥔 권력과 부를 어설프게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만나 보니 지하 감옥에 서조차 홀로 빛이 날 만큼 반짝이는 사랑스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어둠이라곤 한 톨 모르는 듯 순수한 눈망울과 마주치자 심문 전에는 일부러 물을 주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없어 물병을 가져다주었다.
물병을 받아 든 앤시아는 로사의 기침이 잦아들길 기다린 후 다시 질문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