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81화.
‘누구일까? 아마 이것만큼은 아무리 방심 시켜도 쉽게 털어놓지 않겠지.’
앤시아는 겉으로 웃고는 있었지만, 로사가 너무도 쉽게 속내를 드러내는 것에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일부러 중요한 질문보다 감정적인 부분부터 꺼냈다. 마치 철없는 소녀처럼 굴며 안 그래도 적의를 가진 로사를 긁어 놓는 동시에 방심 시켰다.
그 결과 로사는 제 수를 감추기보다 앤시아를 헐뜯는데 열을 올리며 말실수까지 해 버렸다.
그런데도 로사는 자신의 실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앤시아의 어리석음이 기사들 앞에서 드러난 것이 통쾌하다는 듯 살짝 웃고 있을 뿐이었다.
“수다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저를 방으로 돌려보내 주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습니다.”
‘역시 너 따위가 우리 공작가의 안주인 자리에 어울릴 리 없지.’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로사의 눈을 보며 앤시아는 생긋 웃어 보였다.
“아니. 괜찮아. 내가 궁금한 건 하나뿐인데 그건 로사가 당장은 말해 주지 않을 거 같으니까. 일단 내가 알아볼게.”
“예? 전 아무것도 답하지 않았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요?”
“충분히 답을 들었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로사는 로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 로사.”
“자, 잠깐만요! 기다리세요!”
앤시아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돌아서자 로사가 다급해졌다.
“사생아가 생긴 뒤에 우는 건 당신일 겁니다! 지금 나를 적으로 돌리면 후회할 거야!”
로사의 외침에도 앤시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서와 호위 기사가 그 뒤를 따라 멀어지자 로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갑자기 전세가 역전됐다.
위기감을 느낀 로사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분명 앤시아는 처음부터 제 궁금증만 풀려 했다. 가벼운 입을 쉼 없이 놀렸고, 고맙게도 비앙카의 임신 소식까지 알려 주었다.
그런 앤시아의 어리석음을 질책하며 지난밤의 울분을 풀기도 했다. 여기까진 좋았다. 앤시아는 중요한 것도 모르고, 철이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앤시아에게만 집중하느라 뒤편의 기사단 쪽을 신경 쓰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실언을 해 버렸다.
말 몇 마디로 앤시아가 무언가를 알아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기사단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비앙카의 임신이 자신의 구원줄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
“기다리세요! 마님!”
앤시아는 자신을 부르는 로사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고 곧장 바깥으로 향했다.
앤시아는 함정에 곧바로 걸려든 로사 덕에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로사에게 질문을 할 때 앤시아가 주의한 건 단순했다.
중요한 건 중간에, 가장 궁금한건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자.
앤시아는 사랑을 우선시하는 여인처럼 가벼운 질문을 하다가 중간중간 중요한 질문을 섞었다.
로사는 그것만으로도 자신을 어리석다며 무시했고 대화 마지막까지 방심을 했다.
아마도 비앙카의 임신 소식이 거짓이라는 건 금방 눈치챌 것이다. 천천히 생각해 보면 날짜상으로 말이 안 되니까.
“아서 경, 처음에 로사의 편을 들었지?”
“죄송합니다.”
“아서 경이 밤에 로사를 몰래 찾아가면 도우러 온 거라 믿을 거야. 그때 뭘 필요로 하는지 알아보면 좋겠어. 아마 가까운 하녀를 불러 달라거나 편지를 보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지만.”
“예, 알겠습니다.”
며칠 전 비앙카의 행방을 찾기 위해 로사의 방을 찾아갔던 앤시아는 그녀가 슬그머니 감추던 편지를 기억했다. 깔끔한 무지 봉투였으나 구석에 어떤 독특한 문양이 있는 것 같았다.
“로사가 사용하던 집무실을 한번 더 확인해 봐. 로사만 특별히 사용하는 편지지가 있는지, 비슷해 보여도 특별한 문양이나 종이 질이 다른 것도 찾아봐 줘.”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마도 아서라면 꼼꼼하게 확인해 주리라.
앤시아가 바깥으로 나오자마자리샤르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부인을 기다리는 일이 이토록 애타는 건 줄 몰랐군.”
마치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는 듯 멋들어진 동작에 앤시아에게서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첫 만남이 피투성이에 곰 가죽을 뒤집어쓴 모습이었던 건 생각도 안 날 만큼 우아했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은 것 같은데요.”
“기다림의 감각이 다른 듯해.
나만 부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말하니 마음이 아프군.”
와. 어쩜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할 수 있을까.
마수 방비책이랑 축제 준비에 로사의 일까지 조사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로맨스 소설이라도 읽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도 무표정에 가까운 무서운 얼굴을 유지한 채 목소리만 다정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표정 관리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표정 관리를 했다 한들 달콤한 목소리를 모두 듣고 말았다. 따라 나오던 아서가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그대로 굳어 버렸고, 호위 역시 묘하게 삐걱대는 움직임으로 앤시아의 주변을 살피며 곁을 지켰다.
다들 놀랐구나.
그래도 최근에 이런 리샤르를 자주 봐온 덕에 앤시아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단둘이 되면 무척이나 달달해지는 눈빛이나 다정한 손길이라든가…….
앤시아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가는 동안 리샤르의 손에 이끌려 작은 마차에 올랐다. 올 때도 타고 온 공작가 내부 이동용 작은 마차였다.
“고생 많았소. 호위와 함께 돌아가 쉬도록 해.”
“앗, 아뇨. 전 하녀들과 함께 마을에 가서 다른 건물 후보를 물색해 볼게요.”
“아니. 그런 건 부하들에게 시키도록 하지.”
“네? 하지만 제 의견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부인과 함께하고 싶어 내가 부린 고집이었소. 그 탓에 그대가 위험에 처했지.”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앤시아를 노린 로사의 계획에 리샤르가 휩쓸렸다. 폭탄까지 사용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앤시아는 로사를 몇 대 더 때려 줬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앤시아가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무심하니 오후의 고문 스케줄을 말하던 고문관의 등 뒤로 보인 흉흉한 도구들을 떠올리면 절로 소름이 끼쳤다.
항상 웃고 있던 앤시아의 얼굴이 굳어지자 리샤르는 조심스럽게 손을 잡고 애원했다.
“궁금한 일이 있거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말만 하시오.”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요. 그래도 직접 움직이면 바로 해결될 일들이 있잖아요.”
“조금 늦어도 그대가 안전하길 바라오. 부디 공작가 안에 머물러 줬으면 해.”
“언제까지요?”
“축제가 시작할 때쯤엔 항상 부인과 동행하리다.”
리샤르의 제안은 고마운 일이었으나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가장 바쁜 시기에 앤시아만 방에 틀어박혀 있으란 소리였다.
앤시아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하려 했다. 그보다 빠르게 리샤르가 앤시아의 손에 입 맞추며 간절히 속삭였다.
“부인이 또다시 위험에 빠진다면 이번엔 참지 못할 거요.”
앤시아가 반문할 틈도 없이 리샤르는 제 감정을 쏟아 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자를 베어 버리고, 의심이 가는 자는 모조리 팔다리를 끊고 증언을 토해내게 하겠지. 절차에 따라 죄를 물을 만큼 내 이성이 남아 있을지 장담할 수 없소.”
평소 사람을 대할 때 냉정하다 못해 무심한 리샤르와 상반된 가정이었다.
앤시아의 놀란 얼굴에 리샤르는 마치 농담이라는 양 미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맹세컨대. 그대를 해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역사에 길이 남을 폭군이 될 거요.”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은 시릴 만큼 푸르게 빛났다.
리샤르가 저를 사랑한다면 저 말은 진심이었다.
공작의 첫사랑은 지독한 외골수였기에.
사랑을 알기 전까지 그는 아내를 맞이하고도 오로지 마수 토벌에만 매진했다. 그러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에게 눈길이 가고 마음을 열게 되면서 그의 세계는 달라졌다. 정략혼과 다를 바 없는 아내의 존재는 첫사랑의 열병을 겪는 공작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원작대로 흘러갔다면 앤시아 역시 리샤르의 시선 밖에 있었을 테지만 지금 그의 눈 안에 들어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그는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을 위했다.
옳고 그름보다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우선시했다.
그 대상이 비앙카가 아닌 앤시아가 되었다 해도 리샤르의 사랑 방식은 그대로였다.
앤시아 역시 리샤르가 다칠 뻔했다는 상상만으로 로사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던가.
리샤르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앤시아는 고집을 부리기보다 한발 양보하기로 했다.
“알겠어요. 하지만 제가 꼭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외출할 수도 있어요.”
“그때는 기사부단장이라도 동행하게 하겠소.”
리샤르의 말에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너머 대기 중인 아서와 눈이 마주쳤다.
밤새 업무를 처리하고 있음을 짐작게 하는 초췌한 얼굴이 보였다. 다크서클까지 생긴 아서와 외출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고집을 부려도 되돌이표처럼 같은 말만 반복될 듯싶었다. 앤시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리샤르는 그제야 눈까지 포근한 기운을 비추며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리샤르의 미소에 앤시아 역시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잘 마무리됐나 싶었던 일은 로사를 만나고 온 리샤르로 인해 어그러졌다.
부부 침실에서 졸음을 참으며 축제 준비 리스트를 만들던 앤시아는 화가 잔뜩 난 채로 들어오는 리샤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부인. 시녀장이 그대의 혼수품을 전부 망가트리고 내버렸다는 게 정말인가?”
아니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물론 진품은 백작가에 있는 내방에 잘 숨겨 두었다.
그보다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당시에 보고를 받았을 텐데 이제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