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84화.
그때마다 이렇다 할 반응 없이 묵묵히 따른 대가가 지금의 평화로움이었다.
그 탓에 공작 부인이 된 여인은 폐쇄적인 환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사교 활동은 곧 정치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져 박해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거야말로 바라던 바야. 귀족들 사이에서 이것저것 재 가며기 싸움하는 취미는 없다고.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등장으로 생각이 많아진 앤시아의 침묵이길어지자 하녀들이 다가왔다.
“마님,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황태자가 왜 여길 와? 원작에선 완결까지 등장도 안 했다고.
“마님. 무척 놀라셨겠지만,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처음엔 줄리도 크게 당황한 듯 부자연스러웠으나 앤시아의 침묵에 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어? 어. 별로 놀란 건 아냐. 단지 의외라서.”
“저희도 이전에 방문하신 기록을 전해 들었을 뿐 황족을 맞이 하는 건 처음입니다.”
줄리의 기계적인 말대로 삼십년 전 선대 공작 부부의 결혼식이 마지막 방문 기록이었다. 그마저도 마지못해 얼굴을 비췄다고 들었다.
그만큼 황족이 자의로 북부에 방문한다는 건 전설 속 유니콘이 앞마당에 뛰어 들어온 것처럼 놀랄 일이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워 문을 열자 사용인들이 우왕좌왕 난리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시녀장의 부재가 그들을 더 혼란스럽게 하는 듯 보였다.
눈치 빠르게 엘리가 걸쳐 준 숄을 꼭 움켜쥐고 앤시아 역시 그 흐름에 편승해 집사장을 찾아갔다. 그래도 집사장이라면 무슨 준비가 필요한지 알고 있으리라.
그렇게 찾아간 집사장에게는 마치 출정 준비 중인 기사 못지 않은 비장함이 느껴졌다. 그에 앤시아는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인 건가 걱정스러웠다.
“집사장. 내가 도울 일이 있을까?”
축제 준비도 정신없이 바쁘기는 해도 기본 틀은 다 잡았다.
영지에 용병들이 넘쳐나고 광장에는 노점상이 하나둘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민원과 신청서가 줄지 않아 시간이 부족할 뿐이었다.
앤시아를 발견한 집사장은 화들짝 놀라며 급히 다가왔다.
“이곳에 오실 때가 아닙니다, 마님. 어서 준비하셔야 합니다.”
“어, 응. 그러니까 내가 도우려고 온 건데.”
앤시아의 평온한 반응에 집사장의 눈에 불이 켜진 듯 진중한 각오가 드러났다. 그 시선은 곧장 앤시아의 등 뒤에 서 있는 하녀들에게로 향했다.
“너희들은 마님을 누구보다 완벽하고 아름답게 보이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라. 시간은…….”
물론 앤시아도 단장할 생각이었다.
제국의 황태자를 맞이하는데 허술한 모습으로 나간다면 눈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진 집사장의 말은 앤시아를 당황케 했다.
“1시간 내로 황태자 전하를 맞이하러 나가셔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전담 하녀들이 거의 앤시아를 들다시피 해 방으로 돌아왔다.
서류를 볼 틈도 없이 욕실로 끌려가 순식간에 씻기고 젖은 머리를 말리느라 난리가 났다.
황태자를 맞이하는데 공작가의 안주인이 허름하게 만날 수야 없지만, 이 바쁜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인물에게 마음이 곱게 쓰일 것 같지 않았다.
정확히 한 시간 뒤.
씻기고 갈아입히느라 고생한 하녀들보다 더 기진맥진해진 앤시아가 저택 앞까지 거의 들려서 도착했다.
사용인들 전원이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어마어마한 인원들이 저택으로 들어오는 길에 정렬해 있었다.
황태자를 맞이할 때의 원칙은 이동 게이트 앞이었으나 이미 도착 후에야 소식을 알려 왔기에 저택에서 대기해야 했다.
저택 정문에 서 있던 리샤르가 앤시아의 기척에 뒤돌아섰다.
앤시아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리샤르에게서 전에 없이 번쩍거림을 느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장식은 일절 배제하였음에도 완벽한 핏의 제복 차림은 리샤르의 차가운 표정을 더욱 날카롭고 진중하게 만들었다. 수면 부족으로 거칠어진 피부조차 사용인의 노하우가 발휘됐는지 당장 손대고 싶을 만큼 완벽했다.
리샤르 역시 요 며칠 식사 시간에나 간신히 만났던 아내가 졸음기 가득한 눈이 아닌 빛 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는 눈을 하고 사뿐사뿐 다가오는 모습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지금 방문하는 이가 황태자만 아니었어도 이대로 앤시아를 품에 안고 들어가고 싶을 만큼 아내는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가볍게 반 묶음 하던 머리는 화사한 장신구와 함께 틀어 올려 평소 보기 힘든 목선이 우아하게 드러났다. 녹안과 닮은 에메랄드장신구가 새하얀 피부와 잘 어우러졌고, 은색 펄이 들어간 하얀 드레스는 마치 결혼식을 치르러 온 새 신부 같았다.
매일 앤시아를 보는 호위마저 귀 끝을 붉힌 채 뒤를 따르고 있지 않은가. 호위를 교체해야겠다 생각함과 동시에 진심으로 아내에게 다시 청혼하고 싶어졌다.
약식혼 때 마수 토벌을 마친 모습으로 아내를 맞이한 것이 뒤늦게 후회됐다. 이번 축제가 끝나고 마수 증식이 안정되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리라 다짐했다.
그런 다짐조차 하지 않으면 당장 앤시아를 끌어안고 지나간 일들을 후회하며 애원할 것 같았다.
이렇게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을 알아보지 못했던 지난날이 못내 아쉬웠다.
“공작님. 앞을 보세요.”
“부인이 너무 아름다워 눈을 뗄수가 없군.”
“공작님도 멋있으세요. 그보다 저기 깃발이 보여요.”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진심인 리샤르와 달리 앤시아는 정면만 본 채 적당히 대꾸하는 듯 보여 서 운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도착하신 것 같아요.”
“아, 그렇군.”
봄바람처럼 따뜻하기만 하던 리샤르의 시선이 단번에 차갑게 굳었다.
작위를 물려받기 위해 황가로 갔었을 때의 의도적인 냉대와 모욕이 떠올랐다.
떡하니 게이트까지 만들어 놓았으면 황태자는 핏줄 섞인 친척이라도 보냈으면 반나절에 끝날 일을 왕복으로 두 달 가까이 시간을 버리게 했다. 그러고도 곧장 승인을 해 주지 않아 귀족들이 북부의 그윈티드 공작가를 배척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배웠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던 건 황족과 다시는 마주하지 않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약식혼 때도 황가의 인장만 보내왔으니 더더욱 볼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삼십 년이나 열린 적 없는 게이트 따위 망가졌으면 좋았을 것을.”
관리자의 성실함을 탓해 봤자 소용없었다.
근위기사들의 호위 속에 나타난 황태자의 마차는 무척이나 느렸다.
긴장 속에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사용인들과 달리 앤시아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대열을 보며 리샤르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신경은 저 멀리 얼굴도 보이지 않는 황태자를 향해 있어 매서운 기세를 풍겼다.
이러다 반역으로 몰리게 되는 건 아닐까.
앤시아는 리샤르의 주먹 쥔 손등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유순해진 푸른 눈이 앤시아에게 향했다.
“의자를 준비할 걸 그랬군.”
“그랬다가 괜히 찍혀요. 어차피 북부는 황족에게 불편할 테니 적당히 대우해 주면 금방 돌아갈거예요.”
너무 적대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건넨 말에 리샤르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걷는 건가 싶을 만큼 느린 속도로 한참 만에 도착한 근위기사들이 길을 만들자 마차에서 황태자가 내려섰다.
“제국의 작은 태양, 제 1 황태자 카일루스 드미트리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오. 제법? 아니, 상당히 잘생겼어.’ 황태자의 첫인상은 잘생김이었다.
흰색의 제복은 귀한 보석과 금색 자수로 화려함을 자랑했다.
앤시아가 착용한 보석보다도 옷이 더 번쩍거렸다.
그만큼 화려한 제복에도 황태자의 미모는 꿀리지 않았다.
다가오는 황태자를 보며 앤시아는 단번에 결론 내렸다.
‘아이돌이다. 완전 진성 아이 돌.’
화려한 조명 없이도 빛나는 미모와 화사한 웃음은 앤시아가 만들어 내는 미소 그 이상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당연하게 즐기면서 마차의 문을 열고 내리는 동작 하나하나가 전부 퍼포먼스같았다.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도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는 이에게 가벼운 윙크까지. 자칫 경박해 보일 수 있는 행동조차 어울릴 만큼 화사한 미모였다.
붉은 망토를 크게 펄럭이는 쇼맨십까지 발휘했다.
‘내 손에 핸드폰이 있었다면 마구 찍어 댔을 만큼 화려한 미모야.’
공작가와 황가의 악연을 모를 리 없는 사용인들조차 얼굴을 붉힐 만큼 황태자의 웃음은 고귀하면서도 능숙했다.
저런 존재가 원작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정보가 전혀 없는 인물을 갑작스럽게 맞닥뜨리려니 긴장감이 몰려왔다.
사용인들과 기사단에 머물고 있었던 황태자의 시선이 공작 부부에게로 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앤시아와 눈이 마주친 듯했다.
황족만이 지닐 수 있다는 붉은 눈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짙은 웃음을 지었다.
앤시아의 앞을 가리듯 나서는 리샤르는 황태자인 카일루스를 경계하는 듯 보였다.
“내가 보낸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그윈티드 공작.”
“공작 저로 보내신 물품이 있다면 집사장을 통해 확인하겠습니다.”
“아니. 지금 바로 보이는데 따로 확인할 게 무어 있나.”
카일루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리샤르의 어깨 너머였다. 그 뒤로 상당수의 인원이 황태자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지금 언급할 만한 대상은 하나였다.
기껏 리샤르가 커다란 덩치로 앞을 막아섰음에도 앤시아는 옆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나 보군.
꼭꼭 숨겨 두고 보이지 않으려는 걸 보니.”